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해야 하나? 이 이야기는 참 건조하게 시작되었다. 건조하다는 것은 내용이 건조하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엄마의 대화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짐작하게 하는 것은 두 사람의 사이가 극도로 나쁘거나 또는 서로에게 애정이 없거나 등등이다. 그런데 엄마는 그렇지 않다는 게 이 이야기의 첫 장부터 몇 장까지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참 이상하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그 다음 장이 자꾸만 기다려진다. 아니 왠지 모르게 주인공의 마음이 참 아프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주인공도, 그 엄마도 함께 하는 아픔인데 이 어린 아이가 느꼈을 그 감정에 자꾸만 애틋해진다. 여섯 살 아이의 눈에 비친 현실이 참 혼란스럽지만 아이는 그래도 의젓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책을 읽는 동안 집중할 수 있도록 되어진다. 여섯 살 아이에게 아버지는 분명 커다란 존재인데 그 아버지가 사라진(?) 이후 엄마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빠의 부재를 받아들였을까? 아빠를 완전히 잃어버린 엄마에게 더 이상 기댈 수 없음을 알고 혼자 먹고 살아가는 모습. 그 연어 통조림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잠깐 생각해본다. 연어는 다시 제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알고 있다면 분명 엄마도 다시 이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했다. 배회하는 이 모녀가 찾은 포플러장 연립 주택, 그곳에서 이 여섯 살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차츰 세상을 알아간다. 그렇게 깊이 깔려 있던 외로움과 불안 등을 서서히 떨쳐버리게 된다. 아이가 이렇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포플러장 주인 할머니와의 아주 특별한 소통이 있었다. 비로소 차츰 안정을 찾게 된다. 포플러 나무를 가끔 등장시켜 이 아이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나 편지의 내용이나 주변 인물들의 일상 등은 이 아이가 얼마나 큰 상처를 보듬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분명 이 아이는 정말 남다른 소통의 과정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어린 여섯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아이는 엄마의 고통도 알아버릴 만큼 훌쩍 자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아이는 엄마와 손을 잡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청소년이 읽기에 좋은 성장소설이라 구분되어졌지만 난 엄마와의 갈등이나 부모와 화해되지 못한 기억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적극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