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민주당원들 대다수는 독일의 다른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기성권위에 머리를 숙이는 습관이 몸에 밴 선량한 노동조합주의자였던 터라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근대 독일에서 시종일관 지배적세력이었던 군부에 권위를 양도하기 시작했다. 비록 전장에서 패하긴 했지만 군은 여전히 국내에서 조직을 유지하고 혁명을 물리칠 태세였다.
이 목적을 위해 군은 신속하고 대담하게 움직였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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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특이한 부적응자들이 한데 모여 국가사회주의를 창시하고 부지불식간에 하나의 운동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운동은 향후 13년 사이에 독일 전역을 휘어잡고 유럽 최강 세력이 되어 독일을 제3제국으로이끌 터였다. 정신이 혼란스러운 자물쇠 수리공 드렉슬러가 씨앗을 뿌렸고, 주정뱅이 시인 에카르트가 ‘정신적‘ 토대의 일부를 다졌으며, 괴짜경제학자 페더가 이데올로기로 통하는 것을 내놓았고, 동성애자 룀이 군부와 퇴역군인의 지지를 얻어냈다. - P80

그리하여 그의 특이한 천재성의 조짐이 비로소 드러나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이념 - 그가 대중의 뇌리에 끊임없이 주입할 수 있었던 단순한 몇몇 이념-만이 아니었다.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상징, 대중을 자극할 수 있는 구경거리와 색채, 그리고 성공할 경우 지지자를 끌어모으고(독일인 대다수가 강자에게 이끌리지 않았던가?) 약자에 대한 권력의식을 갖게 해줄 폭력과 테러 행위역시 필요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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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차 유대인을 증오하게 되었다. ・・・ 그 무렵은 내게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정신적 격동기였다. 나는 유약한 세계시민주의자를 그만두고 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62그 후로 히틀러는 생을 마칠 때까지 줄곧 맹목적이고 광적인 반유대주의자였다. 죽기 몇 시간 전에 쓴 유서에도 그 자신이 개시했고 이제 그와 제3제국을 끝장낼 전쟁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는 최후의 악담이담겼다. 제3제국에서 수많은 독일인을 감염시킨 이 불타는 증오심은 결국 너무도 끔찍하고 너무도 광범한 대학살로 이어져, 지구상에서 인간이살아가는 한 지워지지 않을 흉한 상처를 문명에 남겼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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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30일에 탄생한 제3제국은 히틀러의 호언장담에 따르면천년을 이어갈 것이었으며 나치 용어로 흔히 ‘천년제국‘이라 불렸다. 제3제국은 12년하고도 4개월을 버텼지만, 그 짧은 기간에 일찍이 지구상에서 벌어진 그 어떤 분란보다도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분란을 일으켰고,
독일 국민을 그들이 천년 넘게 알지 못했던 권력의 정점에까지 끌어올려서로는 대서양부터 동으로 볼가 강까지, 북으로는 노스케이프부터 남으로 지중해까지 펼쳐진 유럽의 지배자로 만든 다음, 전쟁 막바지에는 파괴와 황폐의 심연으로 추락시켰다. 제3제국은 냉혹하게 전쟁을 유발한뒤 전시에 피정복 국민들을 상대로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역사상 그 어떤야만적 압제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생명과 정신을 계획적으로 도살했다. - P21

성년을 앞둔 몇 해 동안 히틀러를 그토록 행복하게 해준 것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였다. 그런 자유 덕에 생각에 골똘히 잠기고, 몽상에 빠지고, 친구와 함께 시가지나 시골길을 배회하면서 세상의 무엇이잘못되었고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을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저녁이면웅크린 자세로 책을 뒤적이고 이따금 린츠나 빈의 오페라하우스를 찾아뒤쪽 입석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신비주의적이고 이교적인 작품을 넋놓고 감상할 수 있었다. - P38

청소년기의 친구는 훗날 히틀러를 얼굴이 창백하고 병약하고 빼빼 말랐던 사내, 보통은 수줍어하고 과묵하면서도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는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는 사내였다고 기억했다. 히틀러는4년간 슈테파니 stefanie라는 이름의 어여쁜 금발 소녀를 깊이 짝사랑하면서 그녀가 종종 어머니와 함께 린츠의 란트슈트라세를 산책하는 모습을흠모하는 눈길로 바라보긴 했어도 직접 말을 나눠보려 하지는 않았고,
이런저런 애정의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자신의 허무맹랑한 공상세계에 가둬두기를 좋아했다.  - P38

그렇지만 이런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끝끝내 어엿한 직장을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나의 투쟁>에서 밝혔듯이. 그는 행여 프롤레타리아트 신분으로, 육체노동자 신분으로 미끄러져 내려갈까봐 전전긍긍하는 프티부르주아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 P45

히틀러의 ‘예술적 성취는 이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죽는 날까지
‘예술가‘를 자처했다. - P46

대부분 빈약하고 조잡하고 괴상하고 터무니없고 기이한 편견에 물들어있었다는 것은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 이념이 작금의 세계와 역사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것이 이책벌레 부랑자가 머지않아 건설할 제3제국의 토대 중 일부를 형성했기때문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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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외래 환자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진료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올 때 손에 든 꽃바구니가 무겁게 느껴졌다. 사무실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외과학교실과 학생에게 받은 카네이션도 주머니에서 꺼내 함께 올렸다. 눈앞에 놓인 꽃들은 피처럼 붉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지금도 붉은 피를 쏟아내며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 P28

로 나갈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삶은 평범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나는 수술이 좋았고 수술방에 감도는 서늘한 감촉을 사랑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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