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공장 - 복종하는 공부에 지친 이들을 위하여
강명관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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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자본과 테크놀로지의 구조라는 괴물에 익숙해지는 동안 말하지 못하고 알면서도 모른척했던 것들에 대해 직설적으로 이야길한다

인문학은 기계처럼 찍어낼 수 없고, 구조에 의해 짜 맞춰질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불온한 손길로 저항성과 비판성을 담아낼 때 가능하다.

우리의 고전문학과 역사는  아이들에게 동화로 읽히뿐이고 중고생에게는 오직 시험을 위한

대상일 뿐이며 어른들에겐 흥미를 줄수 있는 부분만 드라마로 영화로 변형되어 기억될 뿐이다

한문과 한국어로 나누어졌던 계층은 이제 영어를 사용하는 한국사람과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사람으로 또 다른 게층을 만들어 내고 있다

돈에 지배되는 인문학과 역사, 권력에 따라갈수 흔들릴수 밖에 없는 역사와 인문학

그것들의 앞날은 과연 어떻 모습으로 진행될수 있을까

모두가 한번쯤은 생각하고 고민하고 고심해봐야 할것이다

내 자신과 내 후손들을 위해....

 

 

더 웃기는 것은 학진의 연구비를 받기 위해 연구비 신청서를 쓰면서 연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주장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탈락한 경우, 그 연구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한순간에 증발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렇게 중요한 연구라면 연구비를 받지 않고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연구비를 받지 않으면 그런 연구 주제가 언제 있었냐는듯이 왜 연구를 포기하는가?

전근대 사회에서 구성원의 대다수를 이루는 농민과 어민, 노비는 그 수에 상관없이 소수자였다.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 역시 소수자였다. 소수자인 그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쓴다면, 그 역사는 완전히 달리 기술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영웅서사시로서의 한국사는 소수자가 원초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역사를 그들의 역사로 각인시키는 도구가 될 뿐이다.

역사는 읽히지 않으면, 공터에 내버려진 의미 없는 사물일 뿐이다. 역사는, 독자에게 읽혀 자신을 독자의 대뇌에 복제함으로써 그를 진리로 믿게 하는 데 존재 의의가 있다. 학교 교육은 그 과정을 강제화한 것이다.

국문학 연구와 국문학과는 사랄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국가에 의해 강제된 초.중.고등학교 국어 교육의 영역에서 내셔널리즘을 생산하는 주요 수단으로 존재하기에 국어(한국어)와 함께 영원히 존족할 것이다. 하지만 국어 교육의 영역, 좁게는 국어교과서와 대학입시를 벗어나면 국문학은 순식간에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춘향전과 심청전을 민족의 고전으로 칭송하는 것은 국어교과서일 뿐이고, 아무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지 않는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민족의 고전인 국문소설, 예컨대 흥부전과 심청전은 유아나 초등학교 저학년의 독서물로 존재할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영어는 국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생존수단이 되고 있다. 아마도 조만간 한국 사회의 귀족들은 한국어로 쓰인 책이나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지 않고, 영어원서를 읽을 것이다 한문/한국어로 구분되었던 한국인의 사용 언어는 이제 영어/한국어의 관계로 급속하게 치환되고 있다. 한국어가 제1언어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없을 것이지만, 귀족들의 제1언어는 영어가 되고 말것이다.

이제 자본은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 관리하고 삶 전체를 이윤 추구의 공간으로 삼기에 이윤과 관련되지 않거나 관련성이 희박한 부분에까지 이윤을 낳을 것을 요구한다. 종교와 학교, 의료, 예술은 자본과 관련이 희박한 부분이지만 급속도로 자본에 포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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