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죠? 당황스럽네. 줄거리가 꼭 미래를 예언하는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무슨 미래를 예언해?" 외삼촌이 물었다. "올 여름방학에 우리도 동반자살을 할 계획이거든요." 나와 외삼촌은 동시에 지민을 쳐다봤다. - P17
마찬가지로 언어는 현실에서 비롯되지만 현실이 아니며, 결국에는 현실을 가린다.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불안이 시작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으리라. 행복해서 행복하다고 말했는데 왜 불안해지는가? ‘행복‘이라는 말이 실제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신한 언어에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뜻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의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 말로는 골백번을 더 깨달았어도 우리 인생이이다지도 괴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 P19
그날 지민이 외삼촌 앞에서 동반자살 이야기를 꺼낼 줄은 전혀몰랐다. 대담하면서도 염세적인, 그런 모순적 태도에 많이 끌리긴했어도 그 말을 들은 뒤에도 외삼촌은 티스푼으로 커피만 저었다. - P24
보이지 않는 그 눈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지를 결정하지요. 그러니까 다 본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눈의 한계를 보고 있는 셈이에요. 책을 편집하다보면 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의 모든 문장은 저자의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의 안쪽에서만 나오죠. 그래서모든 책은 저자 자신이에요. 그러니 책 속의 문장이 바뀌려면 저자가 달라져야만 해요." "그렇다면 제가 달라져야 이런 풍경이 바뀐다는 뜻인가요?" "그게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행동을 한번 해보세요. 평소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해도 좋구요. 서핑을 배우거나봉사활동을 한다거나 그게 아니라 결심만 해도 좋아요. 아무런이유 없이 오늘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거나,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 P27
안타까운 건 이런 멋진 소설을 쓰고서도 지민씨의 엄마가 이십 년 뒤의 지민씨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에요. 가장 괴로운 순간에 대학생이 된 딸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선택은 달라졌을 겁니다.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지금 미래를 기억해, 엄마를 불행에 빠뜨린 아버지와 그 가족들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 P30
"그렇게 방에 들어가서 줄리아에게 하는질문들을 들어보니 정말 다들 실패한 인생들뿐이었지. 그런데 그거 기억나? 줄리아를 통해 들어온 신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말한 것." "뭐라고 했는데?" "신은 그냥 붙인 이름일 뿐,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몸이 없는 집단적 의식으로, 미래에서 왔습니다." "그래, 맞다. 그랬다. 신이 아니라 미래의 통합된 마음이라고부르는 게 더 낫다고 했지." - P33
"그러게.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평범한 말이더라.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우리는 죽지 않고 결혼해 지금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잖아. 줄리아는 그냥 이 사실을말한 거야. 다만 이십 년 빨리 말했을 뿐. 그 시차가 평범한 말을신의 말처럼 들리게 한 거야. 소설에 미래를 기억하라고 쓴 엄마는 왜 죽었을까? 그게 늘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엄마도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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