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이란 무엇인가
하인호 지음 / 일송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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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탄생 이래 지속적으로 이성을 발달시키고 인지를 확장해 왔다. 과거에는 어떤 현상에 대해 그 원인을 알 수 없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 ‘불가지(不可知)한 존재(存在)’의 작용으로 여겼고, 다양한 신앙과 종교는 이런 무지한 바탕 위에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 대해서도 인간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종교나 소위 예언자라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미래가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에서 전개될 것이라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아래에서 과연 종교나 예언자의 예언이 타당한가 하는 것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여전히 생소한 미래학(futurology)이라는 학문을 선도하고 있고 하인호 교수의 저작이다. 이 책에서는 미래학의 정의와 역사, 여러 학파와 연구 방법 등에 관해서 소개하고 있다, 한마디로 미래학의 개설서라고 할 수 있겠다.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은 원래 1995년에 초판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000년 이후의 미래에 대해서 당시에 전망해 놓은 부분이 있다. 이것을 읽으면서 과연 미래학자들의 전망과 예측이 맞아떨어지는가 하는 것을 검증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단순히 미래학이라고 하면 막연한 느낌이 든다. 공상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우주여행을 맘대로 하고 로봇이 인간과 대등하게 협력하거나 전쟁하는 것이 우선 떠오르기도 한다.




미래란 생각해보면 막연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순간, 순간이 곧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은 쉼 없이 미래를 향해 달리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 단순히 공상소설처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세계가 복잡한 것 이상으로 미래 세계는 복잡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정치, 경제, 문화, 과학기술, 인간 정신 등 온갖 분야를 망라해서 분석하고 결과를 내놓는 것이 미래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지막 장(章)인 ‘21세기 미래사회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에서 앞으로 전개될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21세기는 후기산업사회를 맞이하여 정보화 사회를 지나 지식사회가 될 것이다. 또 ‘지식사회는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글로벌 지식사회로 발전하고, 글로벌 지식사회는 글로벌 시민사회를 출현시키고 있다. 또한 지식사회는 인공지능사회의 시작을 기약하면서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를 예고하고, 돌봄 경제사회(Care Economy Society)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p.287)

인공지능사회가 되면서 로봇이 현재 인력의 5%, 현존 지식의 5%만 제외하고 95%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95%의 사람들은 실직자가 되는 것일까?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새로운 사회는 항상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해 주게 된다,’고 한다. 문제는 각자가 얼마나 새로운 사회를 맞이해서 잘 적응하느냐에 달렸다. 저자는 이를 위해 ‘정신수련을 하고 다양한 현장 체험을 하고, 여러 분야에 근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곳을 여행하여 다양한 경험을 쌓고, 책을 많이 읽는 일을 일상화해야 한다.’(p.301)고 주문하고 있다.




수시변역(隨時變易)이라는 말이 있다. 때에 맞게 변화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변화를 하지 못하면 저절로 도태되는 것이 하나의 자연 법칙이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을 타지 못해 결국 나라를 잃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만일 앞으로 또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잃는다면 다시 나라를 잃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미래학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우리가 나아가야할 미래의 지향점을 제시하고 그것을 향해 전진할 수 있도록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미래학을 공부하고 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알게 된다. 정확한 미래의 모습과 방향을 예측할 수 있으면 변화를 주도할 수 있고,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새 시대를 개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강한 나라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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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용히! - 풋내기 사서의 좌충우돌 도서관 일기
스콧 더글러스 지음, 박수연 옮김 / 부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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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도 그렇지만 전부터 도서관의 사서나 서점의 주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앉아 있는 자리의 사방에 책이 침묵을 지키며 둘러싸고 있고 책 냄새가 기분 좋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한가한 시간을 쫓아 좋은 책을 골라 맘껏 읽을 것이다.




하지만 사서의 얘기인 <쉿, 조용히!>를 읽고 난 후 지금까지 내가 꿈꿔왔던 사서의 모양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은 거의 모두 비슷한가 보다. 서로 조화하고 협력하기도 하지만 또 갈등하고 다투기는 하는 것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애너하임에 있는 공공도서관에서 현직 사서로 근무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블로그에 써왔던 것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 사서는 책을 많이 읽을 것 같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책의 첫 장의 제목이 ‘사서는 책을 읽지 않는다’이다.




우연히 신문 광고에서 도서관 구직 광고를 보고 도서관이 ‘문학적 안식처’처럼 여겨져서 지원했다. 그런데 도서관은 전혀 문학적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근무하는 사서나 직원들은 책을 별로 읽지도 않았고, 지적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많았다. 또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책을 읽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었다. 집 없는 노숙자들은 휴식을 취하고 잠자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고, 아이들은 게임과 인터넷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간혹 정신이상자가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나 불량한 청소년들이 말썽을 일으킬 때는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결코 유쾌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순진한 학생 신분으로 도서관의 사무 보조였다가 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하고 정식 사서가 되고 수년 동안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겪는 일들을 써놓은 것이다.




사서들의 세계와 도서관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재밌고 흥미롭다. 다만 블로그에 올리는 글의 특성 상 조금 시니컬하다는 느낌이 있고, 조금은 자극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예를 들어  또 청소년들도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원색적인 비속어 등은 번역을 더 순화해서 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다.




“나는 책을 좋아해서 사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일을 계속할수록 나는 책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좋아서 이 일을 계속한다. 나는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한다.”(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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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수행 이야기
천진 지음, 현현 엮음 / 불광출판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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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불가의 교리에 따라 지리산에서 수행하고 있는 세 스님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불교를 신앙으로 하지 않아서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불교 신앙의 특징이라면 윤회(輪回)와 연기(緣起)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한번 사는 것이 아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물질적 육체뿐이며, 생명 자체, 혹은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죽는 순간에 다른 육신을 찾아서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일컬어 윤회라고 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모든 생명체는 전생(前生)이 있다. 연기는 전생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 어떤 인연을 맺었는가에 따라서 이승의 삶이 결절된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인연(因緣)이라고도 한다. 이승의 삶이 풍요롭고 복락을 누리는 것은 전생에 좋은 덕업을 쌓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무리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도 가난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전생에 좋은 덕업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승의 가난과 고통은 전생의 업이 풀리는 과정이다. 불가에서는 가난과 고통, 질병 등을 겪을 때 전생의 얽힌 업이 풀리는 것이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불가에서는 생명을 죽이는 것, 육식하는 것, 음행하는 것, 술 마시는 것 등을 금기시한다. 왜냐하면 이승에서 쌓은 업에 따라서 후생의 삶이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승에서의 복덕과 고통이 전생의 업에 따라 결정되듯이 이승에서 어떻게 살았느냐가 후생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에 좋은 덕을 쌓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어떤 생명체라도 한번은 부모자식의 관계였을 거라고 말한다. 억겁의 윤회의 수레바퀴 아래서 한번쯤은 그런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생명체라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죽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함부로 다루는 것도 이승에서 나쁜 업을 쌓는 것이다.

비록 나를 괴롭히는 벌레, 파리, 모기 같은 해충이라도 죽이지 않는 것이 도리에 맞다고 말한다. 배추를 기르는데 벌레를 죽이는 농약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벌레가 먹도록 배추를 따로 심어서 매일 아침에 사람이 먹을 배추에서 벌레를 잡아 벌레를 위한 배추로 옮겨 주는데, 아주 어린 벌레는 조금만 잘못해도 다칠 수 있으므로 조금 클 때까지 기다렸다가 옮겨준다고 하는 얘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마지막에 육식을 금할 것에 관한 얘기도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난 후 식탁에 오른 고기에 선뜻 젓가락이 가지 않는 이유가 내 마음 속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불가에서는 가부좌를 하고 좌선을 한다. 한 순간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길게는 십 수 년 동안 수행과 고행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책에서도 수행을 할 때 좌선을 하는 방법을 언급하고 있다. 억지로 몸을 혹사하면서 수행하는 것이나 온갖 잡념이 시달리면서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 등을 반대한다. 단 5분을 하더라도 청정한 마음과 명징한 정심을 유지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 막행막식하는 무애행(無碍行)에서도 비판적이다. 모든 것은 무(無)이고 공(空)이니 아무것에도 구애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불가에서 금하는 계율을 함부로 어기는 것은 자칫하면 파계승이 될 뿐이다. 오히려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 온전히 떳떳하게 하기 때문에 무엇에도 거리낄 것이 없어서 더 자유스럽다는 것이다. 즉 지킬 것을 지킬 때 온전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치 공자가 ‘하고 싶은 데로 하지만 법도를 벗어나지 않더라’ 라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내 입장에서 볼 때, 윤회나 연기와 같은 교리를 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지구상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는 현 시대에 불교의 생명관은 참으로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개인적인 수행과 깨달음이 어떻게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지도 사실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렇게 근검하고 겸손하게 무소유를 실천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반성하게 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만에 재미와 감동을 주고,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세분 스님께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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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 지음, 안진환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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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세계적인 불황 속에 있는데, 불황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과열된 경기가 진정되면서 필연적으로 불황을 초래하고, 이 불황을 통해서 다시 건전성을 회복한다는 치유의 과정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불황의 상태를 인위적인 자극을 가해서 벗어나고자 하면 더 심한 경제적 문제점이 잠복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는 더욱 파괴적인 불황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불황의 상태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황은 인간이 경제 운용을 잘못한 결과에서 온 것이지 결코 자연적인 과정은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불황의 상태에 빠지면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그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자의 대표적인 경제학자가 바로 잘 알려진 ‘존 메이너드 케인스’이다.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듣는 경제 상황에 따라 이율을 높이거나 낮추고, ‘뉴딜’ 등의 이름으로 정부 주도로 공공사업을 벌이는 것 등이 모두 케인스의 경제 이론에서 나온 정책들이다.

 

이 책의 제목인 ‘불황의 경제학’이란 불황은 경기 순환의 자연스런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병리적 현상이기 때문에 극복 가능하며, 따라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70년대 이후 케인스 이론이 구시대 유물로 치부되고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탈개입, 탈규제가 대세가 되고, 컴퓨터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국가 간에 자본이 광속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케인스의 이론이 모두 폐기된 것은 아니다. 이자율과 통화량을 조절하고, 시시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은 계속되어 왔지만, 그것을 자유주의의 하나의 일부분인 것으로 자연스럽게 여겼고, 케인스에게서 온 것인지 잊었다고 하는 말이 맞겠다.

 

이것의 결과가 바로 ‘금융의 세계화’이다. 한마디로 ‘돈놀이’라고 할 수 있는 ‘금융자본주의’가 인류 역사 이래로 없었던 적이 없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극명하게 나타난 적은 없을 것이다.

물론 경제 발전이 지상과제인 후진국이나 신흥경제국의 입장에서 외국의 자본은 가뭄의 단비와 같지만, 전혀 규제되지 않는 자본은 오히려 달콤한 독이 되어 기왕에 이루어놓은 발전조차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 문제다.

80년대 이후 이와 같은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하였다. 맥시코를 시발점으로 한 남미의 경제위기나 태국에서 발발한 동아시아의 금융위기 등이다.

 

이 책에서 저자인 폴 크루그먼은 위기 상황에서 구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평상시에는 규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전혀 제약이 없이 돈놀이에 몰입하는 금융자본에 대해서 적절한 규제 조치를 해야만 이로 인해 초래하는 불황을 미리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또 이미 불황에 빠져들었다면 이는 응급상황이므로 케인스의 이론에 따라 대규모의 적자 재정을 통해 공공사업을 벌이고, 유동성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이는 금융권에 대규모의 지원을 통해 서둘러서 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를 주문하고 있다.

일본이 90년 이후 지속적인 불황에 허덕이는 이유가 바로 대규모로 전격적인 구제 조치를 하지 않고 언 발에 오줌누듯 찔끔찔끔 구제 조치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 개인적으로 저자의 주장에 대해 전적인 긍정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책에 저자가 언급하고 있다시피 2000년대 초에 ‘닷컴 거품’이 붕괴되면서 일시적인 불황에 빠져들었는데, 이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가 ‘주택 거품’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택 거품’에서 비롯한 현 불황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또 다른 ‘거품’이 발생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연 경제가 ‘거품’으로만 지속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벌써 구제 금융으로 인한 거품과 인플레이션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달러나 유로화, 엔화처럼 기축통화로서의 기능이 전혀 없는 화폐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불황이라고 해서 통화를 남발하게 되면 나중에 그 후유증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이 책에서 남미와 아시아의 경제 위기의 원인과 과정, 소로스를 대표로 하는 환투기꾼들의 활약상, 소로스가 파운드화를 공격하여 며칠만에 10억불을 번 얘기, 환투기꾼들이 홍콩 달러를 공격하여 패한 얘기,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게 된 과정 등을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또 거시 경제적 관점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고, 나아가 세계사에 대한 또 하나의 통찰력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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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도미노
민재기 지음 / 세계로미디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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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답은 ‘사랑’이다.

‘이 우주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답은 역시 ‘사랑’이다.

사랑이란 ‘나’와 ‘내가 아닌 무엇’과의 사이를 잇는 교감의 선이며, 결속의 끈이다. 이 선과 끈을 인지하는 순간 이 우주 안에 내가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특히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내가 태어나고 존재하는 이유이다.




이 책의 제목은 ‘러브 도미노’이다. 여기에서 도미노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전달되고 확산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소망을 담은 말이기도 하고, 이 책 속에 사랑에 관련된 수많은 짧은 에페소드들이 마치 도미노처럼 쭉 나열되어 있는 모양을 표현하는 말인 것 같다.




과연 나 아닌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사랑의 기술>이란 책에서 사랑을 다음과 같이 인용 요약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첫째는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고, 둘째는 존중하는 것이고, 셋째는 책임감을 갖는 것이고, 넷째는 이해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주는 것이라고 한다.”(p.39)




사랑에는 남녀 사이의 사랑, 친구 간의 우정, 부모에 대한 효도, 자식에 대한 사랑, 이웃 간의 친목 등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의 실상은 관심과 존중, 이해와 책임, 양보 등을 벗어나지 않는다.




책 안에는 그야말로 가슴이 찡하도록 맑고 아름다운 얘기들이 가득 차 있다. 좋은 얘기를 소개하고 싶어도 모두 좋기 때문에 따로 소개할 수가 없을 정도지만, 부모에 대한 효의 가치가 가벼워지는 세태를 맞아 귀감이 될만한 얘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펠리칸과 엽중거미’라는 제목의 글에 ‘강아지의 효심’이라는 작은 제목의 글이다.

강원도 정선에 ‘효구총’이라는 무덤에 얽힌 전설인데, 가난한 농부가 끼니를 잇지 못하자 기르던 개를 잡아 먹게 되었다. 그리고 그 뼈를 가까운 개천 가에다 버렸는데, 마침 강아지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강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찾아보니 동산 양지바른 언덕에 죽어 있었고, 그 자리를 파보니 그 어미의 뼈가 묻혀 있었다. 그것을 본 농부는 강아지의 효심에 감동하여 무덤을 만들어주고 비석을 세워주었다는 얘기다.(p.103)




사랑은 남을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오로지 남만을 위한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을 베푸는 순간 나에게는 어떤 내적인 충만감이 생기고, 형언하기 힘든 존재감이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내가 남에게 베풀 때 생기는 이득의 한가지이다. 물론 이런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 사랑하고 인정을 베푸는 것은 아니지만, 저절로 느껴지는 행복감을 거부할 필요까지 없진 않을까?




이 책의 처음과 끝에는 톨스토이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미래형의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언제나 현재의 행동만을 뜻한다. 지금 보여주지 않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지금 당장 곁에 있는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짓고 사랑을 베풀어 보자. 이 지구 상에, 이 온 우주에 사랑의 파도가 퍼져가도록 사랑의 도미노를 슬쩍 건드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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