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폐허를 걷다보면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어, 타인의 무덤을 파헤쳐서 이곳의 삶을 쌓아올리고 있다는 생각, 더스트 폴이후로 세상은 예전보다도 더 모순으로 가득해진 것 같아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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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그가 온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가녀렸을지 몰라도 뾰족한 이빨이 달린 뱀장어처럼 꾀가 많았다. 자기 같은 존재가 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고, 강둑에서 몸을 섞거나 사생아를낳는 건 알맞은 방법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찬란함을 뽐내며 눈앞에등장했을 때 그녀는 그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동침을 하자고요? 내가 왜요?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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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망해가는데, 어른들은 항상 쓸데없는 걸 우리한테 가르치려고 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왜 망해가는 세상에서 어른들은 굳이 학교 같은 것을 만든 걸까 생각해보았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대체로 하품을 하며 수업을 듣는 반면, 칠판 앞에 선 어른들은 늘의욕에 가득차 있었다. 나는 이것이 어른들의 몇 안 되는 즐거움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워야 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 P165

이 마을 밖에서는 한 번도 우리에게 그런 임무가 주어진 적이 없었다. 나는 더이상 피를 뽑히지 않아도 되어서, 매일 밤 긴장 상태로 잠들지 않아도 되어서 이곳에서의 삶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일이 있어서 좋았다. 이 마을이 나를 꼭 필요로해주는 것 같아서.
- P168

"더스트가 사라지면, 대니의 특별 전시회를 열 거야. 저건 역사적으로도 아주 가치 있는 그림들일 거야. 그러니까, 이 시대에도 불행한 일들만 있지는 않았다는 걸 사람들도 알게 되겠지. 우리에게도 일상이, 평범한 삶이 있었다는 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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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했다. 그들이 내게 해준 말도 기억하려고 했다. 아무것에도 마음 붙이지 말고 그냥 어디로든 도망치라고. 그러다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땐 정말로죽는 거라고, 마지막으로 그 이름들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타티야나, 마오, 스테이시, 그리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다 잊어버릴 이름들이었다.
- P135

"나오미, 믿어지니? 나도 여기서는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어. 더스트 농도가 낮게 유지되는 것 같아. 게다가 살아 있는 작물들이 있어. 이 마을의 언덕 위에는 커다란 온실이 있는데, 거기에는… 그 사람들은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식물학자 한 명이 살아. 그는 마을로는 오지 않아, 그리고 더스트에 저항성을 가진 식물들을 연구하지."
- P150

지 알 수 있었다. 이 마을은 멸망한 세계에 남은 유일한 도피처였다. 끔찍한 대피소나 우리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연구소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사람들이 멀쩡히 살아가는, 돔 밖에 존재하는세계였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나에게 다시 현실감을 일깨워주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어떻게든 여기 남아서 살아가야 한다고,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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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옛날 과일들은 나 맛없는 거 아냐? 저번에 복원한 토마토도 좀 별로였잖아."
"21세기 사람들은 우리랑 입맛이 달랐나보죠. 그때 이런 걸좋은 과일로 쳤나봐요."
- P27

해월은 대표적인 폐허 도시 중 하나였다. 한때 한국의 최대 로봇 생산지였고, 분지 특성상 돔을 건설하기 수월해서 더스트 폴직후 가장 먼저 대피용 돔 시티로 지정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계들의 집단 오류로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한 이후에는 로봇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가, 재건 이후 몰려온 불법 발굴업자들에게 파헤쳐져 이제는 거대한 고철 쓰레기장이 되었다. 몇 년전부터는 복원 사업을 진행하는 건설업자들을 상대로 운영하는식당과 숙박업소들이 해월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띄엄띄엄 세워졌다.
- P47

 이제사람들에게 과학이란 더스트라는 재난 속에서 인류를 구한 위대한 기적이었고, 재건 이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도구였다. 그 외의 연구란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 가치가 없었다.
그럼에도 더스트생태학을 선택한 연구원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 분야에 대한 애정도 높았다. 하지만 왜 하필 이미 사라지고 없는 ‘더스트‘와 관련된 생태학을선택했느냐고 물으면 딱히 이렇다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 더 많을 터였다.
- P56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서서 남들을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 P63

게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결국은 더스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원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심오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 P64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밌지. 정적이면서 아주 역동적이야. 나는 이 정원에 손을 안 대는데도, 자신들만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루고 있지. 참 흥미로운 존재들이야."
- P71

"나도 어느 순간 깨달았지. 싫은 놈들이 망해버려야지, 세계가 다 망할 필요는 없다고, 그때부터 나는 오래 살아서, 절대 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그 대신 싫은 놈들이 망하는 꼴을 꼭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성공하셨나요?"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그놈들도 아직 잘 살고 있는 걸보면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덕분에 살아가며 다른 좋은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지. 전부 망해버렸다면 아마도 못 봤을것들이지."
- P77

아영은 그렇게 느리고 꾸물거리는 것들이 멀리 퍼져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천천히 잠식하지만 강력한 것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정원을다 뒤덮어버리는 식물처럼, 그런 생물들에는 무시무시한 힘과놀라운 생명력이, 기묘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영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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