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구 재앙 보고서 - 지구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현재.미래, E Travel 1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지금의 삶이 가능하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수렵하여 먹고, 죽은 나무나 우연히 생긴 동굴에서 살며, 변변히 입을 것이 없어 체온 유지를 위한 철새생활을 하는 것을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과학기술의 존재와 효용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미 과학기술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되어 의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 지척에 있다. 아니, 지척이라며 그 거리를 따질 수 없을 정도다. 이런 기술과 인간의 두터운 우정은 우리가 현대의 과학기술의 진보를 특혜가 아닌 당연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가치관 역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귀결은 큰 문제를 감추고 있다.
기술의 발전의 폐해가 환경을 망친 것이라면 그 문제는 환경을 고려한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한 과학기술의 진보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문명의 흐름을 멈추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문제는 모든 것을 기술의 발전이 해결해주리라는 지나친 낙관주의에 있다. 이 기술적 낙관주의는 결국 과학기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지 못하고 반복되는 실수에 대한 책임 전가와 안도만을 보장해 줄 뿐인 것이다. 이 책, <지구 재앙 보고서>(여름언덕. 2007)에서 지구 재앙의 원인을 집어내라면 바로 이것, 우매한 기술적 낙관주의와 그것에 탄력을 얻는 집단이기주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재앙 보고서>에서의 보고서라는 이름값만큼, 이 책은 지구 기후의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현저한 기후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을 찾아가 눈으로 확인한 것과 그곳의 전문가들을 통해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예측 가능한 미래에 대한 연구과정에 대하여 들은 것을 보고서에 옮기고 있다. 또한, 온난화에 대한 책임이 분명한 산업과 정치계를 찾아가 그들의 의견과 실태를 파악하기도 한다. 이것이 이 책의 기술된 지구 재앙에 대한 상반된 의견충돌이다.
일반인들이 기술적 낙관주의자들의 미끼를 물고 지구 온난화에 대한 심각성을 외면하고 있는 와중에 많은 전문가들은 우려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그 이상의 반대파들은 그 비명이 들리지 않게 방음벽을 치고 있었다. 현재의 우리는 후자의 노력의 산물인 방음벽에 갇혀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방음벽을 넘어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옴에도, 봄 같은 겨울과 겨울 같은 봄을 체감하고 매년 여름 갱신되는 최고 기온을 경험하면서도 에어컨을 마련하거나 신기해하며 억지로 무시해 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산화탄소의 증가(다양한 원인에 의한)로 인한 온실효과는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되새기자. 지구는 거대한 온실이 되어 온도를 점점 높여가고 있다. 이로 인해 극지방의 빙하가 점점 녹아가고 해수면은 상승한다. 다소 황당한 영화 ‘일본침몰’과 ‘Tomorrow’에서의 과장된 미래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 불안한 미래에 가장 근접한 지역으로 알래스카와 같이 영구동토의 지역을 꼽을 수 있다. 이곳이 빙하는 녹고 있고, 얼음 쐐기가 지탱하던 영구동토에 균열이 가고 있다. 기적적인 해결책이 없는 한 이런 지역에서 사람이 발을 딛고 살 수 있는 땅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비단 이같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지역만이 문제가 아니다. 불모의 땅덩어리로 인식되는(자원에 대한 인식을 제외하고) 이들 지역은 지구를 지탱하는 축이다. 때문에 이 축이 흔들린다면 이로 인한 간접적 피해는 엄청난 것일 것이다. 지구의 균형이 무너지는 일 아닌가.
둘째, 자연은 그 자체의 활동으로 인해 오염되기도 한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산업화로 인한 대기오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혼탁한 자취가 화산폭발 등의 자연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니 말이다. 또한, 진화론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생물의 종은 자연의 흐름에 의해 멸종과 변이를 거듭한다. 그렇게 지구는 변화해 왔다. 이러한 인식에 비춰 일부 학자들은 인간에 의한 환경오염을 극히 정상적인 자연의 흐름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난화 현상 등의 기후의 변화와 생물의 멸종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지구에 ‘인위적 강제력’이 되어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또한 그 변화는 지구의 나이에 비해 극히 짧은 시간에 일어나고 있다. 때문에 이것을 자연의 흐름으로 보는 시각은 비겁한 낙관론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자연의 흐름에 따라 한정된 장소에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종은 인간이 만든 비닐하우스에서 갈 곳이 없다. 즉, 역에서 역으로 철길이 놓이기도 전에 종착역을 맞은 것이다. 그리고 그 철길을 끊은 것이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며 하위 종(만물의 영장이라는 기준에서)의 멸종에 여유부릴 때가 아니다. 다음 멸종의 차례에 인간의 이름이 올라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도 뭣도 아닌 세입자일 뿐이다. 세입자가 오래도록 싼 값에 편안히 살려면 집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없다. 바로 지구하는 주인의 비위를 말이다.
셋째로 이미 인간은 파괴된 자연에 버림받은 경험이 있다. 사라진 문명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 보다 낮은 네덜란드의 경우, 일부에서 ‘물에 뜨는 집’과 같은 미비하지만 현실적인 대안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 ‘물에 뜨는 집’이 시사하는 바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의 그들의 대응 방식과 그것을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콘크리트 구조물을 쌓아올려서 국토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이 안전하리라 예상하며 쌓아 올린 제방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기후에 변화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인간이 주도적으로 이끈 지구 재앙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전 인류에 있다. 먼저 ‘석탄을 때운 너희가 져라 아니, 한참 석탄을 때고 있는 너희가 져라’하며 책임 소재 운운할 때가 아니란 것이다. 그만큼 기후의 변화는 시급한 당면과제이다. 또한, 재앙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적 차원의 공동 노력은 집단이기주의 앞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교토의정서’에서 합치된 뜻이 이산화탄소 생산량의 부동의 1위, 미국이 발을 빼면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데이터와 연구 조작, 그리고 고집불통으로 전 인류적인 노력에 제동을 걸었다. 이래서는 매년 무서울 정도의 경제성장 이상의 이산화탄소의 생산량을 늘리고 있는 중국의 각성을 기대할 수 없다. 프론티어 정신과 평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나라 아니었던가.
물론 미국 내에서 노력의 성과를 나타내는 몇 몇 ‘주’가 있다. 또한 이러한 노력에 동참하는 ‘주’가 늘어나고 있으며, 그 목표와 대안도 구체적인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인류 모두의 책임이라는 의식에서 봤을 때, 아래에서 부터의, 개개인에서 부터의 행동 개시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의 결실을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 국가의 정책이다. 수많은 사람이 생활 패턴을 바꿔가면서 전등을 교체하고 쓰레기를 재활용하며 행한 십여 년의 노력이 이에 대한 무관심 혹은 반대되는 정책으로 인한 단 몇 시간의 방탕함으로 무의미해 지기 때문이다. 즉, 지구 재앙에 대한 노력은 국가적 차원의 협력이 필수라는 것이다.
92년 ‘내일은 늦으리'라는 슬로건으로 시작된 환경콘서트를 기억하고 있다. 물론 당시 좋아했던 가수의 곡이 담긴 앨범으로 인한 다소 불순한 기억이다. 듣기로는 작년엔 이름을 바꿔 계속되고 있다는 데, 솔직히 그것이 맞는지조차 관심이 없다. 만약 이것이 환경에 대한 관심이 턱없이 부족한 개인의 문제라면 나 몰라라 하는 모든 개인의 문제가 된다. 나아가 그 무관심이 모인, 또는 무관심을 조장하는 정부의 문제이고 국가 간의 문제이다. 결국, 지구에 세를 내어 사는 전 인류의 책임이다.
내일이면 늦는다는 말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늦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미 저지른 무책임한 실수의 대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치룰 수밖에 없다. 여태껏 지구의 재앙이 후대의 고통일 것이라 안심해 왔을지도 모를 현재의 우리가 치룰 밀린 월세인 것이다. 때문에 예견된 지구 재앙의 보고서는 명세서가 되어 다가왔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망쳐놓은 것이 얼마이고 미래에 그것에 얼마만큼의 이지가 붙을지 대략 계산된 명세서 말이다.
갚을 수 없다고 해서 야반도주 할 수도 없고, 개인파산을 신청해 타인의 사회에 책임을 나눌 수도 없는 빚더미, 이제 갚아나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