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했다. 그들이 내게 해준 말도 기억하려고 했다. 아무것에도 마음 붙이지 말고 그냥 어디로든 도망치라고. 그러다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땐 정말로죽는 거라고, 마지막으로 그 이름들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타티야나, 마오, 스테이시, 그리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다 잊어버릴 이름들이었다.
- P135

"나오미, 믿어지니? 나도 여기서는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어. 더스트 농도가 낮게 유지되는 것 같아. 게다가 살아 있는 작물들이 있어. 이 마을의 언덕 위에는 커다란 온실이 있는데, 거기에는… 그 사람들은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식물학자 한 명이 살아. 그는 마을로는 오지 않아, 그리고 더스트에 저항성을 가진 식물들을 연구하지."
- P150

지 알 수 있었다. 이 마을은 멸망한 세계에 남은 유일한 도피처였다. 끔찍한 대피소나 우리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연구소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사람들이 멀쩡히 살아가는, 돔 밖에 존재하는세계였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나에게 다시 현실감을 일깨워주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어떻게든 여기 남아서 살아가야 한다고,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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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옛날 과일들은 나 맛없는 거 아냐? 저번에 복원한 토마토도 좀 별로였잖아."
"21세기 사람들은 우리랑 입맛이 달랐나보죠. 그때 이런 걸좋은 과일로 쳤나봐요."
- P27

해월은 대표적인 폐허 도시 중 하나였다. 한때 한국의 최대 로봇 생산지였고, 분지 특성상 돔을 건설하기 수월해서 더스트 폴직후 가장 먼저 대피용 돔 시티로 지정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계들의 집단 오류로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한 이후에는 로봇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가, 재건 이후 몰려온 불법 발굴업자들에게 파헤쳐져 이제는 거대한 고철 쓰레기장이 되었다. 몇 년전부터는 복원 사업을 진행하는 건설업자들을 상대로 운영하는식당과 숙박업소들이 해월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띄엄띄엄 세워졌다.
- P47

 이제사람들에게 과학이란 더스트라는 재난 속에서 인류를 구한 위대한 기적이었고, 재건 이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도구였다. 그 외의 연구란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 가치가 없었다.
그럼에도 더스트생태학을 선택한 연구원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 분야에 대한 애정도 높았다. 하지만 왜 하필 이미 사라지고 없는 ‘더스트‘와 관련된 생태학을선택했느냐고 물으면 딱히 이렇다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 더 많을 터였다.
- P56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서서 남들을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 P63

게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결국은 더스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원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심오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 P64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밌지. 정적이면서 아주 역동적이야. 나는 이 정원에 손을 안 대는데도, 자신들만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루고 있지. 참 흥미로운 존재들이야."
- P71

"나도 어느 순간 깨달았지. 싫은 놈들이 망해버려야지, 세계가 다 망할 필요는 없다고, 그때부터 나는 오래 살아서, 절대 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그 대신 싫은 놈들이 망하는 꼴을 꼭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성공하셨나요?"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그놈들도 아직 잘 살고 있는 걸보면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덕분에 살아가며 다른 좋은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지. 전부 망해버렸다면 아마도 못 봤을것들이지."
- P77

아영은 그렇게 느리고 꾸물거리는 것들이 멀리 퍼져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천천히 잠식하지만 강력한 것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정원을다 뒤덮어버리는 식물처럼, 그런 생물들에는 무시무시한 힘과놀라운 생명력이, 기묘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영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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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자는 붙잡히게 되지만, 쫓는 자는 붙잡게 된다.
수정의 얼굴이 붉어진다. 수치와 깨달음이 뒤섞이고겁에 용기가 뒤섞인다.
-함께 저승으로 가거라. 힘을 합쳐 문 앞에서 저승의 신을 붙잡아, 각자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렴.
- P49

비어 있던 마지막 장에 초상화 하나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수정의 명부에는 이안의 초상이, 이안의 명부에는수정의 초상이 그려진다. 서로의 얼굴이다.
이안은 자신이 수정의 삶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 꿈에서 수정을 깨워 함께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정은 이안이 그런 것들을 깨닫는중이라는 사실을, 저 아이의 착각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졌다는 사실을 느꼈다. 수정은 이안의 눈에서 예전청소부의 눈에서 본 광기를 본다.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 P96

ㅡ내가 없어도 죽음은 있어. 이곳이 무너지고 죽은자들이 감옥을 벗어나면 나도 죽고 너도 죽고 저 애도죽는다고. 그 손을 놔!
이안의 죽음만은 바라지 않아서 수정은 머뭇거린다.
모두 다 죽어도 괜찮으니 이안이 살면 안 되는 걸까? 비슷한 생각을 이안도 한다. 기절한 채로도 한다. 살고 싶다. 살면 안 될까? 수정과 함께 앞으로도 살면 안 될까?
그러나 이안에게 있어 삶이란 꿈 너머에 있는 것이고꿈이란 수정과 손을 붙잡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 P105

"호정아, 다리가 아프면 구두를 벗어."
성인이 되고 맨 처음 클럽에 갔을 때 다리가 아프니 집에가자고 호소하는 나에게 친구는 대답했었다.
"다리가 아프면 집에 갈 생각 말고 구두를 벗어. 창피하면내 운동화 잠깐 신을래?"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쩐지 기운이 나서, 구두를 벗지도 않고 열심히 춤추며 첫차가 뜰 때까지 거기 있었다. 그리고 해장 - P130

국 집으로 향하는 어슴푸레한 도로에서 비로소 구두를 벗고 맨발로 걸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발바닥이 차갑고 축축한 밤이면 그래서 웃음이 나는가 보다. 옆에 있어 준 친구들, 같이 춤춰 준 친구들, 신발과 길을빌려준 친구들 고맙습니다.
2021년 봄 호정 - P131

디테일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공통의 요소들을 추려내고 해석을 가미해 볼 수 있다. 우선 주인공은 천편일률적으로 미성년남성이다. 이처럼 남자아이의 목숨 늘이기가 서사의 주축이 되는 까닭은 무병장수의 보편적인 소망을 반영하기를 넘어서 가부장제라는 특정 사회 체제에서 대 잇기가 중시되기 때문이다.
대를 잇기 위해, 가문을 지속시키기 위해, 특히나 집안의 외아들이라면 미성년기를 무탈히 넘기고 생존해야 한다. 반면, 당 - P137

시 여자아이들은 얼마나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혹은 어떻게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는지는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의 연명담을 거의 알지 못한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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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딱히 살고 싶다기보다는,
ㅡ네.
ㅡ죽고 싶지가 않아서요.
ㅡ네.
ㅡ싫다거나 무섭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좀 억울하다.
고 해야 할까, 이해를 못 했다고 해야 할까.
ㅡ이해를 못 했다구요?
ㅡ네.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그렇잖아요. 열아홉살은 죽을 나이가 아니잖아요. 아니 내가 늙은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죽어야 하는지….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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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수정은 이 장면을 수없이 떠올리며 누구와 나눌수 있는 순간 가운데 가장 소중한 순간이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서로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 채마주보는 첫 순간, 아직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은 순간, 각자의 마음속 상처에 관하여 서로가 완전히 무죄인유일한 순간.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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