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미친 짓이다 - 2000 제2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만교 지음 / 민음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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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들어 동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크게 약화되고, 혼전 순결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고 있다. 동시에 결혼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변해 때 되면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던 옛날과 다르게 독신으로 사는 사람의 수가 늘고 있다. 출산률 저하, 이혼률 상승 등의 문제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회 전반의 경제 능력 향상에 따른 개인주의의 만연일 것이다. 기계, 정보화 문명이 확산됨에 따라 타인과의 친밀한 접촉이 감소되고, 문명 발달에 따른 경제력의 향상은 굳이 타인의 도움을 얻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저하시킨다. 결국 사회의 이목에 신경쓰기보다는 자신의 생활에 더욱 심취함으로써 되도록 타인이나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활성화가 위에 제시된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결국 이 책에서 보여지는 ‘결혼’은 ‘결혼’을 부정하지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으로서 부가되는 질문 하나. “결혼이란 무엇인가?”-분명 이 속에서 보여주는 결혼은 사랑하는 남녀를 제도적으로 합리화하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단순한 사회의 제도로서 사랑하는 남녀의 불법적인 관계로 만드는 것으로 등장한다. 내가 이 책에서 시종일관 느꼈던 것은 ‘결혼’의 한계였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상적 행복을 추구하는 삶과 좋은 조건을 지닌 사람과의 형식적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 맞아떨어지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드문 확률로 이러한 행복이 일치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고 해도 그 뒤에도 계속 행복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사랑할 때 분비되는 호르몬의 작용은 3년이 채 안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 후는 처음의 사랑했던 감정과는 분명 다른 형태의 감정인 것이다. 서로에 대한 책임감과 익숙함 등의 감정으로, 그 외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런데 단지 그 짧은 기간의 사랑을 위해 결혼이란 제도로 서로에게 반영구적인 책임을 강요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또한 결혼이란 제도가 고대부터 만들어진 것을 감안할 때 현재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고대 인류의 수명은 현재 인류 수명의 반도 안되었다. 구석기인들의 평균 수명이 11~12살 정도이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시기가 7~9살 때 이다. 호르몬의 작용이 끝날 때쯤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 이러한 결혼 제도는 큰 문제없이 적용 될 수 이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평균 수명은 70세를 넘어섰다. 이러한 구석기 시대와 같은 방식의 결혼 제도를 현재에도 똑같이 주장한다면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결혼제도가 시행되는 것은 지속적이고 일정한 ‘사회구성원의 재생산’과 ‘사회화’를 위해 제도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결혼이 고대 사회부터 현재까지 관습으로 굳어져 내려온 것은 단지 그 이상가는 사회통제수단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가장 먼저 사회화하는 곳이 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정이기에 무의식중에 이 제도를 당연시하게 된다. 이렇게 ‘결혼’이 일종의 고정관념으로서 자리잡게 되는 것은 남녀간의 결혼이 아닌 것에 대해 배타성으로 띄게 되는 문제를 안고있다. 사회에서 동성애자, 동거 등에 편견을 갖고 대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의 재생산과 사회화를 행할 수 없음으로서 안정된 사회를 파괴하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결혼을 당연시함으로서 만들어진 금지사항에 불과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사회구성원의 재생산과 사회화의 문제는 가정 내적으로도 갈등을 유발한다. 결혼과 동시에 자연적으로 부과되는 두가지의 과제가 주로 여성의 몫으로 인식되어 남녀 불평등을 만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출산과 육아를 맡김으로서 역할을 한정지어 개인의 능력을 무시하게 된다. 전 인구의 반이 전통이란 이름으로 굳어진 역할에 갇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고, 남녀간의 불평등 문제를 야기한다.

요즘 사회 전반에 걸쳐 결혼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더불어 동거, 이혼에 대해 이전처럼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하는 이들도 줄었고, 혼전 순결에 대한 집착도 덜해졌다.(동시에 동성애에 대한 편견도 완화되고 있다.) 자신의 삶을 우선시하는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타인의 권리(취향 혹은 존엄성의 문제를) 존중해 주면서 사회가 개방화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영화는 그러한 분위기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개방화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적절한 타협점을 그린 것이다. 이런 개방화된 사회를 위해,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가 온전히 제권리를 찾고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결혼은 폐지되어야 한다. 고대의 인류에게 맞을법한 제도를 현재까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우리가 고정관념에 오랜시간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때인 것이다. 난 결혼이 스스로 구속하고 사회의 관행에 순응해버리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 속에서 그려지는 결혼은  흔히들 말하는 개인주의 성향과 관계가 깊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주의는 기존의 관념에 반박하는 단순한 젊은이들의 반발이 아니라 합리성에 기반을 둔 현명함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가장 많은 이익이 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할 수 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배려이고 어느선까지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남을 것이다. 

결국 이 책을 보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제목과 같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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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3
홍성욱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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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


※파놉티콘(Panoptucon) :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1791           년 죄수를 교화할 수 있는 시설로 제안한 원형감옥.

         파놉티콘 바깥쪽으로 원주를 따라서 죄수를 가두는 방이 있고 중앙에는 죄수를 감           시하기 외한 원형 공간이 있다. 이 중 죄수의 방은 항상 밝게 유지되고 중앙의 감           시 공간은 항상 어둡게 유지되어, 중앙의 감시 공간에 있는 간수는 죄수의 행동을           모두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죄수는 간수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다.)

        

♣제1장 계몽의 빛에서 푸코의 규율 권력과 감시의 시선으로

-‘시각’ 옹호론 :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본다는 것을 참된 지식을 얻어내는 이성의 작                  동 방식과 동일한 것으로 봄.

-‘시각’ 비판론 :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아닌 합일에 기초한 새로운 과학과 철학의 필요성                   주장.

-푸코의 새로운 지식 비판-시선과 권력 : 파놉티콘이 직접적으로 개개인에 작동하며, 정신                  에 의한 정신에 대한 권력 행사라고 주장.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가는 중요                  치 않기에 누구나 이 기계를 쓸 수 있다고 여겨 세상의 파놉티콘화를 가능                  하다고 여김. 파놉티콘의 감시의 원리가 사회 전반에 스며 규율사회의 기                  본원리인 파놉시티즘으로 변화.

-푸코의 해석과 전자 감시 : 근대 이전의 ‘스펙터클의 사회’ →근대의 ‘감시 사회’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감시 통제 방법이 컴퓨터 데이                            터베이스, 폐쇄 카메라, 신용카드 결제 등의 정보 수집 형태로 사용됨. 정                  보감옥이 ‘정보 파놉티콘’, ‘전자 파놉티콘’이라는 생각 확산.

♣제2장 벤담의 파놉티콘

-벤담의 파놉티콘 특징들 : ①시선의 비대칭성

                          ②파놉티콘의 주인이 국가와 계약하여 운영하는 사설 감옥, 계                              약식 감옥의 형태.

                          ③죄수의 노동으로 유지되는 공장형 감옥

-벤담의 파놉티콘을 바라보는 다양한 입장들

①푸코의 경우

  -감옥을 위해 설계된 파놉티콘이 사회 전반에 걸쳐 통제와 규율의 원리로 확산, 사회 구    석구석에서 이러한 영혼 통제 규율을 가능케하여 현대 사회가 거대한 파놉티콘, 즉 감옥    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주장.

②셈플의 경우

  -푸코는 파놉티콘을 “잔인한 새장”이라고 불렀지만, 셈플은 파놉티콘이 더 인간적이고      합리적이라고 강조.셈플은 푸코의 논의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과 해    석이라기보다 현대 사회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라고 주장.

③힘멜파프의 경우

   -벤담의 파놉티콘 보다는 그의 자유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철학적 원칙에 더 의미를    둠. 파놉티콘이 벤담의 공리주의 철학의 본질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주    장. 벤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문구 속에 담겨진 의미의 문제점 지적.

④또다시 셈플의 경우, 힘멜파프의 문제점

   -벤담의 민주주의와 파놉티콘 사이의 훨씬 더 흥미롭고 긍정적인 관련은 셈플이 제시.     감시의 권력은 역감시의 구조에 의해서만 투명성을 보장받는 다는 간단한 원칙이었다. 셈    플의 해석에 따르자면 벤담의 자유민주주의 원칙들은 파놉티콘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이     가져온 것. 하지만 셈플은 제레미 벤담이 아이디어를 얻은 새뮤얼 벤담의 중요성을 간과.


♣제3장. 공장의 파놉티콘. 감시의 시선에서 정보와 기록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규율과 통제

  산업혁명이후

   1)공장의 특성에 따라서...

     ex)방직공장-다수의 어린 노동자채용. 규율 어길 시 각종 처벌.

                 크롬포트공장-여성과 어린 노동자가 주된 작업담당. 시간을 엄수해 통제.

        물방적기공장-가부장적 요소 도입하여, 숙련 남성 노동자가 자신의 가족 담당.

                     통제하게끔 함.

   2)시계사용-정확한 시간제에 의한 노동

   3)기계-인간의 노동을 기계에 맞춤으로서 숙련 노동자를 쉽게 통제함.

-감시문제.

   파놉티콘의 핵심원리인 시선을 통한 감시의 공장 안에서의 변천사.

   19세기초-시선에 의한 서로 서로의 감시체제.

   20세기초-테일러주의 :시간, 동작 분석을 통해서 숙련노동을 단순노동으로 분해. 즉 시              간 분석을 위해 사용한 스톱워치는 중요한 테일러주의의 상징물이 됨.

           -메이오: 노동자들을 사회구성원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인식. 자부심 키워주기

           -포디즘: 인간과 기계의 포드식 결합. 노동자들이 단순 노동만을 하게함.

   정리: 장업장의 통제는 첫째, 눈으로 보는 감시서 둘째, 기계에 의함으로 바뀌었고 셋째,          탈 숙련하고 넷째, 작업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 모으고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옴.   


♣제4장. 정보, 전자 파놉티콘과 작업장 감시

-숫자의 산사태와 데이터 감시.

  19세기-숫자의 산사태: 캐나다 철학자 ‘이언 해킹’이 정의함. 19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정           보 수집과 분석을 일컬음. 즉 정보와 기술이 권력과 만나는 접점.  

  20세기-‘데이터 감시’로 진화됨.

         1976년 : 기업의 정보수입과 보관의 가속화.

         1980년대: 자동지문 확인 시스템 도입.- --->이후 전자카드 도입 등 가속화되감.

-전자기기를 통한 직접 감시.

  1960년대 말: 페쇄회로 CCTV등장(본질적으로 국소적 지역감시. 그러나 근래의 인공위성    은 감시를 기동력 있는 mobile로 만들음) 감시카메라 등장.  

  2000년대: 지문, 홍채, 얼굴모양 등을 파일로 만들어 저장하는 생물통계학이 발전함.

-위성과 감시의 세계화.

  위성에 의한 추적시스템은 공권력에 의한 심각한 사생활 침해가능성을 내포함.

  미국의 국가 안보귝(NSA)에 에셜련 시스템은 감시범위가 전세계적임.

-기업의 소비자 감시- 컴퓨터 데이터 베이스, 인터넷

  방법:신용카드, 백화점 타드 등 각종 카드로 소비자 프로필 수집.

  -소비자의 의견이 중요시되지 않은 채, 수집되고 기업에게 있어서 판매대상으로 간주됨.

  컴퓨터의 감시능력은 1990년대 인터넷 사용이 늘면서 사이버페이스를 통한 사이버 감시    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함.

-국가 기관의 관여.

  ①각종 다양한 소프트 웨어 개발.

     1)카니보어: ISP에 장착되어 전송되는 인터넷 패킷을 가로챌 수 있음.

     2)매직랜턴: 개인컴퓨터에 설치. 두드리는 키보드를 자동적으로 FBI에 보고함.

                즉, 모든 키보드의 움직임을 파악함.

-직장과 작업장에서의 감시.

  직장에서 쓰는 각종 컴퓨터는 업무를 도와주지만, 또한 상관에게 이를 감시하게되는 용도    로 사용되기도 함. 광범위하게 직원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 폐쇄회로 텔레비    젼 또한 좋은 감시 작업용. 이밖에 RF카드, DAS 설치 등등.

-사람들간의 상호감시:각종 몰래 카메라와 리얼리티쇼. 영화 트루먼이 좋은 예임.

-전자, 정보 파놉티콘(앞의 예처럼 새로운 감시체제를 일컬음.)

  ①벤담의 파놉티콘과 정보파놉티콘의 공통점: 불확실성, 즉 언제 있을지 모르는 감시에        항상 대기함과 긴장감을 가짐.

  ②들뢰즈: 현재 사회를 새로운 통제 사회라고 정의. 벤담의 파놉티콘(단 하나의 중앙적 감       시체제를 가지고 있음)이 규율사회에 적합한 감시의 매커니즘. 전자 파놉티콘(중앙감       시탑의 분산)은 통제 사회에 적합한 감시의 매커니즘.

-슈퍼파놉티콘.

   전자 파놉티콘의 두드러진 다른 특징- 전자 감시가 피 감시자의 자발적인 협조에 의해     이루어짐.

   ex)기업에서의 소비자 관리: 편리성 때문에 자신의 정보를 기업에 쉽게 제공. 자신도 모        른 사이 노출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음

   -혜택은 눈앞에 보이고,  실제적 불이익은 간접적이고 미래의 것이라고 생각함.


♣제5장. 역감시와 시놉티콘, 역파놉티콘

-감시와 역감시

  ①조지오웰의 “1894년”

  ②video camera(경찰의 흑인 로드니 킹 집단 구타 장면,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인 진압)

-시놉티콘, 언론에 의한 권력 감시

   ①<19c> 다수 역시 소수를 감시하기 시작

   ↳언론, 통신 기술 발달 : 시놉티콘(권력자와 대중이 동시에 syn 서로를 보는 메커니즘)

-시민운동의 역감시 사례들

   ①정부와 행정기관은 물론 의정과 언론을 포함해서 사회의 권력 집단을 감시하고 대안적      인 정책을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시민 운동이 등장했다. (111~114페이지 참조)

   ②주용 타깃: 권력의 부패, 정치권 선거, 대기업의 경제 권력, 언론 ‘권력’에 대한 감시

-시민운동의 연대 강화

  -인터넷과 같은 쌍방향network가 시민운동 단체 활동을 더 효율적으로 만듦.

   ex) 온라인 서명, 낙선운동 명단 유포, 성폭력가해자 실명유포, JINBONET과 같은 운동        포털 사이트. ANTI CHOSUN, 딴지일보, 오마이뉴스

-인터넷과 새로운 연대

  ex) 인텔 펜티엄3 칩에 대한 반대운동, 멕시콘 사파티스타 반군의 해방운동.

-인터넷, 지속적인 역감시

  ①인터넷을 언론으로 이용하는 운동은 기존의 언론 매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기 힘든      문제에 대해 더 효과적

-파놉티콘의 역 파놉티콘화

  ①물론 모든 감시에 대해 역감시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특히 공개가 안되는 정보에 대해      무력.  ex)  2001년 정보공개법 개정안.

  ②정보 공개 요구와 이를 위한 합법적 운동은 파놉티콘을 역파놉티콘으로 전환 시키는 유      용한 방법.


♣제 6장. 감시 사회와 프라이버시 - 현재와 미래

-무엇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가?

①다른 사람에 대해 알기 원하면서 자신의 정보는 알리지 않기를 원함.

②사람들은 약간의 편리함을 위해 프라이버시를 쉽게 포기함.

③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함.

④역감시의 만연

-21세기에 새롭게 부활하는 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서는 개인, 시민 단체, 정부가 협력 관계를 유지. 프라이버시를 죽었다고 간주해야 할 권리가 아니라 21세기에 적극적인 의미로 새롭게 부활시켜야 할 기본권으로 인식.



이것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정보화 사회의 문제점을 언급함으로써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벤담이 제시했던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의 형태가 우리사회에서 부활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태연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진보해가는 사회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진보해 가고 있는지 해방되어 가고 있는지를 되묻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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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동녘문예 6
김산 지음, 조우화 옮김 / 동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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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말미암은 무사계급의 불만을 우리나라 쪽으로 돌리고, 불평등조약을 강요해 각종 이권을 얻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지만,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수난을 의미했다. 그러나 갈수록 일본의 수탈이 심해지고, 국민들은 부패와 세력다툼으로 무능해진 정부에 의지할 순 없었다. 결국 일본의 탄압에 도망치기 위해, 혹은 저항하기 위해 많은 국민들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투쟁을 위해 조국을 떠난 이들 중엔 운좋게 사람들에게 기억되어 위인으로서 존경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단 격동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싸우다가 죽고 잊혀진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들의 희생없이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김산’은 우리의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역사의 흐름속에 묻힌 인물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살았다는 점에서, 그 신념이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안위를 염려한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있는 삶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을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내가 집에 앉아 사소한 일로 동생과 싸우고 간식거리로 고민하던 나이에 그는 동경과 만주,상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상에 대해 고민하고 싸웠다. 조선이란 나라는 그에게 젊음을 느낄 여유를 주기엔 너무 열악한 환경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구체제와 자기도태 등의 내부적 문제점과 일제강점하라는 외부적인 문제점들은 일찌감치 그를 조국에서 내몰았다. 11살에 가출을 하고, 14~15세때 무정부주의자가 된다. 15세의 나이에 혁명운동에 참여하길 원하며 결혼을 거부하는 이에게 나이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를 보면 나이가 적고 많음이 어리고 성숙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사람에 영향을 미쳐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일상에서    “내 나이가 몇 살인데...”라는 말을 쉽게 한다는 것이 스스로 사회의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살고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 내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게 된다. 무의식중에 ‘나이’라는 것으로 내 행동에 쓸데없는 제제를 가한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면 그간의 삶에 안타까운 생각마저 든다.

한편 그는 중국과 일본에 체포되면서 고문을 받기도 하고, 다른 이로부터 모함을 받아 사람들에게 의심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존엄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놀랐다. 조금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자제하지 못하고 주변사람에게 쏟아붓는 나와 대조되는 모습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됨에도 상대방을 용서한다는 것-내적 성숙을 바탕으로한 이성의 승리다. 아직도 옹졸하게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며 이성보다 감성을 앞세우는 내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게된다. 그리고 자신은 다른이의 고발에 의해 잡혀 들어갔으면서도 자신은 심한 고문 앞에서도 동료의 이름을 대지않고 자신의 신념을 따른다는 것은 나로선 자신없는 일이다. 난 극한의 상황에서까지 내 신념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다. 왠지 다른 사람도 다 변절한다면 그들에게 배반감을 느끼다가도 다수의 행동에 묻혀 내 스스로 합리화를 하면서 결국 똑같이 될 것 같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닌 스스로 정한 길을 홀로 걸어가는 굳은 신념이 아직 내게 갖춰지지 않은 듯 하여 씁쓸하다.

그에비해 ‘김산’은 어릴때 무정부주의에 빠졌다가 ‘김충창’에게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의 신념은 변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원하는 사회를 위해 싸웠다. 그리고 그 신념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트로츠키 주의자로 몰려 죽음을 당한다. 살아있었더라도 현실에 세워진 공산주의는 그가 꿈꾸던 것과는 달랐을테고, 현실에 맞지 않음으로 인한 공산주의 사회의 몰락은 오히려 좌절감을 맛보게 했을지도 모른다. 당대의 지식인들 대다수가 공산주의를 꿈꾸었고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 싸웠다고는 하지만 ‘김산’ 또한 그 허망한 이상에 젖어 희생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애석하다. 공산주의의 이론이 말 그대로 이론에 불과한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다. 현실이 너무 암울했기에 더욱 이상에 빠져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정확하고 공정한 이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제시한 세계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간과했다는 것을 알지못한 것이 그의 삶에 있어 가장 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이 사회의 변혁을 꾀하는 혁명가로서 손색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목표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현실과의 괴리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단순한 이상주의자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가 공산주의 혁명에 쏟은 열정이 중국의 공산주의에 치중된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갈망해왔고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활동도 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주요 행적은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 속에서 더 빛난다. 중국대혁명 참가나 여러 중국인과 어울리며 공산주의를 위해 하는 행동들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투쟁보다 더 열성적인 것 같다. 물론 그가 원하는 것은 각 나라들의 공산주의자들의 연계와 통합이였을지라도 아직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조국의 독립이 더 우선되어야 했을 것이다. 중국에서 중국인 공산주의자들과 국민당에 대항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우리나라의 다른 사람들, 단체들과 협력하여 일본에 먼저 대항했어야 한다. 공산주의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조국이 없다면 자신이 있을 자리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가 궁극적으로 해방된 조국의 공산주의화를 바랬다면 그는 일의 순서를 잘못 정했다고 생각한다.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싸울 수는 없다.

‘김산’은 조국강토의 식민화라는 현실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모색하던 지식인이자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혁명가였다. 그의 이상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가 물려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만이 아닌 다음세대까지 염려한 숭고한 죽음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리랑은 그의 삶이고 우리의 삶이다. 아리랑의 여러 가지 곡조와 가사가 우리의 정서를 담아 다음 세대로 이어지듯이 그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자연스레 전해지듯 우리 또한 다음 세대에게 전해질 것이다.그러므로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다음세대를 위해 할 일은 없는지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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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왕국 신라
김기흥 지음 / 창비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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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들은 국사 수업에서의 신라는 그 문화보단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뉘어있던 삼국을 통일한 나라로서 더 중요하게 다뤄졌었다. 그래서 내가 신라를 떠올릴 땐 자연스레 삼국 통일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조금 더 생각하면 선덕여왕, 경주, 첨성대 등도 떠올리겠지만 이런 몇 개의 고유명사를 기억한다고 하여 신라라는 나라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천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존재했던 나라에 대해서 아는것이 고작 몇 명의 왕과 유적 몇 개라면 이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지하게 살았던가를 말해줄 뿐이다. 내가 아는 신라는 몇 개의 시험용 지식으로 토막난채 잊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천년의 왕국 신라’를 읽으면서 새삼스레 깨달은 것은 신라가 천년동안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신라를 배워오면서 유구한 시간의 흐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온 이후 삼국을 통일하고, 부패한 귀족들의 왕위다툼에 스러지기까지 가만히 따져보면 그 역사의 흐름이 꽤 길다는 것을 금방 알 수있다. 그러나 난 그조차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신라가 천년의 왕국이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는 일 없이 학교에서 배웠던 것, 혹은 어릴 때 읽었던 학습용 역사만화에서 본 지식만을 단순하게 습득하고 있던 나는 이 책에서 내가 알고있던 역사의 다른 면을 보는 계기가 되었다.

석탈해와 유리가 서로 왕위를 양보하며 떡을 깨물어 왕을 결정했다는 얘기를 단순히 얘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떡을 깨문다는 행위에서 옛사람들이 이빨의 많고 적음으로 연장자를 가렸었다는 일종의 미신적 요소가 담겨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왕위를 양보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지지만 사실은 둘이 왕위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고하며 그에 대한 배경과 역사적 자료 등을 제시함에 따라 흔히 알고있는 얘길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내가 잘몰랐던 신라의 포용정책도 인상깊었다. 고구려의 영토를 뺏은 후 그 지역 거주민이 신라의 성을 쌓는 일에 동원되어 일하다가 죽자 처자와 형제에게 후하게 포상하여 거주민들을 신라인으로 동화시키려는 노력하였다. 단순한 정복욕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나라의 성장과 통합을 추구하는 노력이었다는 것이 대단했다. 이미 그 때에도 한민족으로서의 자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21세기라고 하는 지금에도 여성으로 태어나서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는데 하물며 몇천년 전에 왕의 자리에 오른 첫 번째 여성, 선덕여왕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난 처음에는 막연히 신라시대에는 유교윤리가 들어오기 전이여서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나보다라고 대수롭지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석가모니의 탄생을 바란 진평왕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실망을 안겨주었다. 성골이라는 혈통적 정당성이 있었지만 역시 여자라는 이유로 왕의 자리에 힘겹게 올랐고, 여자가 왕이 될 수 없다는 반란군들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며 죽었다. 이는 여성 장관이나 국무총리에 많은 반발이 있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속에서 절과 탑의 건축으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고 현명하게 처신했던 선덕여왕은 현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많은 귀감이 될 수 있다.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나라를 통치함에 모자람이 없었던 것은 자신에게 긍지가 있었고 주어진 책임에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여성 장관이나 국무총리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책임을 지닌 여성들은 주변의 시선에 지레 질려 포기하기보단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역할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천년의 왕국 신라’를 읽으면서 모르던 것들은 새로 배우는 기회가, 알고있던 것은 다시 생각해보고 다양한 해석을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신라의 고대와 중대 부분만이 다뤄져 하대는 아직도 잘 알지못한채 남아있는 것이다.   한편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나의 무지함에 대해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를 모르고 현재를 알수있을리 없으니 결국 난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채 살고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부담감은 내가 생존할 뿐 삶을 누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에서 오는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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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속살 - 동시대인 총서 9
임지현 지음 / 삼인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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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조회시간에는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늘 조회의 첫순서로 자리매김되어있는 ‘국민의례’이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국가에 충성을 받칠 것을 매주 다짐하는 행위는 12년간 걸쳐 이루어지기에 그 내용은 다들 줄줄 욀 수 있다. 일종의 세뇌인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무의식중에 행해진 것에 의문을 품기는 힘들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연스레 내면화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국가에 충성을 맹세해야한다는 것에 생각해본 적 있을까? 분명 국가는 국민의 집합체로서 동등한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가 국가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국민의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국가에서 정확히는 힘있는 자들이 국민의 손쉬운 통제를 위해 복종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은 국가라는 권력의 희생자로서 파시즘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선 우리가 이러한 파시즘의 희생자가 아닌 공범자임을 말하고 있다. 국민 또한 이러한 파시즘적 권력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우리의 일상에서 보여지는 파시즘의 위험성을 말하고 그것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다. 미국 백인들의 완강한 인종차별주의, 홀로코스트에 거리낌없이 가담한 독일 노동자. 무솔리니를 지지했던 이탈리아 사람들이 파시즘의 위험성을 드러내는 좋은 예이다. 일반 시민들이 관성과 전통에 얽매여 자신에게 있는 파시즘적 성향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군부적 독재나 억압보다 그 잠재적인 위험이 훨씬 높다. 한편 우리나라 또한 이러한 파시즘적 요소가 우리 삶에 녹아 있다. 지식인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대학생과 교수들 사이에 있는 철저한 선후배 관계와 파벌주의, 대선이나 총선에서 같은 지역 출신을 밀어주는 행위, 기성 세대에 강한 반발을 표시하면서도 형님, 아우를 말하는 젊은 층 등은 이미 파시즘에 젖어있는 것이다. 난 지난 2002년 월드컵을 보면서 우리 안에 내재되어있는 민족주의를 느꼈다. 축구 경기가 진행될 때의 전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은 냄비근성이라 비판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존재하였던 파시즘적 요소일 것이다. 북한 체제가 국민들에게 조국과 민족을 강요하면서 각종 행사를 벌이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우린 그들의 모습에 동정한다. 북한 공산주의 체제의 위험성까지 언급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월드컵 때 보여준 국민들의 움직임은 이미 북한의 그것을 넘어선 것으로 자발적으로 있었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이는 국가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이와같은 일사분란함을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긍정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는 민족이라는 이름 하에, 국가라는 이름 하에 뭉친 것으로써 타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배타성이 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그 위험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미선이와 효순이 사건이 있었을 때 미국의 패권주의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반미주의 성향을 드러낸 것은 이러한 민족주의의 일환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독일의 나치즘이나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처럼 극단적으로 흐를 소지를 지니고 있어 위험하다. 한편 이 책은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파시즘적 성향은 분명 인식하기 힘들면서도 많은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언급된 것 중에 일본의 일장기와 우리나라의 태극기에 대한 인식을 비교하는 부분이 있었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일장기를 제국주의의 산물로 보고 타파해야 할 것으로 여기면서 정작 우리나라의 태극기에는 이러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르다. 일장기와 태극기를 둘다 국가주의의 상징으로 보고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엔 무리가 있다. 일장기는 하얀 바탕에 가운데 붉은 원이 그려져 있다. 이는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그들의 시조신(태양신)에서 유래하여 천황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14세기 때 붉은 원이 일반화됨과 동시에 권위의 상징으로 전해진 것이다. 또한 일본이 제국주의 사업이 한창일 때 사용하던 욱일기는 여전히 해군에서 사용되고 있다. (일장기는 이러한 욱일기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권위와 제국주의의 산물과 태극기를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이다. 태극기는 조화를 상징하는 태극문양과 우주의 원리를 나타내는 사괘를 가지고 있다. 국기로서 담고있는 의미가 충분한 것이다. 제국주의적 파시즘의 산물과 같게 여기고 무조건적인 타파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잘못된 것이다. 일장기에 반대하는 것은 일장기가 담고있는 군국주의적 요소를 없애려는 것이다. 단순한 국가주의 반대 이상의 의미를 담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태극기는 그 의미에서 아무런 하자가 없다. 국가주의의 상징으로 보기에도 억지가 있는 것이다. 모든 국기를 국가주의의 상징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런 식으로라면 전 세계의 국기가 사라져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사회를 너무 파시즘으로만 보는 것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우리의 일상적인 파시즘을 말하고 우리가 이런 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분명 우리는 여전히 민족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고 철저한 수직구조의 체제의 파시즘도 보편화되어있다. 국가의 지배체제 뿐만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의 자각과 반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파시즘을 국민 탓으로만 보기 힘들 것이다. 일본 침략기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은 이본에 대항하기위해 뭉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민족주의가 대두되었다. 또한 이승만 이후 박정희, 전두환 등으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이 끊임없이 주입식 교육으로 파시즘을 내면화 한 것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독재 권력들은 자신의 통치를 위해서 파시즘적 요소를 더욱 활성화 시켰다. 분명 우리에게 파시즘이 내면화되어있어 위험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원인조차 국민에게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있기까지의 역사적 맥락과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며 그 원인부터 제대로 알아야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일상적 파시즘의 몰락은 우리나라가 과거 일본 강점기와 독재 체제에서 남겨진 관습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우리안의 파시즘을 언급함으로써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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