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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9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1칼로리의 음식을 생산하기 위해 1리터의 물을 허비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의 두 배에 달하는 온실가스를 공기 중에 내뿜고 있고.
신문을 펼쳐봐. TV를 켜봐. 가뭄과 홍수, 태풍.
나쁜 소식 없이 하루도 지나가는 법이 없지만 기후 회의에서 내놓은 결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뿐이야.
그리고 테러는 온갖 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빈곤으로 잃을 게 없는 아이들이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하고 있고."
이 책의 메시지는 굉장히 명백하고 더없이 직설적이다. 메시지가 뚜렷한 작품은 많이 읽어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직설적인 작품은 또 처음이라 지금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물론 단순히 직설적이기만 했다면 이 작품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직설적으로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하는 작품을 정말 싫어한다. 나는 심사가 꼬인 사람이라서 메시지가 명백하면서도 절대 등장인물이나 묘사, 해설로 등장하지 않고 내용, 즉 작품 전체에서 간접적으로 독자가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을 훨씬 선호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소설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작품보다 메시지가 우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분명하고 직접적인 작품의 경우 메시지를 위해 작품이 '희생'됐다는 느낌을 받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메시지가 곧 사건의 중심이며 방해자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 작품에 메시지를 잘 '활용'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마닐라 독감'이라는 유행성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지구, 독일 베를린의 길거리를 전전하는 노아는 자신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 그는 어느 날 총상을 입은 채 거리에서 깨어났고, 노숙자인 오스카가 노아를 돌보았다.
어느 날 노아는 신문에서 어떤 그림을 그린 화가를 찾는 광고를 보게 되는데, 그것을 보고 머릿속에 섬광을 느낀 노아는 자신이 그 그림을 그렸다고 제보를 한다.
그리고 노아가 제보 전화를 건 그 순간, 정체 모를 권력자들이 노아를 쫓기 시작한다.
"우리가 왜 이렇게 무감각한지 자네는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우리가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틀렸어. 우리 의식에서 그걸 떨쳐내도록 학습했기 때문이야."
기억상실이라는 흔한 소재에, 환경보호라는 흔한 주제다.
그런데 이 책 너무 재미있게 읽었고, 『비하인드 도어』와 『애프터 안나』 이후 망설이던 내게 서양 스릴러에 대한 믿음을 심어 주었다.
어떤 점이 그렇게 특별했을까.
먼저 서사 자체가 재미있었다. 기억상실이라는 소재가 흔한 만큼 이후 전개도 필연적으로 같은 소재의 작품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다. 주인공이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관건은 서사를 얼마나 흥미롭게 이끌어가는가에 주목하게 된다. 『노아』는 서사적 긴장감을 절대 놓치지 않은 채 플롯을 끝까지 힘있게 이끌어갔고, 결국 나라는 독자 한 명을 만족시켰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드러나는 진실도 제법 놀라웠고, 결말도 깔끔해서 좋았다.
그리고 상기 언급했듯 주제와 서사의 어우러짐이 탁월한 것도 장점이다. 작품 전체에서 주제는 계속해서 피력되는데(특히 재파이어를 통해) 서사는 서사대로 전개감 있었다.
흔한 것을 흔치 않게 표현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이제 예술가들의 임무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얼마나 새롭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만 아쉬운 점 두 가지. 노아의 시점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장이 바뀔 때마다 다양한 사람의 시점으로 넘어가는데, 처음에는 그래서 전개가 조금 산만하다. 후반부에 가서 매끄럽게 통합되긴 하지만.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앨리샤와 제이 모자의 끝이 불분명하다는 것.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장치가 있긴 하지만, 노아 측 서사가 만족스럽게 마무리된 데 비하면 다소 부족하다.
필리핀 마닐라의 빈곤층인 앨리샤와 제이는 이 책을 펼치자마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고, 주인공 노아와 하등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인물들이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타 국가의 빈곤층에 서사를 부여한 것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노아가 목적을 이룬 데 비해 이들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어쩌면 이들의 결말은 재파이어의 "노아 프로젝트는 그 모든 것을 끝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넌 빈곤이 지속되도록 만든 거야." 방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는 건 노아가 틀렸다는 뜻이 되어 버리고, 결국 약을 삼켰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양측의 선택 모두 최선은 아니었다는 뜻은 되겠으나, 이들은 끝까지 선진국 상류층에게 휘둘리기만 했다는 뜻도 되겠다.
'학살이 선택지가 될 수 없다는 것만은 알고 있어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죠.'
Room 17의 사상은 마블 시리즈의 타노스와 비슷하다.(물론 저자가 원고를 넘긴 게 2013년이니 타노스가 Room 17과 비슷하다고 해야 맞겠지만)
타노스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 행위를 정당화했다면 Room 17은 연구와 수치를 근거로 삼는다. 경재적 부유함이 '절반'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양측 다 똑같고.
어쩌면 재파이어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늘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나 만화 등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 인간의 행동에 증오를 품은 악당에 의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수많은 작품 속의 수많은 히어로가 인간의 선의를 믿고 목숨 바쳐 인간을 구했다.
재파이어의 말에 노아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파멸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이미 오래전에 모든 걸 잃어버렸을지도요.
그래도 난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내가 죽음을 막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우리가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차이를 만드는 거예요."
우리는 변해야만 한다.
우리는 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