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우렁찬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없는 음성으로 낮게 읊조리는 소심한 목소리에 삶의 깊은 진실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런웅얼거림을 잘 들으려면 발화자 가까이에서 귀를 기울여야한다.
영감을 좋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알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냥 현재를 즐기자, 현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 마주 앉아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미래는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하자고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 내가 모든 여행에서 택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페넬로페의 침대에 누운 오디세우스는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때로 그는 고향으로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운요정 칼립소의 침대에서 매일같이 맛있는 것을 먹으며 행복한 여행자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혜의 여신이 그를다시 고난의 여행길로 끌어냈고 그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기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곳으로 돌아갔다.
자주 떠도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오디세우스와 같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방랑을 멈추고 그림자를 되찾을수 있는 어떤 곳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까? 과연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나는 거기에서 받아들여질까? 요술 장화를 신고 영원히 떠돌아다니는 슐레밀, 그림자를 판사나이가 내 운명은 아닐까? 그런데 그런 삶은 과연 온당한가? 요즘의 나 역시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런 환대는 정말 고맙기만 드물기는 않았다. 환대의 관검에서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면,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불쑥 튀어나와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기하철역으로 꼽히는 도쿄의 신주쿠와 시부야 역에서, 대중교통이 끊긴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발리의 우붓에서, 영어가 한마디도 안 통하는 멕시코의 유카탄반도에서이름 모를 이들이 출구를 알려주고, 차를 태워주고, 종교 축제에 데려가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달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것과 그 푸른구슬에서 시인이 바로 인류애를 떠올린 것은 지구라는 행성의 승객인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서로에게 보여준 신뢰와 환대 덕분이었을 것이다.
번역된 작품은 더이상 내 소유가 아니라 해당언어권 문화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해외의 초청에 응할 때는 그저 일종의 상징이나 증인으로 모셔지는게 내 역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두 시간 정도연단에 앉아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행자 가 되어 보내면 되는 것이다.
허영과 자만은 여행자의 적이다, 달라진 정체성에 순응하라, 자기를 낮추고 노바디가 될 때 위험을 피하고 온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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