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은 안 나요? 일단 내과에 가야 할 텐데 요즘은 열나면 진료도 안 해줘요."
"안 나. 오늘도 새벽 예배 올리고 왔어. 그러니까 괜찮아, 주님이 지켜주신다."
그 상태로 교회까지? 쇠귀에 대고 경을 읽어도 이것보단 답답하지 않을 것 같았다. - P200

 실로 오랜만의 스킨십이었다. 한영에게 안긴 채 삶이 이렇게만 흐른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확진자 수가 점점 줄어 제로가 되고 종국에 지긋지긋한 전염병이 끝나면 좋겠다. 이 모든 일들이 꿈결처럼 흘러가버리고 우리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늙어가다 정말로 영감님이 되어, 그렇게 함께 늙어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  - P213

믿음과 거짓, 희망과 배신, 미래의 단절.
정신차리자. 행복을 꿈꾸기에 나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다.
아무것도 믿지 말고, 그 무엇도 기약하지 말자. 그게 내 유일한 생존 방식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 P213

"기도는 아무리 넘쳐도 모자람이 없고, 결코 너를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별 대답이 없자 어머니는 악다구니를 썼다. 네가 그 험한곳에서 장사하는 꼴이나 보려고 이 고생을 하며 널 공부시킨 줄아느냐고, 그냥 공부도 아니고 돈 잡아먹는 사진 공부를 시키느라창자가 끊어질 것 같았는데 왜 멀쩡한 일을 그만둔 거냐고 - P217

"너는 주님의 자식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때도 주님이 지켜주시지 않았니. 믿음이 있으면 환란에 시달리지 않는다."
어머니는 ‘이태원발 확진 사태‘ 당시 추이를 보며 하루종일 통성기도를 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이태원 때보다두 배는 더 많은 확진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주님의 자식이 아닐까? - P216

 어머니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정말 내가 술을 파는 대신 땅을 파먹고 살면 그때는 만족을 할까. 어머니는 무엇을 위해 손수 바느질한 면 마스크를 쓰고 매일 기도를 하는 것이며, 또 무엇을 위해 울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가 진정 슬퍼하는 것은 내 삶일까 아니면 이미 지나가버린 당신의 삶일까. - P218

전국 각지의 다양한 장소에서 새로운 전파자들이 계속 등장했다. 사람들은 매번 그들을 도려내고 나면 세상이 예전으로 돌아갈것처럼 굴었으나, 전파는 전파를 낳고 최초는 무의미해졌으며 병은 계속 변하고 또 계속 번져나가면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P218

우리의 시작이 한 남자의 거짓된 삶과 그 삶보다 더욱 거짓 같은 죽음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관계란 참 농담 같은 것이기도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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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의 크고 작은 거짓말은 사춘기 이후 계속된 일종의 병이라고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Y의 삶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완전히 달랐다. Y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며, 수원의 전문대 레크리에이션과에 들어갔다 한 학기 만에 중퇴했다. 그뒤로 집을 나가가족과 왕래가 끊긴 지 몇 년이 됐다고 했다. 영장을 받고 급작스레 입대해 훈련소에서 죽어버린 것 같다고 말하는 누나의 표정은슬프다기보다는 몹시 피로해 보였다.  - P185

 평온한 미래를 내내 그려왔다는 사실도 좀체 미래를생각하지 않는 내가 오롯이 현재를 살아왔던 내가 나도 모르는
새 감히 ‘영원‘이라는 꿈을 품어왔다니. 그런 내가 너무 불경하고한심해 또 웃음이 나왔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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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게 또다시 리나 이모의 잔상을 떠올렸다. 한영을 대하는 태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묻지 않고, 설사 뭔가를 알게 됐더라도 그저 가만히 들어주는 자세,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두는 자세가 꼭 닮아 있었다. - P131

이모는 잠시 놀란 눈을 하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특유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한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로소숨이 쉬어지기 시작했다. 한영은 그제야 자신이 며칠 동안 숨도못 쉴 만큼 지독한 압박감에 시달려왔음을 깨달았다.
- P147

심지어는 한영에게조차. 한영은 리나 이모의 침묵이 어쩌면 한없는 이해와 관용에 가까운것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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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나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지금으로부터 보름이후의 삶에 대해. 그 길고 막막한 시간 앞에서 소원을 빌어보려고 해봤지만 그럴수없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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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좋은 사람은커녕 심지어 연애와 관련된 그 어떤 소원도 빌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미래를 기약하기 힘든 게이라는 특수성을지니고 있다고 한들 삼십대 중반이 되도록 단 한 번도 그런 소망을풀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조금 기이한 일이기는 했다.  - P71

"한영아, 도대체 내 문제가 뭘까 나 그렇게 별로냐?"
"아니, 멀쩡하지. 얼굴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고, 키도 작지 않고, 지 앞가림도 잘하고. 근데 너는 결정적으로 용기가 없어."
"무슨 용기."
"상대한테 투신하는 용기, 연애가 별거니? 그냥 눈 꽉 감고몸 던져버리는 거야. 근데 넌 겁이 너무 많아, 발가락 하나 걸치질못하는데 누구랑 연애를 하냐." - P72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성격이 곧 운명이라고. 취향? 애인이 뭐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이냐.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줄 배경을 만들려는 노력, 좋은 사람과 지속 가능하고행복한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 그런 게 다 성격에 포함돼 있는거야. 그 성격 덕분에 네 연애사는 이 지경인 거고 인정하지?" - P74

나는 악다구니를 썼다. 남준 역시 조금 더 격앙된 어조로 연애라는 게 원래 그런 것 아니냐며, 서로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편안하고 즐겁고, 하루해가 모자란 게 사랑 아니냐고 했다. 나는 네 얼굴이 넷플릭스라도 되냐고 어떻게 천년만년 계속 들여다볼 수 있겠냐고, 지겨워 미칠 것 같다고 소리질렀다.  - P87

그런 일상의 소소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남준과 함께 그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비로소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모두 맞춰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적 욕망이나 사랑이라고 단순화되곤 하는 그런 감정을 초월한, 어떤 안정감 같은 것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 P97

부장이 걱정하는 게 나와 한영의 건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있었다. 우리 회사가 확진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병에 걸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왔다. 병은 언제 어디에나 있는 것 아닌가. 병은 병일 뿐인데, 어떤병은 흉이며 죄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인생 전체를 통째로 뒤흔들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죄. 뭐 그런 생각을 하는데 부장이 마침표를 찍듯 말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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