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어슴푸레 드러난 원산 풍경은 북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같았다. 시간이 멈춘 듯, 낡아 빠진 듯, 소박한 듯, 과격한 듯, 메일에 싸인 듯, 시치미를 떼는 듯 미처 무언가를 다 감추지 못한 모습이었다. - P60
고등학생 시절부터 방북을 마치고 출국하기 전 세관검사에서편지나 필름을 빼앗겨 성을 내다 제 무덤을 파는 사람을 여럿 봐왔다. 그들이 저질렀던 실수는 무엇일까. 당국이 몰수하려는 것은 어떤 기록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내가 일본에돌아간 후에도 이 나라에서 계속 살아야 할 가족과 친척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 P63
"위대한 지도자님 아래, 조선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당한 사회주의의 길을 걷고 있으며 우리 인민에게는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라는 버스 가이드의 진부한 멘트에도 "비록 지금은 ‘고난의 행군‘을 견뎌야 할 시기지만"이라는 둥 이전까지는 들어본 적없던 본심이 섞여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사람들의 표정과 겹치는 교조적인 말에 더욱 마음이 쓰렸다. - P65
원산에서 고속도로를 지나 이 자리로 옮겨진 모두가 고개를 숙일때, 나 혼자 멍하니 동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내뒷머리에 손을 얹고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몇 초 후 다시 머리를 들 때까지 그 손은 계속 내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부동자세에서 풀려난 후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머리를 누르다니, 부모도 한 적이 없는 짓이었다. 형용하기 어려울정도로 소름 끼치는 굴욕감을 맛보았다. - P66
아버지는 북송 사업의 선봉대 역할을 자처했다. 북을 지지하는 조총련과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동포 사회에서 격렬한 사상투쟁을 벌인 활동가였다. 자신이 가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미화해서 타인에게 이주를 추천하는 무모함을 혁명적 임무라고 믿고 수행했던 것이다. 자기 자식들 손에까지 편도 표를 들려서 북한에 보낸 몇 년 후, 그 나라에 방문해서야 누구보다 북송 사업의 실태를 잘 알게 된 사람이었다. - P71
후회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뿐더러 용서받을 수없다는 자각도 있었을 터이다. 세 아들과 가족들이 ‘인질‘이 되고야 말았으니 그 체제에 순응하며 살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훈장을달고 활짝 웃는 부모님의 얼굴이 피에로 같다고 생각하며 나도 웃었다. - P72
"아버지, 우리 셋 대신에 영희 하나 정도는 자유롭게 해주세요. 영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잖아요." 전화 오빠의 말에 아버지는 조용해졌다. 아버지와 머리를 맞대듯 수화기에 귀를 대고 있던 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 P73
어째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살아본 적도 없는 나라의 영향을이토록 직접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일까. 나에게 북한이란 도대체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 P76
‘난민 여권‘이라 불리는 재입국 허가증만 들고 잘 알지도 못하는 미국에 온 것부터가 무모했다. 만약 전쟁이라도 나면 정식 여권(국적)이 없는 나는 의지할 대사관도 없는 것이었다. 일본 특별영주권자라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지켜줄 수 있을까. 아나키스트처럼 살기를 바라 마지않았지만, 그때만큼은 몹시도 불안해서 위조 여권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고심할 정도였다. 평양행이 무산될까 마음의 기둥이 부서져 내리는 심정으로 TV와 라디오에서 계속흘러나오는 뉴스에 귀 기울였다. - P77
"안녕, 영희,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 파일이 학생비자 신청을위해 대사관에 제출할 서류예요. 불안하겠지만 정신 바짝 차려요. 당신은 우리 대학원의 정식 학생이고, 어떠한 정치적 상황에서도학생의 배울 권리를 지키는 것이 대학의 의무입니다. 만약 미국에오기 위한 비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우리가 직접 주일 미국대사관에 요청할 거예요. 이 건에 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우리에게 맡겨요. 가족을 만나러 간다면서요. 여행 잘해요!" - P80
평양에서 촬영한다는 어려움과 자기 가족을 찍는다는 어려움사이에서 고민도 많겠지만 너무 무리하지 마. 후회도 하지 말고 찍을 수 있는 만큼 찍어둬. 영화로 만들지 말지는 나중에생각하면 되니까. 영희에게도 가족에게도 틀림없이 귀중한 기록이 될 거야. 영화가 아니라 소설이나 에세이면 또 어때. 귀중한 자료를 만들어두는 거야. 뉴욕에 돌아오면 또 이야기하자. - P81
우선 찍자,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 그 말이 나를 구원했다. 이미 시작된 가족 다큐멘터리 프로젝트가 행여나 가족을 상처 입히지 않을까 꿈속에서조차 고민하던 시기였다. 나는 은사가 등을 떠밀어준 덕분에 미국대사관에 제출할 편지와 캠코더를 들고 뉴욕에서 오사카로 날아갔다. - P81
잠옷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의 캐릭터에 빠졌던 관객들이 확 깨는 장면이다. 딸인 나조차 귀를 막고 싶어지니 무리도아니다. ‘오오, 그렇군, 역시 사고방식이 다르네. 이 사람들과 서로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어‘ 낙담하게 되는 연설. - P84
얼핏 보면 남들의 부러움을 살 법한 훌륭한 잔치 같았지만, 어딘가 코미디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높다란 천장 아래으리으리한 연회장에 들어찬 커다랗고 둥근 테이블, 그 위에 수북이 담긴 소박한 조선 요리와 술, 오빠들 부부와 조카들은 어머니가일본에서 보낸 정장과 민족의상을 입고 있었다. - P86
아버지가 "나에게는 아들, 딸, 손자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뒤 "이 젊은이들을 혁명가로!"라고 외쳤을 때, 나는 무심코 조카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설마, 말도 안 돼‘라는 제스처를 조카들에게 해 보이자 모두가 나를 가리키면서 웃음을 참았다. 조카들이 보기에도 나는 ‘자유분방한 문제아‘겠거니 생각하자 옷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캠코더가 흔들리지 않도록 팔에 힘을 주었다 - P87
가족에게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원거리에서 응시하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었다. 살아온 날들을 해부하여 내 백그라운드의 정체를 넓고도 깊게 알고 싶었다. 그런 다음 가족과 나를 분리하고 싶었다. - P87
드문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어른‘들이 그렇게 본심과 명분 사이를 오가지 않을까. 본심 속에도 명분이 있고 명분도 본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다면체라 여러 측면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비범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평범해 보여도 인간이란 그러한 생명체인 것이다. 훈장을 단 아버지를보면 잠옷 차림의 아버지가 떠오르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혁명을 외치는 아버지도 평범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88
화가 났다.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졌다는 그의 ‘죄‘는 다른 나라였다면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몇 년 동안 감옥에가둬놓고 이제 와 ‘무죄‘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는 수용소에서 다리를 다쳤다고 했지만 나는 고문이 아닐까 의심했다.
불합리한 일은 어느 나라에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중한 가족이 살고 있는 나라의 불합리성에는 특히나 민감하게 반응하기마련이다. 원래 그런 나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예외로 두는 건 불공정한 것 아닌가. ‘김씨 왕조‘라고 불리는 나라에서 공정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 P90
"세 명 전부 보내서 후회해?" 갑자기 물어보자 침묵이 흘렀다. 될 대로 되라지 생각한 순간,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미 가버린 건 별수 없다 싶지만, 그 가서……가지 않았으면 더 좋았으려나 그렇게는 생각하지." 내 귀를 의심하면서 신중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타임캡슐을 타고 북송 사업이 활발했던 무렵으로 돌아가서 목차를 훑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 아버지 연세가? 아들들을 보냈을 때. 아버지는 몇 살이 "몇 살이었으려나……" "지금부터 32, 33년 전이면 아버지가 43, 44세?" "당시 전망이라는 게, 재일조선인 운동이 제일 앙양하던 시기이기도 하고, 문제가 다 잘풀리는 쪽으로 보았으니까, 안일했지......" - P92
아버지는 <디어 평양>의 클라이맥스에서 내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도록 허락하면서 한국에 시집가도 되니까 그저 상대만 찾으라고 말한다. 자신은 생애 마지막까지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하겠지만, 딸은 별개이니 자유롭게 살라고 한다. 실은 오빠들의 ‘귀국‘에 대해 후회하는 장면부터 나의 국적 변경을 허락하는 장면까지 모두 같은 날 찍은 영상이다. 그다음 날, 나 - P93
나는 조직의 태도는 모른 체하고, 가족과 친척을 지원하는 데필사적인 부모님에게 오랫동안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만은 나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아들과 손주들이 인질처럼 잡혀 있는 부모님이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다고. 아이를 낳아본 적 없는나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세운 책망의 가시에 자꾸만 스스로 찔렸다. - P94
"사람이 할 말이 있으면 감독인 나한테 해야지 모르는 사람한테서 협박 전화 같은 거 오니까 기분 나쁘겠다. 미안해요." "모르는 사람도 아냐, 오래 알고 지냈으니 목소리만 들으면금방 알지. 너한테 이상한 전화가 안 오면 됐어. 가족 기록을 영화로 만들어줘서 고마워." 언제나 당당한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 P95
"설마 그럴 리 없어. 아직은 보낼 수 없어. 다시 한번 손주를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아직 영화도 완성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주인공인데, 아버지가 처음으로 봐야 하는데." 조수석에 앉은 나는 중얼중얼거리다가 소리 내어 울었다. - P97
"아버지, 힘내자!"라는 내 말에 아버지도 "힘내자!"라고 화답했다. "힘내서 병을 고쳐 집에 가야지. 손주 보러 평양에 가야지" 그렇게 애버지를 격려했다. 집에 가자, 가족이 있는 평양에 가자. 그 말이 우리의 암호가 되었다. - P100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입힐 옷을 들고 병실에 도착했다. 간호사들도 들어왔다. 아버지의 숨은 더욱 거칠어져갔다. 상반신을 공중으로 밀어 올리듯 들숨을 쉬고, 떠오른 머리와 등을 침대에 격렬하게 떨어뜨리며 날숨을 뱉었다. 아버지는 이를 여러 번 반복하다천천히 단계를 거치듯이 숨을 거두었다. 인간은 이렇게 죽어가는것이라고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계속 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이 차가워졌다. 얼굴도 목덜미도 차가워졌다. 차가워도 괜찮으니까 관에 들어가지 말고 영원히 이대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103
대가족에 둘러싸인 선화가 웃었고, 선화가 웃으면모두가 웃었다. 연출되고 강요된 미소가 아닌, 가족의 일상적인 표정이 거기 있었다. 그때 나는 이 미소를 찍기 위해 평양까지 온것임을 확신했다. 더 이상 검열도 두렵지 않았다. - P112
정순 씨는 무척 소박한 사람이었다. 결혼 선물로 어머니가 일본에서보낸 속옷을 아깝다며 한 번도 입지 않고 상자에 고이 넣어 서랍에보관해두었다고 했다. 예쁜 레이스가 달린 속옷을 몇 번이고 꺼내서 물끄러미 보았다고 했다. - P117
사회주의를 몸에 두르고, 추위를 견디기 위해 그 위에 자본주의를 덮은 모습이 선화를 둘러싼 환경을 보여주는 듯했다. - P118
우습게도 재혼 생각이 없다는 오빠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서 인기는 더욱높아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생활비와 애정이 가득 담긴 소포가 온다는 사실이었다. - P121
아버지는 열다섯 때 제주도에서 헤어진 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 할머니를, 세 오빠들은 오사카에 살면서 물자 공급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를, 올케언니들은 친정어머니를, 선화의 이복형제인 지성과 지홍은 자신을 두고 떠나간 친모와 그 이후 자신들을 키워준 정순 씨를, 선화도 다섯 살 때 사망한 친모 정순 씨를. 이 얼마나 보편적인 노래인가.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면 좋겠다. - P125
예전부터 만들 생각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 방북 직전에 <디어 평양>을 완성했기 때문에 출연자인 오빠들에게 알려야 했다. 이미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이 정해진 상태였다영화제와 영화에 대해 뜨겁게 논하는 여동생을 보면서 오빠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돼. 우리 걱정은 하지 마"라고 말해주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빠에 대한 고마움과 죄책감과 불합리에 대한 분노, 그리고 새로운 결의가 마음속에 뒤섞였다. "내 동생이 영화감독으로서 한국에 가는 셈이네. 힘내."오빠는 덧붙였다. - P131
고작 연극에 관한 대화일 뿐인데 녹화를 하면문제의 소지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춘기 소녀가 아렇게까지 위축되어 살아가야 하는 감시 체제란 대체 무엇인가. - P133
‘아버지 용태가 호전되면 평양에서 요양하는 것이 어떨까요? 조선에도 좋은 온천이 있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서 병을 이겨냅시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편지 내용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이시점에도 송금을 해달라고 간청하는 친척의 편지를 받았을 때는공포심마저 느꼈다. 어머니에게 말만 하면 무엇이든 보내주는 관계가 이미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에 절망스럽기도 했다. - P138
하지만 아버지를 완벽하게 간호하려는 어머니를 보조하면서 내 삶은 이미 파탄 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여력이 없었다. 언제쯤이면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가족에게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또다시 죄책감에 시달렸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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