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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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전화. 그 전화조차도 우리를 더는 연결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노폴리에서 바깥세상으로 나갔을 때, 그 관계를 지탱해준 것이 이 모노폴리의 룰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채고 말았다. 우리 사이에는 이미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건 끝나 있었다. 단지 정해진 룰 안에서 그 게임을 지속했을 뿐이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낸 그 며칠 간이 그 룰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닫게 해버린 것이다.

다만, 내 안에는 작은 아픔이 남아있다.

그때.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그 비행기 안에서 우리에게 전화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74쪽)

 

 

 "죽음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게 있지. 그건 바로 삶이야." (86쪽)

 

 

내 인생이 영화라면. 나는 엔딩롤이 끝난 후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화이고 싶다. 작고 밋밋한 영화일지라도 그 영화에서 위안과 격려를 받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엔딩롤 후에도 인생은 계속된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내 인생이 계속 이어지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111쪽)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게 아니고, 미래에서 현재로 흘러온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분명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무한한 미래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미래가 유한하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내 안에서는 미래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진즉에 확정된 미래를 내가 걸어간다. 그런 감각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생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선고받은 데다 시간이 없는 세상에 내던져진 후에야 비로소 나는 난생처음 내 의지로 미래를 바라보려 하는 것이다. (138쪽)

 

 

 가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은 '행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단지 피로 이어져 있을 뿐, 두 사람의 개인이었다. (...) 급기야 마지막 순간, 나는 어머니 곁에 있는 것에 연연했고, 아버지는 시계를 고치는 데 연연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죽음을 사이에 두고도 끝끝내 하나가 될 수 없었다. (176쪽)

 

 

 내가 존재한 세상과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 거기에 있을 미세한 차이.

거기에서 생겨난 작디작은 '차이'야말로 내가 살아온 증거인 것이다. (204쪽)

 

블로그 이웃님 한마루님을 통해 이벤트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 작고 예쁜 책을 받았다. 속표지도 무척 이쁜데(아마도 악마 '알로하'가 첫날에 입은 옷차림이 이 모양이었으리라^^)  블로그에 리뷰를 올리려는 지금 사진기가 고장났다는 사실을 알았고,  

핸드폰 카메라는 요새 USB에 뭐가 문제가 생겼는지 사진 전송이 잘 되지 않는다...ㅠㅠ 

 

 

 

2014년 한 해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아는 후배가 죽었고, 같이 스터디를 하던 멤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밖에도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사건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매일 생각을 했다. 내가 오늘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면,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몸이 썩고 자연의 일부가 된다면 1980년대에 태어나 2010년대까지 살다 죽은 나의 보잘 것 없는, 서른 남짓한 인생은 그냥 그걸로 동시에 사라지고 마는걸까.

 

 

 

이 책의 주인공은 어느 날 시한부를 선고받는다. 그런데 기적같이 악마가 나타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하나씩 없애면 대신 삶이 하루씩 연장될 수 있다는 솔깃한 제안을 내어놓는다. 그렇게 주인공을 삶의 종료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의미와 그것이 사라지게 된 후에 나타나게 될 상황, 그리고 그를 둘러싼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점검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처음에는 전화가, 그 다음 날에는 영화가, 그리고 시계가 사라진다.

전화는 그의 첫사랑이, 영화는 소중한 친구가, 시계는 그의 아버지와 연결이 되는 매개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양이를 없애라고 악마가 종용하는 순간, 그는 주저하기 시작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토록 아꼈던 고양이,

힘든 순간에 그의 곁을 지켜준 고양이 양배추... 이것을 없앨 수 있을까.

그런데 정작 고양이를 통해 그가 떠올린 것은 관계가 단절된 '아버지'였다.

 

 

 

 

주인공은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후회가 밀려오는 순간에야, 그 후회가 느껴지는 삶이기에 그것이 '나의 삶'이었다고 인정하고 결국 인간은 100%의 치사율로 언젠가는 죽는다, 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며칠 전에 보았던 영화 <자학의 시>에서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원래는 만화가 원작이나 만화는 아직 보지 못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이제 중요하지 않다. 어떤 것이든 의미가 있다.'

 

적어도 주인공은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 그의 여자친구와 친구,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고양이 양배추와의 만남과 기억의 순간 등을 점검하며 그 의미를 찾아나갈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마지막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그리고 죽은 뒤 고양이 양배추를 맡길 사람이 바로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고 고양이 양배추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주인공...

검은색 터치로 길게 그려진 그 마지막 순간의 그림은 여운이 꽤 길게 남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계속 걸려 있지만 이 소설은 무겁지는 않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위트있고 경쾌하게 잘 그려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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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 전쟁 - 슈퍼 달러의 대반격
레이쓰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부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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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자본 시장은 공황에 매우 취약하다. 일단 공황이 나타나면 자본 시장이 순식간에 얼어붙고 공황에 휩싸인 투자자들이 대거 투매에 나섬으로써 시장이 대폭락하고 하루 만에 천문학적인 부가 공중에서 사라질 수도 있음이 증명됐다. 저속으로 달리는 열차에는 돌멩이가 날아와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고속으로 달리고 있는 열차는 갑자기 날아든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탈선할 수 있는 것과 같다. (103쪽)

 

연준은 지폐를 찍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영원히 파산하지 않는다. (172쪽)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마저 최근 700만 달러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을 신청했다. 그의 가장 큰 투자 실수는 2007년 870만 달러에 구입한 맨해튼의 주택이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격이 40퍼센트나 급락한 것이다. 경제학의 교주로 불리는 그도 거품이 꺼지기 전 최고점에 고가의 주택을 구입했던 것이다. (181쪽)

 

 

한 예로 미국 애플은 자신들의 기술이 타사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도체는 한국에서, LCD는 대만에서 공급받고 설계는 미국에서 직접 진행했으며 제품의 최종적인 조립을 중국에서 진행했다. 애플 제품을 모방하려는 기업들은 한국, 미국, 중국, 대만 업체들을 동시에 접촉해야 하는 것이다. 애플뿐 아니라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거의 모두 이런 투자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산업의 일부만 중국으로 이전해 중국의 저가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체 생산 과정 가운데 일부분만 중국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그 기업을 위협할 만한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 미국은 이렇게 함으로써 중국 스스로 독립적인 생산 능력을 기르지 못하도록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계 각국의 산업이 앞다퉈 중국으로 진출했다. 미국은 타국 산업의 투자 정책까지 간섭할 수는 없었다. 서방 국가들 사이에 어느 정도 묵계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큰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노키아가 휴대 전화의 일부 부품은 동남아에서 생산하고 중국에서는 LCD만 생산하다고 해도, 삼성전자가 휴대 전화의 다른 부품을 중국에서 생산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영리한 중국 기업들은 중국에 이전된 각 기업의 생산 시스템을 조합하면 훨씬 더 저렴한 비용으로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는 완전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렇게 해서 중국 제조업체들이 차음 환전한 산업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고 중국 자체 브랜드가 하나둘씩 탄생헀다. (222쪽)

 

 

신자유주의는 화폐의 무한 발행이 불가능한 금 본위제를 바탕으로 했지만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화폐와 자본의 무한 창출이 가능한 달러와 그 달러가 가진 국제 통화의 권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하이에크는 1937년에 발표한 「화폐국가주의와 국제 안정성」이라는 논문에서 자신을 "금 본위제의 굳건한 신봉자"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화폐 발행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면 정부가 권위를 남용하게 되며 이는 통화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사회 자본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통제를 낳고 결국에는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1971년 8월 미국이 달러의 금 본위제를 정식으로 폐지하자 하이에크는 이것이 자유주의 사회에 실패를 초래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는 화폐발행권력을 통제하지 않으면 시장 경제가 멸망하고 모두가 노예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소련의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파시즘을 부정했지만 서방의 케인스주의에도 반기를 들었다. 이 세 가지 이론의 공통점이 바로 금 본위제를 포기했다는 데 있다. (346~348쪽)

 

 

최근 우리나라의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시진핑과 한중 FTA를 체결했다. 점차로 중국과의 대외무역은 늘어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이제는 미국보다는 중국과의 대외무역량이 많기 때문에 중국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책 <G2전쟁-2015~2016 슈퍼 달러의 대반격>은 중국의 정치경제학자 레이쓰하이가 금융의 흐름에 따라 미국이 전세계적으로 패권을 장악해가는 과정과 궁극적으로는 이에 대항해야 할 중국의 자세를 제시했다.

 

경제학 쪽에는 문외한이라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논의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미국은 금본위제의 폐지 이후, 무한으로 찍어낼 수 있게 된 지폐인 '달러'를 국제통화로 세워놓고 환율을 조절하고 달러의 전세계적 흐름을 조절해서 타국의 부를 착취해왔다.

과거 서유럽이 그러했고 이들은 그 과정에서 미국에 대응하기 위해 '유로존'을 만들었으며 최근 미국의 금융 공습은 중국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2015년까지 이에 대응해서 중국내의 화폐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필요할 때마다 달러를 강세로, 그리고 타국의 화폐는 절상을 요구하여 압력을 넣고 자국에 기반이 마련되면 달러를 다시 약세로 만들어 전세계적인 금융의 흐름을 통제하고 그 가운데 이익을 취하는 미국의 그간의 정책들은 사실 '깡패'처럼 보일 정도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서유럽과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겪었고 중국은 과거의 이 역사를 기반으로 해서 위안화를 국제적 통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화폐개혁을 이루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미국은 더 이상 1970년대의 석유파동, 1990년대의 IT 혁명 등으로 자국의 부를 창출한 핵심적 사건이 존재할 수 없고 현재 제조업의 공동화 상태이기 때문에 위안화가 국제 화폐로 급부상하게 되는 것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주장한다.

 

 

세세하게 그래프와 20세기에 전세계적으로 미국이 패권을 장악해나가는 과정을 금융학의 입장에서 재조명하여 설명하는 것이 흥미로웠지만 중국인 특유의 오만함과 자신감이 배어나오는 것은 조금 불편했다. 1980년대에는 일본이, 그리고 이제는 중국이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하나의 국가로 등장하게 되는 시점에서 그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낀 우리나라는 늘상 눈치를 보며 여기저기 빌붙어야 하는 입장이라는 점도 괜시리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달까.

 

 

저자는 국제통화인 달러의 지위를 이용해서 전세계적인 착취를 통해 부를 달성한 미국을 매우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패권국가가 부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그런 식의 무차비한 횡포가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다만 그래도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자유, 민주주의, 평화'라는 허울뿐인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젠틀한 방식의 수탈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옹호하는 것은 아니고, 과거 스페인/포르투갈이나 영국 등의 제국주의 그리고 20세기의 파시스트 국가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과 매우 가깝게 인접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미국이 패권국가의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중국이 종국에 전세계적으로 경제적 부를 달성해서 패권을 휘두를 수 있는 국가의 지위에 올라선다면, 인접한 우리나라가 어떤 방식으로든 크게 휘둘리게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확실해서이다.

 

 

어쨌거나, 이 책은 '미국의 금융 전쟁 도발에 대비한 중국의 대처 자세'라고 요약할 수 있겠지만 그 세세하고 설득력 있는 분석은 중국과 미국 모두를 의식해야 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꼭 필요한 내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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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세계문학을 둘러싼 대논쟁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6
김경연.김용규 엮음 / 현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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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을 말하면서 언급한 '타자'는 반드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잘못된 사고를 하게 만든 동인이나 대상물만 가리키지 않는다. 어쩌면 더 중요하게, 타자란 그것이 있음으로써 그 자리에 서면서 이해와 공감의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를 가리킬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존재로서의 타자보다도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타자를 주목한다는 점에서 '타자화'라는 용어를 재개념화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일한 범주에서 벗어나서 더욱 자유롭고 공정한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볼 방법과 전략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204쪽)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것은 보편이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구체적 실천-자기 제어와 자기 판단-에서 오고 이 제어와 판단을 위한 성찰력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타인의 타자성이 아니라 자기 속의 타자성과 친숙해지고 이 타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개인은 상호주관적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개인의 자기동일성이란 정체성이다. 타자와의 만남이란 그 자체로 자기동일성의 확대이자 그 교정과 갱신이고, 이렇게 갱신된 자기 정체성에는 타자성이 이미 자리한다. 주체는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인간적인 것의 보편적 영역으로 나아간다. 모든 나의 진술의 '나'자리에, 시간이 지나면, '너'와 '우리' 그리고 '그들'이 들어서지 않는가? 나의 진술을 너와 우리와 그들의 진술로 바꾸어 말해도 타당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퇴장 당한다. 예술은 주체의 이 보편화 과정을 매개한다. (259쪽)

 

전공이란 결국 전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전제이지 그 자체로 수호될 만한 가치일 수는 없으며, 언어의 문제도 번역을 통해 해결될 수 없는 무언가에 본질적인 것이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면(다시 말해, 꼭 원문으로 읽어야 비로소 제대로 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외국에 살면서 그쪽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또 그쪽 학술지에 글을 싣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제대로 된 연구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280쪽)

 

근대문학 연구에서 비교 연구 또한 오리엔탈리즘에 가깝다. 영향사와 전파론에 의존하는 비교 연구는 연구자를 보는 쪽의 위치로 특권화하고 스스로 시선의 주체가 됨으로써 근대문학을 타자화한다. 조선의 근대문학과 서구문학을 비교하고 있는 대부분의 근대문학자들은 스스로를 서구적 주체화 동일화하면서 우월한 위치에 서는 사디즘적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 근본에 있어 서구에 대한 노예적 위상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402쪽)

 

언젠가 독문학을 전공한 지인과 '번역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외국문학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가 반영된 타국의 언어를 통하지 않은, 번역이라는 불순물이 포함된 언어로 그 나라의 문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상대방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국문학을 창작해내고 있는 많은 작가들이 외국의 어떤 작가들의 책을 주로 읽고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외국문학을 '번역'을 통해 읽어낸다고 해도, 심지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나라의 문학을 감상할 수 있는 나의 독자로서의

능력과 번역자의 노고가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학문적 관심은 '비교'에서 비롯된다.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같은지를 비교하고 항목에 따라 나누면서 학문 체계가 성립이 된다.

국문학에서 나의 문학에 대한 관심은 시작되었지만, 독문학이나 영문학, 불문학 등 다른 나라의 문학도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렇다면 그 탄생지가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라는 공통범주로 묶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가운데 한국문학의 위치나 입지는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 궁금해졌다. 해마다 10월이 다가오면 노벨문학상을 누가 타는가를 점치고, 아시아권에서 문학상을 타면 '한국은 또 노벨문학상 수상자에서 당분간 제외되겠구나'라며 통탄해하는 목소리의 반복을 보면 정말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이라는 공간으로 나아가면 문학적 가치가 떨어지는가, 라는 의문도 많이 생긴다.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는 문학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을 담고 있다. 그 스펙트럼도 넓고 참여한 필자들의 전공도 다양하다보니 그 광범위한 논의에 압도되어 버리는 부분도 있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쉽지 않은 학술적 논의들을 따라가면서 읽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학을 둘러싼 다양한 고민들을 되짚어보고, 나 또한 '그렇다면 제3세계문학으로서, 동아시아에서도 이중으로 주변화된 문학으로서 한국문학이 나아가야할 길은 무엇일가?'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프레드릭 제임슨, 파스칼 카자노바, 모레티와 같은 영미의 비교문학자들은 철저하게 서구학자의 위치에서 비서구 국가의 문학들을 재조명하고 거대한 '세계문학의 장'이라는 공간에서 이들을 위치시키려고 애쓴다. 대놓고 서구문학의 월함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은 서구 학자들의 학문적 편의를 위해 비서구 문학을 제3세계 문학으로 지명하고 자의적으로 위치를 정해놓는 느낌이 다분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을 주장한 지가 30년이 넘게 흘렀는데도 여전히 대부분의 이론은 식민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특히나 전세계의 시간의 표준을 정하는 '그리니치 자오선'의 개념을 문학의 장에 끌어들여와서 미학적으로 근대적인 형식성을 시간적으로 확보한 공간을 문학에서의 표준적 지표로 정해놓고 중심부 밖의 작가들은 이 안으로 들어와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식의 설명을 접하면 불쾌함까지도 느껴진다.(우리도 오랜 기간동안 글을 써온 전통이 있는데 왜 너네한테 인정을 받아야 해? 하는 식의)

 

 

 

이에 대해서 국내의 학자들은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피상적인 논의의 수준에 머무른다는 느낌도 있다. 결국은 또다른 '보편성'으로의 수렴으로 끝나는 것 같은데, 그 보편이 무엇인지도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세계문학에 논의에 담긴 오리엔탈리즘의 무한 복제라든지, 이를 전복시키려는 주변부들의 노력 조차도 사실은 또다른 열등한 타자를 설정하거나 자기중심주의에 빠지는 자기복제적 오리엔탈리즘이며, 한국이 노벨상에 집착하는 것도 지위획득을 위한 '문화적 컴플렉스'에 근거한 투쟁의 다른 얼굴이라는 지적들은 꽤 뼈아프게 다가온다.

 

사실 가장 흥미로웠던 장은, 너무 솔직하고 직설적이어서 때로는 걱정이 되기도 하는 조영일 평론가의 글이었다. 한국 문단계의 속살을 보아버린 느낌이랄까. 90년대 초반에 일어난 하루키 열풍에 대해서는 짐짓 점잔을 빼며 인스턴트에 가까운 장르문학이라며 무시하던

한국문단계가, 세월이 흐르면서 하루키가 영미문학권에서 인정받고 상을 수상하고 심지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이르자, 생색이라도 내듯이 다시 하루키를 인정해주는 척하는 한 편이 있고, 문학동네는 시대적 흐름을 보는 눈이 있었는지 하루키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윤대녕 작가를 내세우고, 하루키에 대한 특집을 펴내면서 지금은 거의 주류로 자리잡을 정도로 성장했다. (심지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도 문학동네에서 나왔으니 정말 시대적 흐름을 읽는 혜안이라도 그들 내에 있는걸까?)

 

 

 

어쨌거나 한국문학계는 장르 문학을 폄하하고 번역을 창작의 아류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몇몇 필자들은 이 부분을 문제 삼는다. 하루키 현상을 보면, 영미문학을 꾸준히 번역하고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창작의 저력을 보여주는 작가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마지막 장에는 동아시아라는 지형적 공간에서 한국문학이 위치한 특수성, 그리고 제3세계의 여성(서발턴)의 목소리가 문학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작품들을 통해 살피고 있다. 어쩌면 세계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낮은 곳에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윤리적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제목에는 '가장자리'가 들어있다. 중심부가 아니라 가장자리에 한국문학이 속해있지만, 그 중심부로 들어가려는 노력보다는,계속해서 가장자리를 돌면서 또다른 가장자리에 속한 타자들과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국문학계를 풍부하게 일궈나가야 하는 것이 이 책을 쓴 필자들의 문제의식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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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 SF영화로 보는 철학의 모든 것
마크 롤랜즈 지음, 신상규.석기용 옮김 / 책세상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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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인생을 살겠노라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문제다. 저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굳이 이런 종류의 사람이 되려고 하는 데에는 어떤 궁극적인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지 그렇게 살 뿐이다. 자아를 규정하는 게임의 근원에 있는 것은 우리의 이유가 아니라 행위다. 도덕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실천이 있다. (263쪽)

 

많은 SF영화의 주제는 타고나길 낯선 생물 형태, 즉 우리에게 타자가 되는 존재들과의 조우를 다룬다. 리플리의 삶을(아니, 삶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 원조 악당들보다 더 우리에게 낯선 타자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타자와의 조우는 언제나 동시에 우리 자신을 좀 더 면밀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이 된다. 타자성과의 조우는 우리 자신의 정서적이고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윤곽선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어주는 거울로 작용한다. (306쪽)

 

예술 작품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승화하며,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더 고차원적인 것들로 탈바꿈시키는 일과 결부되어 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런 일은 균형 잡힌 방식으로 수행할 필요

성이 있다. 허가가 아니라 금지가 미학적으로 즐거운 인생을 사는 열쇠다. (339쪽)

 

우리는 개인적인 책임, 성적인 책임, 부모의 책임에 관해 거리낌없이 말한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책임인 인식적 책임(epistemic responsibility)에 관해서도 말을 꺼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에 대해서만큼이나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우리의 가치가 멍청한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당신은 파시스트인가? 식민주의자인가? 엘리트주의자? 거만한 놈? 단지 재수없는 놈인가? 물론 내 변명을 좀 하자면 내가 이런 비난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젊었을 때 멍청한 믿음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도 확실하게 그렇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완벽한 인식 기계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중 일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상태가 안 좋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인식적으로 최선을 다하려는 이런 시도가 지금 이 시대에는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에 띄게 결여되어 있다. 대체 어떤 믿음이 멍청한 믿음인지를 내가 아직 말하지 않았음에 주목하자.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건 꽤나 오만한 일일 것이고, 어떻든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 책이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다면, 당신이 스스로 이런 일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멍청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라. 그러면 좀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다.​ (381쪽)

 

 

중학교 때 유난히 SF영화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시험이 끝나면 나는 그 아이의 손에 이끌려 SF영화를 보러 갔다. 그 때 함께 봤던 영화가 <인디팬던스 데이>와 <스타쉽 트루퍼스>였는데, 나는 외계인이 침략하고 이를 지구인들이 구하는 내용의 SF영화가 왜 흥미를 끌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심지어 <스타쉽 트루퍼스>에서 외계인들이 뎅강뎅강 잘려나가는 화면은 끔찍하다못해 토할 것 같았다. 나는 극장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그 잔혹하고 징그러운 영상들을 눈으로는 보고 머리로는 인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이가 들면서, SF영화는 참 이야깃거리가 많은 소재라는 것을 알았다. 과학적으로 영화에 나오는 내용들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건지, 요밀조밀하게 풀어내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도 재미있게 읽었었지만 역시나 SF영화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거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안 것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를 읽은 후였던 것 같다.

 

저자 마크 롤랜즈는 대놓고 자신이 B급 영화일 수도 있는 SF영화의 열혈 팬이라고 말한다. 외계인이나 로봇같은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에게 위협을 가해오고 인간은 그에 맞서는 이런 가장 장르적이고 마니아적인 영화가 꽤나 심오하고 철학적인 논의들을 풍부하게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토탈리콜을 통해 자아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거나, 매트릭스를 통해 나를 둘러싼 세계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인식론적인 고민을 하는 부분은 이미 다른 책들에서도 많이 본 것 같아 패스하고, 6장부터가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웠다.

 

* 만약에 내가 투명인간이 되어 아무도 나를 볼 수도 없고 그러므로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그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면,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할 필요가 있는가?

* 무척이나 지적으로 뛰어난 외계인이 있다고 할 때, 그들이 보기엔 너무 저능하고 미개한 생물체 중 하나로 보이는 지구인을 대상으로 자기네 종족들의 번성을 위해 실험을 한다고 하면 분명히 인간은 분노를 느낀다. 이 예를 동물에게 적용해서 인간이 동물을 대상으로 '종(種) 우월성'이라는 명목하에 자기네의 번성을 위해 실험을 자행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 문화가 상이하다는 이유로 각 문화들마다 옳고 그름을 보류하는 상대주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윤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화해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믿음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죽음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면 어떤 부분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여러가지 예륻 영화에서 가져와 흥미롭게 던져놓고, 대체로 3가지 정도의 관점을 보여주면서 다양하게 생각해보고 그 관점의 한계들을 지적한 후 나름의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는 편이다.

저자 마크 롤랜스는 적재적소에 유머를 배치할만큼 센스도 있지만, 철학을 통해 '도덕적인 의무'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올바른 사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가지 철학적 질문들을 고민하지만, '윤리론적인 질문'에 대해 좀 더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부분들이 가장 흥미롭기도 했다.

 

잘못된 믿음들에 대해 상대적인 관점으로 존중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멍청하다'라고 과감하게 지적하는 저자는, 누구라도 그런 믿음들에 기초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할 수 있으니 끊임없이 반성하고 멍청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라고 말한다.

꽤 윤리적인 철학자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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