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의 단편소설 모음. 꿈과 희망도 없는 저세상결말들 모음집이다ㅠ 그나마 희망적이라면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특히 여섯번째 소설 ‘덫‘은 강렬하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당신에게만은 대체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고 싶었습니다.」셋이 동시에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세스의 손이 1호의 목덜미를 잡고 데릭이 1호의 허리를 잡은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셋이 전원과 중앙처리장치를 연결해 쓰고 있다.
그래서 맛이 가 버렸던 1호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 P141

나는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침대 전체를 적시는 것을 느끼며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침실 창문 밖으로 셋이 밤의 거리를 걷는 모습이 보였다.
여섯 개의 다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가로등 불빛이 흔들려 셋의뒷모습이 어둠에 가려졌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 P143

아내는 말을 안아 올렸다. 계속 여동생의 다리에 달라붙어피를 빨아먹으려는 아들을 뿌리치며 아내는 딸을 데리고 있간에서 나가려 했다. 남자는 아내를 저지했다. 아들의 몸에서 계속 금을 얻으려면 딸의 피가 필요했다. 황금의 원천을아내가 들고 나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 P155

커다란 검은 눈이 무표정하게 빛나고 검은 머리카락이폭포수처럼 등으로 흘러내린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났다. 그것은 무감각하고 서늘한 병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딸은 보통의여자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으므로, 그 존재의방식에 맞게 달빛 아래 검은 숲과도 같이 그 무심하고 비밀스러운 폐쇄성으로 상대를 홀리고 사로잡는 매력을 발산했다.
남자의 아들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 누이동생의 방에 몰래드나들게 되었다.
그것은 여동생의 피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 P157

소년은 쇠사슬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거듭해서 돌에 부딪혔으나 다시는 벌레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소년은 그래서처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공포로 범벅된 정신 나간 비명이 아니라, 자신의 고독을 이해하고 슬퍼하는 인간의 눈물이었다. - P173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결혼해서 가정이 있는 경우에는더욱 그렇다. 집 밖의 문제를 피해 가정으로 돌아와도 가족이집 안에서 또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 P259

- 그래도 정신 차리고 바깥바람도 좀 쐬고 그래야지. 아직 젊고애도 없이 홀몸인데 요즘 세상에 과부 수절할 일 있니? 여행도다니고, 사람도 좀 만나고….
아이가 그녀의 전화기를 뺏으려고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엄마 지금 전화하잖아."
- 응? 뭐라고?
그녀는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아냐, 엄마." - P263

"네가 나를 불구로 만들었으니 나는 너의 자손들을 불구로만들겠다. 네가 나의 피를 모래땅에 흩뿌렸으니 앞으로 이 모래땅을 지배하는 너의 핏줄은 아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 P270

아이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자기 나름대로파악한다. 어린아이의 지각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에 대한 세상의 호의와 인간의 신뢰 여부를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한다. 왕자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친절하고 예의 바르지만 진심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왕자가 아는 한, 그것은 세상과 인간의 기본적인 특성이었다. - P271

"인간의 본모습은 공주가 아는 것과 다르다. 저주가 풀리더라도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지 못할 것이다." - P283

궁궐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테라스 아래 모여 섰던 사람들이 모두 공주를 쳐다보았다.
"잡아라!"
왕자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공주를 가리키며 고함쳤다.
"주술사와 내통한 마녀다! 잡아라!"
왕자의 명령에 병사들이 마시던 술잔을 내던지고 공주를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 P289

"나와 함께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가 되어 시간의 지평선을떠다니며 살 수 있다. 태양과 달이 부서져 사라지는 날까지, 별과 구름이 손에 잡히는 이 무한한 공간이 모두 공주의 것이다." - P293

나로서는 그를 묶는 것 자체가 불쾌하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상에 취향은 여러 종류가 있는 법이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애초에 그 상황에 계속 머물러 있지도않았을 것이다.  - P308

"할아버지는 이미 지나간 전쟁을 이미 사라져버린 수용소를 평생 두려워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수용소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죽고 난 뒤에야 정말로 자유롭게 자기 도시의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어." - P312

"어머니하고 지낼 때는 괴로웠지만, 내가 나빴으니까, 내가 나쁘기 때문에 어머니도 고통받았으니까 나쁘지 않게 되는 것이 목표였어. 내가 나쁜 말을 하면 어머니는 울고, 굶으면서 기도하고, 나를 침대에 묶어놓고 때리고, 밤이 되면 잠든 채로 죽은 사람들을 따라 돌아다니지 못하게 밤새 그대로묶어놓고 가 버리기도 했어. 그러니까 내가 나쁘지 않게 되는것이 삶의 중심이었어." - P319

내 부모가 자식의 삶을 파괴하고 미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무리하게 확장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이러한 강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워줬으니 감사하라는 말 앞에는,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아마그들에게는 진심일 것이다. 내 부모와 그들의 부모 세대, 한국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세대에게 가장 큰 화두는 언제나,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이아니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생존이기 때문이다.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문제다. - P320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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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묻지않았다. 나의 엄마 이야기도, 심지어 전쟁터에 나갔던 여자들조차 알려들지 않았다.  - P17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 있다 - P18

나는 그것이 아니라 ‘여자‘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듣고 싶었고, 그래서 오랜 시간을 들여 삶의 영역이 저마다 다른 많은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것도 한 번의 만남에 그치지 않고 주기적으로 여러 번 만났다. 보고 또 보고서야 인물을 화폭에 담아내는 초상화가처럼. - P19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집을 갔어. 남편뒤에 숨어 살았지. 하루하루 평범하게,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면서. 그렇게 기꺼이 나를 숨기고 살았어. 그리고 친정엄마가 ‘조용히 입다물고 아무 내색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거든. 나는 조국 앞에 내 할 바를다했지만, 내가 전쟁터에 나갔다는 사실이 슬퍼. 내가 전쟁을 안다는 사실이..
・・・・・・ 당신은 아직 애야. 애. 그래서 나는 이런 일을 하는 당신이 딱해......" 이들이 조용히 앉아서 자신에게 귀기울이는 모습을 종종 본다. - P21

수색견까지 데리고 ・・・・・・ 만약 개들이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어. 서른 명이나 되는 우리 목숨이 다・・・・・・ 이해가 돼?
결국 지휘관이 결단을 내렸어.…………누구도 지휘관의 결정을 아이 엄마에게 차마 전하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그녀가 스스로 알아차리더군. 아이를 감싼 포대기를 물속에 담그더니 그대로 한참을 있었어…… 아기는 더이상 울지 않았지.....…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어.....… 우리는 차마 눈을 들 수가 없었어. 눈을 들어아기 엄마를 마주 대할 수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없었지...…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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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무게가 늘어 허리가 아프고 발이 자주 부었다. 숨이차고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고, 땀을 많이 흘리고 화장실에도쉴 새 없이 들락거려야 했다. 병원에서는 전부 정상적인 징후라고 했다. 그러나 6개월이 되도록 태동이 없었다. 배 속에서뭔가 약하게 꿈틀거리거나 부르르 떠는 듯한 느낌만 아주 가끔 전해질 뿐, 구체적인 아기의 몸이 움직이거나 팔다리가 자궁벽을 때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녀가 걱정하자 진한 화장을 뒤집어쓴 산부인과 의사는 사납게 그녀를 나무랐다. - P95

"처자 배 속에 있는 그 애 말인데, 그 애를 날 주오. 밭에는 이미 자리가 잡혔고, 이제 씨만 넣으면 된다며? 내 씨를주지 아니, 아예 내 후실로 들어앉는 건 어때? 우리 집 대만이어주면,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만 낳아주면내, 애는 물론 처자도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게 해 주리다."
"아니, 저기, 할아버지...."
"사위 놈 말이 나이는 문제가 아니라고 처자가 그랬다며?
내 여든둘이지만 이래 봬도 아직은 젊은 놈 못지않게 정정하다오, 호적에도 다 정식으로 올려주리다. 응?" - P104

그렇다면 ‘아이가 제대로 발육을 못 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의 짙은 화장을 뒤집어쓴 얼음장같은 눈초리를 떠올렸다. 태아에게 발육 상의 이유로 아버지가 그렇게 절실히 필요했다면, 아버지 없이도 이만큼 발육한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의사의 말, 아니 어떤 인상 고약한낯선 젊은 여자의 말만 믿고, 배 속의 아기가 괴물이 되어가고 있을까 봐 지레 겁먹은 건 아닐까? ‘아기를 위해서‘라는 명분아래 아이 아버지를 구하는 데만 너무 열중해서, 정작 중요한 아기에게는 충분히 마음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발육이 어떻게 되었든, 아버지가 있든 없든, 아기는 그녀의 아기였고 또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만의 아기였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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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법은 없지만 그런 세상은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나도 저주 용품을 만드는 걸로 직업을 삼고, 그걸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 P17

사장의 손자는 전등을 켤 때나 끌 때나 하루에도 몇 번씩 스위치를 누르기 위해 토끼의 등을 만졌다.
사장 아들의 집에서 토끼는 더 이상 종이를 갉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 P24

꿈속에서 아이는 몸통이 하얗고 꼬리 끝과 귀끝이 검은 귀여운 토끼와 함께 나무아래 앉아서 즐겁게 자신의 뇌를 갉아먹었다. 갉을수록 아이의 세계는 점점 좁아져서 마침내 앞으로 영원히 토끼와 함께 앉아 있는 나무 아래를 떠나지 못하게 되었으나 아이는 이미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토끼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할 뿐이었다. - P26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 P34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있는 사물 외에는 아무것도 상상할 능력이 없어 보이는, 소박하고 건실한 남자였다. 낯선 이성 앞에서 그녀는 내내 화장실이 불안해 어쩔 줄 몰랐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수줍음 잘 타는 순진하고 얌전한 여성이 제 이상형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남자 앞에서 수줍어하는 여자는 찾기 힘들더군요. 남자 쪽에서 강행하다시피 석달 후에 약혼하고 또석달이 지나자 결혼을 했다. - P42

그녀는 젊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젊은 자신의 몸을바라보았다. 자궁과 탯줄이 아닌 대장과 배설물로 자신에게서 비롯되어 어엿한 성체를 이룬 존재를 바라보았다.  - P55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네게 부탁한 적이라도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도 따뜻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었더냐? 너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태어나게 했고 이후에도 나를 혐오하고 역겨워하여 줄곧 없애고자 하지 않았느냐? 내게 베풀어준 것이라고는 있어 봤자 네게는 백해무익할 따름인 배설물과 오물뿐이 아니었느냐? 그나마 받아먹으며 사람다운 외양을 이루기 위해 나는 네게서 갖은 수모와 박해를 받아야 했단 말이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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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4.3 에 대해 말했잖아. 그 후에 꿈도 꿨는데, 조금씩 여러 가지가 기억이 나려고 하네." 기억의 실을 손으로 감듯이 어머니는 신중하게 이야기했다. 이전에 단편적으로 4.3사건을 말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조금 이야기하다 멈추고 또 이야기하려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이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하면 안 돼.
4.3은 특별해. 절대로 들키면 안 돼,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니까! 너희는 몰라. 더 묻지 마."  - P147

개인숭배에는 의문을 품지 않으면서 타인이 소속된 종교는 절대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위화감을 느꼈다. 집에서도 정치적 지향성이 뚜렷한 노래를 부르는 부모님 모습은 좋게 말하면 앞뒤가다르지 않은 순수의 화신으로, 나쁘게 말하면 시야가 좁은 맹신자로 보였다. - P153

이데올로기가 달라 서로 탓하고 싸우고 죽이는 세상에서, 이데올로기가 다른사람들이 새로운 가족이 되어 함께 밥을 해서 나눠 먹는다는 사실이 무척 숭고하게 느껴졌다. 생각이나 가치관이 달라도 같이 살 수있다는 것을 어머니와 카오루가 증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 P174

가족이란 혈연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히 믿게 되었다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기능하는 관계성이 있어야 집합체가 비로소 가족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기억을 공유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 P175

부모님은 장남만이라도 곁에 두게 해달라고 조총련 중앙본부에 탄원했지만,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신속하게 장남도 조국에 바치라는 명령이 돌아왔다. 조직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면 김일성을 향한 충성심이 흐려진 증거라고 비난받았다.  - P182

북에 간 직후부터 건오 오빠에게 불행한 일이 이어졌다.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빠가 사랑해 마지않는 음악이었다. 클래식을 포함한 서양음악과 해외문학이 금지된 당시 북조선에서 오빠가 가져간 음악 플레이어와 책들은 큰 문젯거리였다. 비판을 받고,
자기비판을 강요당하고, 감시당하고, 미행당하고…… - P184

기억을 잃어가던 어머니가 김일성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잔혹하고 순수하고 활기차고 사랑스럽고가엾고 성숙한 소녀 같았다. 인간의 불가사의한 면모가 응축된 이장면은 <수프와 이데올로기> 118분 중에도 가장 보는 이의 마음을사로잡는다. 떠올릴 때마다 숨이 답답해질 정도다. - P194

어머니는 고향을 떠난 지 70년만에 다시 제주도를 방문했다.
기억이 희미해진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을 따라 얼핏 떠오르는 한국의 애국가를 더듬거리며 부르는 조선 국적의 어머니. 그 옆에는부모를 반면교사 삼아 아나키스트로 살고자 하는 한국 국적의 딸과, 북한 정부가 수여한 훈장을 단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사진을 들고 장모님과 아내를 지지하는 일본인 사위가 있다. 4.3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한 우리 중 누구도 한국의 국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세 사람은 함께 밥을 먹는다. 우리는 가족이다. - P195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본 지인에게 메시지가 왔다. ‘초상화를 치우는 장면을 굳이 넣다니, 다시는 북조선에 입국할 수 없을지모른다. 정말로 두 번 다시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은 거냐. 평양에있는 가족이 걱정되지 않냐‘는 항의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가족을카메라에 담아온 26년 동안 그러한 자문자답을 되풀이했다. 질문에 대한 답이 작품이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내가 정권이나 조직의눈치를 보며 영화를 만들 거라고 생각하나.  - P197

어떻게든 초상화를 치우는 장면을 넣고 싶었다. 넣어야 했다.
나 자신과의 결별로서, 새롭게 걸어나가기 위한 생의 마디로서 낡은 시대에 고하는 결별이자 가족과의 결별이기도 했다. ‘그런 시대는 이제 끝냅시다!‘ 하는 결별. 평양에 있는 가족이 걱정되지 않을 리가 있을까.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가족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에 가족이 있어서 아무 말 못 했던 시대를 끝내고 싶었다. 이제 충분하지 않나.
무엇보다 나는 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 P198

오사카의 영화관에서 가족의 나라를 본 어머니는 "네각오는 알겠다. 앞으로 딸이 하는 일에 말 보태지 않을 테니까 건강만조심하고"라고 했다. 그 후 매달 인삼과 마늘을 듬뿍 넣은 닭 백숙을 만들어 도쿄로 보내주었다. - P199

오사카 집에 더 이상 초상화는 없다. 알츠하이머로 ‘귀국사업‘이라는 말도 잊어버린 어머니다. 어머니는 나와 남편을 포함한가족 모두가 함께 있다는, 당신의 삶일 수 없었던 시간을 살고 있었다. 점차 온화해진 어머니는 매일 그림책을 보면서 당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와 남편은 어머니의 어떤 이야기에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P201

어머니는 퇴원 직후 절에 가서 스님에게 건오 오빠 일주기에독경을 부탁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와 오사카시 덴노지구의 통국사에 가서 부탁을 드렸다. 재일코리안이었던 스님은 북송 사업으로 이산가족이 된 우리의 상황을 잘 알았고, 독경을 마친 뒤에도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어머니는 스님 말씀에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에서 합장하고, 독경을 듣고, 스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는 어머니는 내가 알던 어머니와 다른 사람 같았다. 나이 든 어머니가 조금은 작아 보이기도 했다. - P207

받지도 않는, 근원적인 ‘기도‘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해온 모든 행위가 기도였던 것이 아닐까. 남편을 바라보고, 아이들을 안아주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깨우고 꾸짖고 칭찬하는 그 모든 것이 기도였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 P209

앞선 두 편의 영화 내내 양영희의 비극은 미완성의 가족에 있다. 도쿄와 오사카, 평양이라는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전체주의의거짓말에 의해 분리된 가족, 국가와 사상이라는 매개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가족의 현실 말이다. 이 가족 내에 놀랍도록 개인 그 자체인 아라이 카오루가 뛰어들고, 그는 끝내 국가 체제의상징들을 뜯어내고 그곳에 진짜 가족사진을 채워 넣고야 만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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