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묻는다. 철필과 양피지를 준비해야 할까요? 나는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나는 평생 양피지를 벗하였지만 글은 독소처럼 나의 눈을 멀게 했다. 소년에게 읽고 쓰는 법을 깨우치게 한 것이다행이다. 나의 목소리는 떨리지만 소년의 글은 매끄러울 테니까. 소년에게 수사학과 논리학을 가르친 건 더한 행운이다. 나의 기억은 혼돈스럽지만 소년의 글은 단정할 테니까. - P15
그러나 누가 무슨 자격으로 타인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단말인가? 죄를 고백하고 참회한다고 이미 저지른 범죄행위가 사라지는 것일까? 희생자의 분노와 고통은 여전한데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속죄양 한 마리로 죄를사할 수 있다면 누가 거리낌 없이 죄를 짓지 않겠는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용서는 부당했다. 부당할 뿐 아니라받아들일 수 없었다. - P60
성전에는 아버지의집에 없던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집에 없던 빵이, 양과 비둘기 고기가 있었고 약간의 동전을 모을 수도 있었다.그는 성전에 충만한 여호와의 축복을 맘껏 즐겼다. - P69
그의 막무가내식 투쟁은 악착같은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관중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부여했다. 그들은 엄격한 검투장의 규칙을 보란 듯이 무시하면서도 결국 살아남는 무뢰한에게 열광했다. - P71
그는어떻게 해서라도 남은 복무 기간을 채우고 로마로 가고 싶었다. 더 풍족한 삶이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삶, 더 안락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들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 P73
소년이 말한다. 이곳은 지옥 같아요.그래, 이 도시는 지옥이야. 하지만 천국을 꿈꾸는 지옥이지. - P14
상시적인 고용 불안, 규범과 불화하는 섹슈얼리티, 박탈당한 생식권, 날로 심화되는 정보 편향, 사이비종교와 내셔널리즘의 번성, 공격적인 대인관계와 앙상한 친밀성의 세계, 소수자 혐오로귀결되는 각자도생의 논리, 어느새 반려 질병이 된 공황장애와 우울증까지, 이 작품은 현재를 저당하여 끊임없이 미래를 재생산하는 정언들의 막다른 길목을 비추며 우리를 지금 이곳으로 이끈 이사회의 ‘믿음의 각본‘이 수정되어야 함을 뜨겁게 증명하고 있다. - P264
한반도의 최남단에서 이곳까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올라왔을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자 한숨이 나왔다. 어머니의인생을 생각하면 언제나 애잔함과 혐오가 섞인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어머니가 처음부터 저렇게 광신적인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 P240
순간 나는 영원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또다시 믿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언제고 깨어지고 흩어져버릴유릿조각 같은 믿음에 대해서. 한영과 황팀장은 강아지처럼 신나하며 웃고 있었고, 나는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댔다. 뺨으로 물 한줄기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눈이 짰다. - P248
빙긋 웃는 남준과 내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키스를 했다. 짧지만 뜨거운 순간이었다. 어쩌면 내 인생 전부를 뒤흔들 만큼, 우리의 삶에 남준과 나, 찬호와 한영의 삶에아주 작은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안간힘으로 일궈놓았던 삶이 손톱만한 균열로 말미암아 언젠가 모조리 무너져내리고 말 거라는 사실을 나는 직감했다. - P257
나는 희망에 취약한 사람이라, 아직도 연약한 믿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절망에 허덕이는 와중에도기어이 책상 앞에 앉아 이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일상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이야기가 가닿기를 바란다. - P290
세상 사람들 모두가 누군가의 탓을 하는 시대에 나는 누구를, 무엇을 원망해야 할지 몰랐다. 하루에 십수 명이 확진될 땐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야단하며 확진자 동선을 낱낱이 공개하고술집 영업을 제한하더니 이제는 하루에 몇십만 명이 걸려도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는 정부를? 이태원 상권이 싸그리 몰락한 이 판국에도 단 한 푼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임대료를 받아 챙기는건물주를? 아니면 딱 요맘때 이태원을 헤집었던 기남시 55번 환자를 최초로 한국에 이 병을 들여온 사람을? 아니면 어머니가 그토록 믿는 신을 탓해야 하나? 아무것도 믿지 않는 나는 도통 무엇을 탓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나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로, 이 모든 것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나 자신을 비난하기로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