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예외없이 종말을 맞이하고 육신은 물론 지나온 시간 전부가 무로 돌아간다. 광대무변한 암흑 속으로 떠난 망자에게문상객으로서 작별인사를 했으면 충분하지 더 이상의 배려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가짐도 가쓰라기에게 배운 것이다. - P162

바람 한 점 없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만큼 무더운 여름날 해 질 녘이었다. 잘 익은 토마토의 과즙 같은 놀이 서서히잉크블루의 연한 어둠으로 변하고 있었다. - P202

언니네 작은 정원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샤미센 소리,
흘러나와 정원을 노랗게 비추던 불빛 등을 떠올리며 나는 병으로급사했다는 여자의 짧은 생애를 생각했다. - P213

그렇게 나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음매 같은것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 이음매에는 언제나 그 여자가 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많은 일들을 떠올려 봐도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고아무런 설명도 들은 적 없지만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오싹해지곤 한다. 동시에 한없이 그립고 감미롭기까지 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젊은 날의 아득한 성경이 거기 있다. 내가죽어 재가 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타오르는 듯한불길한 저녁놀이 비치는 창문에 이번에는 내 모습이 비쳐지게 될 - P233

무섭지만 따스한 한편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이국의 자살한 영혼이 집을 떠도는 ‘조피의 장갑‘, 모르는 사이에 이계로 파고드는 ‘히카게 치과 의원, 이웃집 창문에 죽은 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붉은 창‘은 반전 대신 비틀림이 있는 정교한 이야기이다. 되풀이하지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에 대해 쓸 때는 고이케 마리코를 당할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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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숲 냄새가 납니다. 달고 찬 민트 같은 냄새입니다.
- P41

맹세코 말하지만 공포심은 정말 요만큼도 없었습니다. 왜 무서워해야 합니까. 무섭기는커녕 나는 미사키가 그립습니다. 쓰치야씨가 그립습니다. 너무 그리워 미칠 것 같습니다. - P57

"갓짱, 그 아이에게 인형을 사준 사람은, 그 아이를 낳은 부모가 아니야. 그 아이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해당하는 사람이 사준 거야. 히카게 원장과 그 누이동생의 아버지 어머니 되는사람, 손녀가 불쌍했던 거야. 그래서 이치마쓰 인형을 사주었고,
그 아이는 한시도 품에서 떼지 않고 소중하게 안고 있었어."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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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이란, 이판과 사판이 합쳐진 말로 불교용어. 조선이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탄압하자 계급의 사다리 아래로 추락한 승려들은 살 길을 도모해야했다. 이때 잡역에라도 종사하며 사찰을 유지하고 불법의 맥을 잇던 사판승과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참선을 통한 수행으로 불법을 잇던 이판승으로 각각 나뉘었다. 조선이라는 파고를 통과하여 지금의 불교가 있기까지는, 불법의 맥을 잇기위해 자신들의 소임을 다한 사판승과 이판승의 역할이 컸다.
한데 오늘날 ‘이판사판‘은 조선시대에 계급의 최하층인 승려가 된다는 것은 막장이나다름없었기 때문에 ‘끝장‘을 의미하는 말로 전이되었다. 이판사판 시리즈는 지금껏북스피어가 만들어 온 장르문학의 맥을 이어 나갈 도서들로서 어차피 이렇게 이름지어도 기억하지 못할 테고 저렇게 이름 지어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이판사판시리즈‘라는 이름은 안 잊어버리겠지. 라는 의미를 담아 만들었다. 이 시리즈로 딱10권만 만들고 끝장을 볼 생각이다.

구니히코가 퇴근길에 종종 들르는 주점에 모처럼 마음이 잘 맞고 외모도 딱 취향인 종업원이 들어와 그만 깊은 사이가 되었다.
상대는 그때 겨우 스물둘이었다. 그녀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 같다‘며 응석을 부렸고 곧 그보다 더 적극적이 되었다.
그쯤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마침내 그녀는 상대가 유부남이라며 한탄하기 시작했다. 구니히코가 아내나 딸 이야기를 할때마다 ‘우리는 만나서는 안 되었던 거네‘라며 눈물을 지었다.
그런 그녀가 귀엽다가도 조만간 헤어질 때는 몹시 귀찮아지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관계를 끊지 않고 질질 끈 까닭은역시 나름의 매력이 있는 여자여서 놓치기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미나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그녀와 시부야의 싸구려 호텔 객실에 있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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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가르침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한다. 달(깨달음)은 핵심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우리를 핵심으로 이끌려 하지만, 손가락과 달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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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죠? 당황스럽네. 줄거리가 꼭 미래를 예언하는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무슨 미래를 예언해?"
외삼촌이 물었다.
"올 여름방학에 우리도 동반자살을 할 계획이거든요."
나와 외삼촌은 동시에 지민을 쳐다봤다. - P17

마찬가지로 언어는 현실에서 비롯되지만 현실이 아니며, 결국에는 현실을 가린다.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불안이 시작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으리라. 행복해서 행복하다고 말했는데 왜 불안해지는가? ‘행복‘이라는 말이 실제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신한 언어에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뜻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의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 말로는 골백번을 더 깨달았어도 우리 인생이이다지도 괴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 P19

그날 지민이 외삼촌 앞에서 동반자살 이야기를 꺼낼 줄은 전혀몰랐다. 대담하면서도 염세적인, 그런 모순적 태도에 많이 끌리긴했어도 그 말을 들은 뒤에도 외삼촌은 티스푼으로 커피만 저었다. - P24

보이지 않는 그 눈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지를 결정하지요. 그러니까 다 본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눈의 한계를 보고 있는 셈이에요. 책을 편집하다보면 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의 모든 문장은 저자의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의 안쪽에서만 나오죠. 그래서모든 책은 저자 자신이에요. 그러니 책 속의 문장이 바뀌려면 저자가 달라져야만 해요."
"그렇다면 제가 달라져야 이런 풍경이 바뀐다는 뜻인가요?"
"그게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행동을 한번 해보세요. 평소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해도 좋구요. 서핑을 배우거나봉사활동을 한다거나 그게 아니라 결심만 해도 좋아요. 아무런이유 없이 오늘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거나,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 P27

안타까운 건 이런 멋진 소설을 쓰고서도 지민씨의 엄마가 이십 년 뒤의 지민씨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에요. 가장 괴로운 순간에 대학생이 된 딸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선택은 달라졌을 겁니다.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지금 미래를 기억해, 엄마를 불행에 빠뜨린 아버지와 그 가족들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 P30

"그렇게 방에 들어가서 줄리아에게 하는질문들을 들어보니 정말 다들 실패한 인생들뿐이었지. 그런데 그거 기억나? 줄리아를 통해 들어온 신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말한 것."
"뭐라고 했는데?"
"신은 그냥 붙인 이름일 뿐,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몸이 없는 집단적 의식으로, 미래에서 왔습니다."
"그래, 맞다. 그랬다. 신이 아니라 미래의 통합된 마음이라고부르는 게 더 낫다고 했지." - P33

"그러게.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평범한 말이더라.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우리는 죽지 않고 결혼해 지금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잖아. 줄리아는 그냥 이 사실을말한 거야. 다만 이십 년 빨리 말했을 뿐. 그 시차가 평범한 말을신의 말처럼 들리게 한 거야. 소설에 미래를 기억하라고 쓴 엄마는 왜 죽었을까? 그게 늘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엄마도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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