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는 주목을 원하지 않는다. 무시당하거나 지워지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러움을 원한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 어디서 뭘 하든 자연스럽기를, 어느 풍경에 끼어 있는 별스러워 보이지 않기를..
거리를 무심히 걷는 모든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기를,
그게 가능할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아가씨는 시위를 하고 있다.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시위.
걷고, 쇼핑을 하고, 나다니고, 차를 타고, 찬거리를사고, 일상을 사는 시위.
이렇게 한 명이 거리를 걷는 모습을 보면 한 명이더 용기를 낼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다음 날은 두 명일지도 몰라, 모레는 열 명일 수도 있겠지, 집 안에 숨어 있던 여자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면 서로를 보며위안을 받을 수 있겠지.  - P119

"마음은 물이고 언어는 그릇이야, 물은 그릇에 따라모양이 변하지."
- P129

나라의 대표자는 언어와 같다. 마음의 문이다. 생각의 그릇이다. 대표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속성이 국민의 향방을 정한다. 선거일을 중심으로나라의 지형도는 바쁘게 움직인다. 누가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가, 누가 기가 죽는가, 누구에게 힘이 모이는가.
- P152

기성세대가 원하는 건 현상유지가 아니에요. 세상이 자신에게 익숙한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거죠. 좀 더 거칠고 야만적이었던 시절로요. 하지만 제상은 그대로 두면 변해요. 흘러가고 변화하죠. 난 세상을 그대로 두기를 원해요..
- P154

그래서 신영희는 언어학자가 되었다. 언어가 그날을 모독하고 현상을 바꾸었기에,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언어고 사람의 마음은 언어에 담기며, 경험은 사라지고 언어만이 남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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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변하지 않는 까닭은 과거가 이미 관찰되었기 때문이야.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과거를 고정했기때문이야. 미래가 가능성의 영역으로 열려 있는 까닭은 아직 아무도 미래를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이야.
만약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면 과거도 미래도 그저 끝없는 혼돈으로만 존재할 거야.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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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그들이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아서 더 그랬다. 살기 위해서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죗값을 느껴야 했다.
- P385

살고 싶다는 건 무엇일까. 여태껏살고 싶다고 생각해서 살아온 하루가 있었던가. 살아있기에 살아지던 하루는 아니었을까. 은지는 처음 만나는 욕망이 낯설었다.  - P417

컴컴한 3평짜리 방과 가게의 월세와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미래만이 은지가 가진 전부였다.
- P420

정말로 더미에게 미안해서 이러는 걸까? 델리를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계속해서 절망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이? 하지만 이 문장에는 어폐가 있었다. 한나가 더미에게 미안함을 느끼려면 더미가 반복되는 사고에절망감을 느껴야 하는데 더미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행위는 한나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수단이자 변명일 뿐이었다. 마지막 시험을남겨두고 곧 파기될 기계를 생각하며 슬픔을 느끼는본인을 위한.
- P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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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난제는 내가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거였다.  - P127

세상이 이렇게 얼렁뚱땅 생겼다는 걸 엄마를 통해배웠다. 세상은 치밀해 보이지만 사실 대체로 엉성하고 얼렁뚱땅 넘어간다는 것을. - P131

심라현, 엄마 말 잘 들어. ‘원래 그런 건 없어. 당연한 것도 없고, 그러니까 애들이 당연하다거나 네가 이상한 거라고 하는 거 다 듣지 마. 그거 다 너희가 아직어려서 상대방 상처 주려고 하는 말이니까. 알겠지?
- P135

사람들은 가끔 이유 없이 누군가를 미워해. 그냥 상처 주고 싶어 해. 그러니까 저 사람이 왜 나에게 상처를 주려는지 네가 생각할 필요 없어.
- P136

엄마는 그날 배꼽 외에 더 많은 비밀을 내게 알려주었다. 내게 생식기가 없다는 거였다. 그전까지 나는내가 여자인 줄 알았다. 엄마가 딸이라고 불렀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저 딸이 더 좋다는 엄마의 취향일 뿐이었다.  - P138

언니를 만나는 동안은 오롯이 행복했다. 아는 것도없으면서 사랑을 속삭였던 민혁이와의 만남을 제외하고 그렇게 사랑이 행복으로만 설명 가능했던 것은 내인생에서 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언니와 헤어지고, 엄마는 언제든 다시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거라고 위로했지만 거짓말이었다. 그런 사랑은 살면서 딱 한 번만 온다. 아예 안 올 수도 있고, 그런 사랑을 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다.
- P153

 내 고민은 오롯이 ‘내 몸에 대한 것이었지만 엄마는 한결같이 그 문제에 대해 심드렁했다.
어쨌든 너는 이 세상에 있잖아, 그런데 무슨 진실이 더 필요해?
엄마의 이런 태도에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할말이 없었다.
- P159

 엄마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다 이해한다고말해놓고 막상 다른 존재를 마주하면 본능적인 두려움에 도망친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선배는 도망갔다가다시 돌아올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69

나는 내 몸의 난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어떤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은 무엇이라도 다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지금은 굳이 나를 무엇으로든 규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무엇도 되고 무엇도 되지 못하고 아무것도되지 않아도 된다.
- P173

 나는 라오의 비늘조각을 발견한 후에야, 엄마의말을 인정했다. 세상은 다양한데 모두가 다양하지 않은 착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 P183

내가 처음으로 쓴 시나리오를 읽었던 날에도 엄마는 주인공들이 할 일이없어 그런다며 바쁜 일을 시키라고 했다. 그렇게 엄마말을 따랐다가 미련 없이 갈 길 간 주인공들이 얼마나많았던가.
- P193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사실 그렇게슬프지도 않아."
엄마가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결국,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걸잊으면 슬퍼지는 거야."
- P194

"썩 믿기지는 않죠? 이해해요. 그게 당연한 반응이에요. 지구의 주인들은 낯선 존재를 오래도록 상상해왔지만 받아들일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죠. 이 드넓은 우주에 사는 생명체 중 지구만 그래요. 폐쇄적이
면서도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아주 특이한 성향이죠.
그러니까 당신도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돼요. 믿음에 무게를 부여하지 않아도 돼요.. 답을 선택할 필요도없고요." - P202

라오는 그 말을 묵묵히 들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사분한 사람이었다. 바람 없는 실내에 켜진 촛불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따뜻한 느낌은 아니었다. 온도를 따지자면 너무 차가워서 따뜻하다고 착각하는 정도.
- P205

"그게 뭐가 중요해요. 지구의 절반은 외계인이에요..
모두가 다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웃긴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건 생각보다 중요해요. 그걸 알아야 해요. 이 지구에 같은 인간은 없어요. 모두가 다 서로에게 외계인인 걸, 모두가 같은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요."
- P207

"라현아, 끊임없이 사랑을 해, 꼭 불타오르는 사랑이 아니어도 돼,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존재를 만나, 그사람이 우주를 가로질러서라도 너를 찾아올 사랑이니까."
"응. 그럴게."
"너는 지구인이니까. 네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니까.
지구인일 수도 있고 외계인일 수도 있지만 그건 걱정마. 이곳에 있는 모두가 서로에게 외계인이니까."
"응, 알겠어."
"결국 너는 너야. 끝까지 무엇이라고 굳이 규정하지않아도 돼."
- P222

이 사랑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사랑일까. 나를 꽉끌어안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랑은,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알려준 것은 온도였다. 이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런 온도의 존재를 만나야 한다고.
- P222

도아는 그대로였다. 떠났을 때 모습과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20년을 기다렸지만 이 애로서는 고작 몇 년 만에 내게 돌아온 것이다.
- P240

도아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었지만 다른 비행사는 혈액에까지 이미 암이 퍼져 있었다. 우주를 함부로 휘젓고 다닌 죄일까. 보통의 즉음보다도 훨씬 지리멸렬하다.
- P248

괴로운 순간은 길게, 행복한 순간은 거짓이었던 것처럼 만드는 놈이다. - P248

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사람이 돌아왔다. 하필네가 있던 곳이 우주여서 나는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네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숨 쉬는 모든 곳이 네 아래에 있었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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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본다고 믿는 것을 쓰는 게 아니라 믿는 것만 본다. 그래서 보는 것만 쓸 수 있다고.
- P11

지평선에 별이 닿아 있었다. 은하수가 흘렀고에 별이 깔려 있었지. 나한테 쏟아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할 수만 있다면 평생 그렇게 누워 별만 보고싶었다. 마치 나에게 우주가 말을 거는 것 같았어.
- P11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말한 사막의 밤하늘보다 그 밤하늘의 별이 우리에게 빛으로 닿을 때까지 얼마만큼 오랜 시간 고독한 우주를 가로질렀는지 따위를 더 생각했다. 이 고독도 철저히 지구에서 바라보는 내 입장일지도 모르지만, 빛은 숨 가쁘게돌아가는 우주를 정신없이 가로질렀을 테지. 이렇게 - P12

 인류가 방관하고 들이건 발암물질이 결국 암, 결핵, 뇌종양,
뇌출혈, 심장병 등 다양한 형태로 변이되었으니 체기능부전증이라기보다 모두가 각자의 병에 걸려 죽은 것과 다름 없었다. - P17

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것과 외출할 때 방독면과 모자를 쓰는 것만이 증상을 지연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더는 집베란다에서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시대가 이토록 빨리 도래할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자주하늘을 바라봤을 것이다.
- P17

리윙은 그즈음 만났다. 홍콩에서 교환학생으로온 리윙에게 내가 던진 첫 질문은 이랬다.
모국어로 들어도 이해 못 할 물리를 왜 외국어로 배우러 온 거야?
리윙은 유독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홍콩보다 한국의 하늘이 그나마 깨끗하거든.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는데, 홍콩 하늘이나 한국 하늘이나 도긴개긴이었다. 극지방으로 가지 않는 이상이제 지구 어디에서도 맑은 하늘은 기대할 수 없었다.
- P18

우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구는 그 많은 행성들 중어쩌다 생긴 하나에 불과했고, 그중에서도 아주 작은행성이었으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별 상관 없는 행성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안에서 존재의이유조차 알 수 없도록 우연히 생긴 생명체였다. 사랑과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만든 것은 인간이다. 이 땅을외롭게 만든 것은 오롯이 인간의 짓이라는 걸 상기할때마다 나는 그저 이 행성을 떠나야만 그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 P21

리윙은 뒷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말없이 나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리윙이 기대하는 특별한 이유를 댈 수 없었다. 나는 이유 없이 계속해서우주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우주로, 지구 밖으로 나가고 싶었고 설령 그 이유가 외계 생명과의 조우라거나 테라포밍을 위한 일이라도 상관 없었다.  - P29

외롭구나. 외로움을 이겨낼 수 없을 때 사람이 덤덤해지는구나.
- P31

아버지는 도로가 없는 우주를 어떻게 달리느냐고물었다. 정말로 궁금해 물은 것은 아니겠지. 영원히 젊을 것 같던 아버지는 어느새 머리가 전부 새하얗게셌고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해졌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아요. 바다에도 도로는 없지만 배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잖아요.
- P47

아침 클래식 음악을 듣고 교양프로그램을 시청했으며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전시회를 구경했다. 건강한 정신을 가진 남자만이 아버지가 될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아주 예전에는 이런 절차 없이도 누구나 아버지가될 수 있었다고 들었다. 좋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무분별한 시절이기도 했겠지만, 그때 모든 남자는 노력없이 아버지가 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겼을까?
- P51

"당신이 아버지‘가 된다는 서약서에 서명한 자료입니다. 당신의 심장을 더 나이 들기 전에 보관한다면 30년 후 당신의 아이에게 기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내걸 수 있다는 서약
"아, 아니! 잠시만요!"
그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일어섰다. 그의 행동을 본두 경호원이 총구를 들었다. 저들이 자신을 이 방 밖으로 살려서 내보낼 생각이 없다는 걸 그는 뒤늦게야깨달았다. - P54

"한국 며느리는 식탁을 엎어야 한다는 말이 있어.
대체로 뭘 못 하게 하거든. 그러니까 그냥 식탁을 엎어버리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야."
- P83

바이러스가 얼마나 교묘하고 재빠르게 몸을 바꾸고 인간을 속이는지, 해마다 얼마나 많은 바이러스가 새로 생겨나고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지 사람들은 잘 몰라. 생명의 유전자가 바이러스를 통해 유전체에 들어온 거라면, 그래서 결국 지구의모든 생명체가 뒤섞여 있는 거라면 사실 아주 멀리서바라볼 때 지구 역시 하나의 바이러스에 불과할지도몰라. 더 웃긴 건 도대체 이 바이러스가 언제부터, 어디에서 왜 생겨났는지 모른다는 거야. 그래서 어떤 이는 바이러스가 사는 차원이 우리와 다를 거라는 이야기를 해, 우리보다 더 높은 거지. 그러면 바이러스는우주를 알고 있는 진정한 우주의 주인일지도 몰라."
- P101

"우주에는 어쩐 일로 왔어?"
일을 묻는 거라면 승혜가 어떤 역할로 왔는지 주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연의 질문은 ‘왜지구를 도망쳐 나왔느냐‘ 라고 해석하는 게 옳았다.
"지구가 너무 어지러워서."
- P103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직감을 하는 이유는무엇일까. 이를테면 네가 죽지 않고 끊임없이 해수면밑으로 떨어지고 있을 거라는 예감. 그러다 돌연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는 불가능의 확신, 우리의 이별이지구에서만 일어난 일일 거라는, 스스로를 향한 같장은 위안까지도.
- P108

남극의 해저에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을 기주를 상상했다. 아이의 시체를 품에안아보지 못했으므로 그렇게 기주는 살지도, 죽지도않은 존재가 되었다.
- P111

레시는 이 바다의 생명입니다. 이곳에 살고, 이곳에서 살아가야 할이 생태계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레시를 지구로 옮길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제발 더는 인간이 행성의 주인을 내쫓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주십시오. 레시는 지구로 간다면 살지 못할 것입니다. - P122

 인간은 차츰차츰 잃었던 바다를 되찾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라밝혔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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