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요사키와 트럼프의 부자 - 백만장자와 억만장자가 말하는 부의 공식
로버트 기요사키 외 지음, 김재영 외 옮김 / 리더스북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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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따라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 행복의 실현을 꿈꾸는 20-30대의 직장인의 예를 들어 보자. 그들은 동년배의 전문직 종사자들이나 개인 사업자와 기업가, 그리고 투자자들과 비교해 사회구성원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요건은 일정한 급여 안에서 가계를 꾸린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금융상품이 다양하고 모두가 부동산의 가치에 대해 목청을 높이고 있는 등 얼마간의 급여를 운용하는 일조차 사뭇 복잡해 고교시절 적분을 처음 접했을 때의 위압감을 느끼기도 한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는 개인의 방식은 크게 다르다. 재테크 노하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가. 또한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들 간의 배경에도 큰 차이가 있어 결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으니, 그들 중 일부는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글의 첫 문장이 행복의 기준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야기를 결국 물질적인 행복에 국한시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돈이 행복을 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투자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로버트 기요사키와 도널드 드럼프의 신작 <부자>(리더스북. 2007)에 대한 글에 행복 운운하는 것이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암암리에 지고 가야가는 마음의 짐, 즉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고려하면 행복과 돈이 등호로 성립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영향인자임은 틀림없다.

책의 서문에서부터 도입부라고 하기엔 상당한 분량이 왜 부자가 되어야하느냐에 할애되어 있다. 요컨대, 부자가 된다고 행복해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불행하리라는 분명한 사실이 부자가 되어야함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가난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부자가 되어야한다는 말은 억지가 아닌가? 가난만을 피해서 적당한 부를 누리면 되지 않은가? 이에 대해 이 유명한 두 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부자가 아닌 당신은 곧 가난해 질 것이라고 말이다.

왜 그런가? 왜 부자가 되지 않으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최소한의 삶에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고 그 안에서 돈과 거리가 먼 행복을 찾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이것에 대해 두 저자는 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사회를 이끌어 가는 국가는 근면하게 일하고 이를 통해 얻은 일차적은 부로 정상적인 삶을 누리려는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이미 국가 부채는 감당키 어려울 지경이고 이는 곧, 은퇴 후 노후를 보장하고자 생겨난 연금과 복지제도의 붕괴를 예측하게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현재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부의 금융가치가 폭락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백반 한 끼에 5천 원 정도의 가치를 기준으로 모아온 개인의 금융자산에는 소폭 상승하거나 아예 변화가 없는데 백반 한 끼가 5만원 아니 10만원이 된다고 생각해보자. 식빵 한 봉지를 사기위해 수레에 현금을 실어 가야했다는 과거의 재앙이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상상이 아니다. 경악할만한 코앞의 미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그들이 예측하는 미래와 그 기반인 과거는 미국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제1의 경제대국이 무너지면 그 여파가 우리나라에 미칠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우리의 정치, 경제적 노선은 이미 그들의 것을 그대로 좇고 있다. 이제는 한미FTA로 인해 단일 시장의 통합이 이뤄질 판 아닌가. 때문에 그들이 지적하는 국가의 위기와 개인의 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극히 부정적인 국가와 개인의 미래를 지루하게 확인하고 나면 두 부자의 직접적인 조언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느 곳의 부동산을 사라. 어떤 종목의 주식을 사서 어느 시기에 되팔라는 조언이 아니다.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느냐를 절실히 의식한 후에 금융IQ를 높여 부자가 되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 상당히 막연한 이야기이다. 저변 지식이 아주 없는 사람에게 깨닫고 부자가 되라니 일견 방만한 부자들의 자랑쯤으로 들려 거북하기도 하다. 그렇다. 판단은 두 가지이다. 이들의 조언이 막연한 자랑 질로 들릴 수도 있는 반면 세세한 투자전략을 찾아낼 독자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익을 실현하는 방법을 접할 수가 있다. 때문에 투자와 투기의 구분이 모호하다. 우연히 혹은 치밀하게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시세 차익을 누릴 수 있는 부동산 정보와 유망한 투자 종목에 대한 권고들은 이 책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런 최신의 정보는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 빠르다. 하지만 이러한 실시간의 정보는 지식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두 저자가 말하는 금융IQ와도 거리가 있다. 그들의 말하는 IQ는 관심에서 출발한 교육을 통한 지식이다. 시류를 탄 자본의 흐름에 동승하는 정보를 얻는 것은 투기를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와는 달리 그 속내를 파악하고 자신만의 전략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지식이다. 또한 지식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른다. 우리가 한국사와 세계사를 배우는 것처럼 금융IQ 역시 역사를 배우는 것이 매우 용이하다.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언급대로 이 책은 그렇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국가를 바꾸려는 실질적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다. 더불어 매달 꼬박꼬박 바친 국민연금이 노후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비약에 불과한 두 부자의 억지이다. 다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개인주의적 가치관일 수 있지만 세상을 바꾸기보다 그에 맞춰 부자가 되는 지식을 배우라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할 것이 분명한 현실에서 하루라도 빨리 부자가 되라는 것, 그리하여 가난에 개인의 행복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당연하지만 인정하기 어려운 논제이다.

당신은 지금 부자인가? 아니면 앞으로 부자가 되려고 하는가? 이 책에 따르면 이미 현실은 이 두 부류에게만 안정적인 미래를 약속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책장을 덮거나 부자가 되거나,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있다. 자 이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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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 그림으로 읽는 세상 '근대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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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아트북스. 2007)의 제목에서의 ‘거닐다’라는 표현이 눈길을 사로잡아 생각의 길로 이끈다. 작가는 말머리에서 그림을 읽는다며, 보는 것이 아닌 읽는 것의 의미를 풀어내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제목 역시 그림이 나무가되어 촘촘히 박힌 숲을 거닐며 단순히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풍경을 읽어내는 상상을 하게 한다.

산책은 식후의 더부룩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혹은 열띤 토론에 지친 머리를 쉬기 위해서 등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시도된다. 우리는 그 산책길에서 낯익은 혹은 낯선 풍경을 눈으로 보며 걸음을 옮기는데 그치기도 하지만 그 길에서 생각의 물꼬를 트기도 한다. 언제나 같은 귀갓길의 뻔한 풍경에서도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어, 막혔던 생각의 꼬리를 잡아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매일 걷는 산책로와는 달리 그림의 숲은 여전히 낯선 길이어서 그것을 읽는다는데 모종의 거부감이 든다. 몇 알지 못하는 화가들을 시대별 파별로 인덱스 붙이고 그에 따른 구구절절한 부연설명을 듣는 것에 대한 거부감 말이다. 그에 반해, 그림에 시선을 멈추고 몽상에 빠지는 읽기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그것은 동네 시장 통이나 출근길 콩나물시루 지하철에서 읽어 내는 생각과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게 만족하면 될 것인데 굳이 그림을 파고들어 읽는 것은 왜일까. 앞서 말한 거부감을 갖고 있음에도 작가와 그의 배경을 좀더 알고자 하는 욕구가 점점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과 생각으로 읽는 경계에서 답답해하는 것은 무슨 이유란 말인가.

미숙한 시각을 가진 감상자인 내게 이 질문에 답할 길은 요원하지만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갈증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저 섬세하다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는 읽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 마치 소설의 줄거리만 요약해서 읽은 것 같은 그림보기가 야기한 갈증. 실제로 평론가의 평을 접하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그림의 구석이 눈에 띄고 부분만 보았던 전체의 그림이 눈에 들어오니 그 갈증은 필연적인 욕구인지도 모른다. 학창시설 문학책의 시 마다 빼곡히 필기와 줄치기를 해야 했던 거북함을 넘어선 갈증. 때문에 그림을 읽고 싶어진다.

표현주의 화가라는 제목으로 묶이는 클림트와 뭉크의 그림에서 공통점을 찾기 힘든 것처럼 이 책에 두 줄기인 인상파와 라파엘전파의 차이를 그림만으로 분류하기는 힘들어 보인다.(이 무지함에 코웃음 치지 말아주시길) 이것이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의 구분과 같이 상이한 색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라면 인상파와 라파엘전파의 그림도 디테일만으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는 이미지가 서로를 넘나드는 경우도 있으니 그 구분은 더더욱 힘들어 보인다.

작가의 견해에 따른 이 다소 복잡한 구분은 ‘상징’의 유무로 나눌 수 있다. 대표적인 화가 마네의 그림으로 살펴본 인상파의 그림은 예술을 ‘가상’의 무대로 인식해 라파엘전파에 비해 자유로운 형식을 갖는다. 즉, 흔히 인상파의 ‘인상’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면 인상을 심어주는 매개로 상징물을 떠올리기 쉬운데 그와 반대로 인상파의 그림은 종교적, 도덕적으로 고정된 특정 의미의 상징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사견을 붙이자면 소설 <다 빈치 코드>에서 명화가 품고 있는 상징물이 종교적으로 해석되고 그것이 음모론을 부채질한 것과 반대되는 경우라고 보면 된다. 오히려 인상파의 그림은 기존에 세습되어오는 상징을 패러디하는 유연성을 보이기도 한다. 덧붙여서 이것은 사물을 자연 그대로 묘사한 것인지, 특징화된 주관적 표현으로 묘사된 것인지의 구분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 차이가 인상파와 라파엘전파와의 경계를 짓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반면 라파엘전파의 그림에서는 다소 고정적인 상징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술을 현실내지는 그것을 넘어선 진리의 척도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이것하면 무엇을 뜻한다는 자연스러운 연상이 가능한 연결고리에 집착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적인 차이로 근대의 두 주류를 파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그림의 의미를 어떤 위치에서 파악하느냐에 따라 모순 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길을 가는 두 갈래의 그림들이 세상을 어떻게 그려내는 지이고 우리가 그 그림에서 어떻게 세상을 읽어낼 것인 지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의 키워드이다.

요즘 들어 현대미술이 각광을 받는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세상과 가까운 미술. 그것은 회화의 형식을 넘어서 자유롭게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담아내는 것이다. 근대 미술 역시 그 당시의 사상과 시대를 담고 있다. 그 표현이 서로 다른 것은 세상을 읽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이냐는 것에 정답이 없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미술이던 현대의 미술이던 또는 인상파던 라파엘전파던 우리가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을 읽게 해준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는 듯 보인다.

그림으로 세상을 훔쳐보는 재미. 이 즐거운 갈증은 길을 잃기 십상인 그림의 숲을 탐험하는데 용기를 불어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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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풍경 1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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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나이가 되었다. 스스로를 어른이라 생각하기에 이제 타인이 된 청소년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때, 청소년에 속해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에, 그 단어는 어딘가 어색했다. 타인, 그것도 소위 기성세대에 의해 지칭되는 소속에 대한 단어로 청소년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전적 의미는 소년과 청년을 아우르는 말이라고 하니 여전히 그것이 규정짓는 시기에 속해 있지만 그 단어가 주는 상반된 이미지를 생각하면 이제 내게 청소년이라는 소속감은 그리움의 대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청소년이라는 단어의 상반된 어감이 무엇인고? 하니, 쉽게 흥분하고 좌절했던 사춘기 시절의 미숙한 추억이 하나이고, 색다른 것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한 무한한 가능성의 충만함이 또 다른 하나이다. 일순간 떠오른 기발한 생각에 들뜨기도 하고, 사회를 보는 시각도 자못 날카로워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 때. 하지만 이내 그런 관념은 가족과 학교 등 조직의 균형에 막혀 좌절감만 맛보게 했었다. 조금은 과장된 결론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어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나는 패배감에 휩싸인 사춘기 시절의 추억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운 그저 그런 인간이 돼버린 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그 때 어떤 행동을 취했더라면 이 비겁한 자격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또는 바른 목소리를 내는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적어도 사춘기 시절의 기억을 당당히 회상할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을 이 책, <바다의 풍경>(양철북. 2007)에서 발견한 기분이다.

바다. 그것도 공업의 항구가 아닌 자연의 형태를 가진 바다를 면한 섬마을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청소년기의 성장과정과 그 반대급부로 작용하는 기성세대의 장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것은 비단 청소년기의 성장 통이 아닌,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와 환경파괴와 집단이기주의 등의 세계화 추세의 문제 등을 청소년의 다듬어지지 않은 시각을 기성세대의 비겁한 현실안주에 대비해 나타내고 있기에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학교를 관리의 장으로 바라보는 자들에 의해 문제아의 꼬리표를 단 소키치는 의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과거를 쫓기 위해 등교거부 중에 있다. 물론 소키치의 등교 거부의 이유가 아버지의 자취 찾기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막연히 느껴왔던 학교교육의 한계와 기성세대와의 대화단절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광범위한 교육과정은 문제의식을 갖기도 전에 미리 정해진 결론은 내린다. 소키치가 사는 마을은 농부와 어부라는 직업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 멸종의 위기를 맞을 지도 모른다. 허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 내용은 당면한 현실조차 외면하고 있다.

공교육의 한계와 그로 인한 폐해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에 대해 우리 사회는 어떠한 결론을 내놓고 있는가. 변별력을 갖춘 시험제도, 사교육에 저항한 내신 위주의 입시제도 등이 근본적인 해결책일 될 수 없음은 이미 명백하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허울일 뿐 그것은 결국 대입을 위한 준비과정에 지나지 않고 그에 연계된 대학교육은 상아탑의 그것이 아닌 연봉 높은 직장에 맞춰가고 있다. 분명 이것을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하지만 현실을 감안한 느린 변화가 과연 가능한 일인지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는 것이 지금의 세태임은 분명해 보인다.

사춘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했다. 때문에 어른들은 그들의 치열한 고민과 방황을 어린 시절의 치기로 치부한다. 철이 들면 그 시절의 방황은 시간의 낭비로 자신의 발목을 잡을 뿐이라는 설명을 덧붙여서 말이다. 또한 이것이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어른들의 변명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염된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이제 더 이상 사춘기 시절의 긍정적인 방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필연적으로 벽에 부딪칠 것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성세대의 잘못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함을 몸소 느끼면서도 그것에 대해 항거하려 하지 않고 외면하는데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선생님이나 가족에게 사회와 학교에서 느낀 문제점을 제시 해봐도 수용은커녕 비웃음만 살뿐이 아닌가.

소키치와 그의 친구들이 겪고 있는 방황도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부러웠던 것은 내게는 그 정도의 생산적인 비판을 내비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요즘의 아이들이 나약하고 버릇이 없다고 한다. 분명 이것엔 세대의 변화에 따른 문제의식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예전과 다르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히는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비하시키는 푸념일 수도 있다. 이래서는 청소년과 부모세대 간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다시 바다로 돌아가 소키치가 발견한 사회의 이면을 살펴보자. 학교에 대한 막연한 문제의식과 아버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한 소키치의 학교를 떠난 사회에서의 산교육은 그에게 여태껏 알지 못했던 문제들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몰락해 가는 1차 산업, 직업과 부의 불균형, 그리고 환경파괴와 생산제일주의자들의 만행까지, 그것들은 그가 교과서를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혹은 어렴풋이 알 수는 있지만 실체를 인식하지는 못했던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길러준다.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자신의 내면으로 번져 단절된 관계에 갇혀있었던 가족과 친구들과의 대화의 물꼬를 터주고 나아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한다. 더불어 타인의 상처를 감싸 안을 줄 아는 사나이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소키치의 모험(가히 그리 부를만하다)은 바다를 배경으로 한다. 그가 뛰어나가는 길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지만 바다는 넓어서 어지간한 속도로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달음치지 않는다면 바다는 언제나 뒤처지지 않고 소키치를 감싸 안는다. 또한 그가 보는 태양은 바다에서 고개를 내밀고 숙인다. 어쩌면 바다의 풍경은 변하지 않는 가치인지도 모른다.

소키치의 치열한 방황은 이 책에서 끝을 맺지는 않는, 진행형에 있다. 그와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조차 혼탁한 세상에서 소키치가 찾는 올바른 길이란 보일 듯 말 듯 그를 애태우며 평생 그 뒤를 좇아 달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내닫는 길은 아스팔트가 되었다 흙길이 되었다 하며 뒤로 물러나 그를 지치게 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뛸지를 종잡을 수 없게 되기도 할 테고 사뿐히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물도 산재해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서의 뜀박질은 결국 바다의 풍경에 녹아나게 된다. 소키치. 사춘기의 실패한 추억의 청소년기가 아닌 청년까지 아우르는 당당한 청소년기의 그가 바다의 풍경을 잊지 않고 언제까지 달려 나가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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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윌리엄 케네디 지음, 장영희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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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망자’에서 해리슨 포드는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벗기 위해 총알을 피하고 두뇌를 회전시키며 관객의 흥미와 긴장을 유발시킨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도망은 그 본질에서 조금 엇나간 것이 아닌가 싶다. 극에서의 도망자는 권위와 안정을 누리는 삶에서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추락한 후 예전의 영광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시 말해 그의 도망은 처한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옮겨가는 과정이 아닌 같은 현실로의 회귀인 동시에 해피엔드 위한 고난의 여정일 뿐인 것이다. 만약 도망자의 해리슨 포드가 짊어진 죄가 누명이 아니었다면, 그의 손으로 아내를 죽인 것이라면 어땠을까?

그런 의미에서 여기, 진정한 의미의 도망자 혹은 방랑자가 있다. 바로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지식의날개. 2007)의 프랜시스이다. 소설 속에 흩어진 프랜시스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인생을 발견하게 된다. 우발적인 살인으로 시작된 도피는 사회의 바닥을 경험하게 했고, 그 바닥의 삶은 그에게 또 다른 범죄의 여지를 마련에 주며 도망자의 삶에 익숙해지게 한다. 때문에 돌아갈 곳을 지척에 두고도 주위를 맴돈다. 이미 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택한 도망자의 삶이 자신의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 탓이리라.

촉망받는 야구선수의 어깨로 던진 돌이 사람을 죽이고, 갓 태어난 자식을 자신의 실수로 잃고 자책하는 프랜시스. 사회의 바닥, 아메리칸 드림을 비웃는 처참한 부랑자의 삶에서 살기위해 타인을 죽이는 프랜시스. 살인의 죄는 그렇게 그를 도망치게 하는 무거운 죄의식이었지만 결국 생존을 위한 자기변명으로 변질된다. 누군가 그를 아는 사람, 그의 영광스러운 삶이 아닌 부랑자의 삶을 아는 사람에게 그에 대해 묻는다면 열이면 열 ‘그는 알코올중독 인간쓰레기일 뿐이라고, 비겁한 도망자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당신은 그런 그를 동정할 것인가. 아니면 진한 욕설로 힐난할 것인가. 소설을 읽는 동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잠시 유보하도록 하자.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 그 허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리에게 프랜시스와 그의 친구들이 배회하는 뉴욕 주의 올버니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알코올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궁리를 할 수 없는 우리의 주인공 프랜시스와 그에게 사랑을 느끼는 헬렌,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루디와 수많은 부랑자들에게 'I love NY'이란 말이 새겨진 티셔츠는 어떻게 보였을까. 아마도 프랜시스는 비웃으며, 헬렌은 그리워하며, 루디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말을 내뱉으며 그것을 바라봤을 것이다.

이렇게 작가, 윌리엄 케네디가 담고 있는 올버니라는 도시는 찬란한 빛을 잃은 아니, 애초부터 그런 빛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황량하게 그려지고 있다.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현실. 살기위한 죽음이 있고, 자살을 생각할 여유조차 사치스러운 이 곳, 올버니. 적어도 프랜시스들의 일상에 비친 올버니는 한없이 잔인한 곳이다. 그렇다면 그 잔인한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이 살길이 아닐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 먹을 것, 걸칠 것, 잠잘 것을 구걸하지 않는 일반적인 삶을 살 수도 있지만 정작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미 익숙해진 부랑자의 하루. 한 달 뒤를, 몇 년 후의 미래를 걱정하기에는 30분 뒤의 현실이 문제인 하루치의 삶. 그들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는가. 이 단순한 질문을 구체화해서 개개인에 맞춰 풀어본다면 다양한 목표로 대답할 수 있다. 특정한 대학에 가기위해 학교에 다니고, 번듯한 직장을 잡기 위해 도서관을 오가며 나아가 결혼을 그리고 그이후의 미래를 설계하며 대답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대답이 최초의 단순한 질문에 답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무엇을 바라보며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거추장스러운 조건만 내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30분 뒤의 현실조차 고민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조금 앞의 프랜시스에 대해 유보한 대답으로 돌아가 보자. 또한 도망이라는 의미도 다시 생각해보자. 알코올중독에 살인자이며 타인에게 냉정한 프랜시스. 그를 동정하거나 비웃을 수는 없다. 씨를 뿌리며 허락하지 않아도 보도블록을 비집고 올라선 엉겅퀴 꽃(원제 Ironweed의 정확한 이미지는 아니지만)처럼 프랜시스의 인생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치열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더불어 그를 비겁하다 비난할 수도 없다. 가족을 등지고 도망쳤지만 그는 방랑길에서 만난 헬렌에게 그리고 그리운 친구들에게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결국 그의 도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요, 죄에 대한 도피였지만 헬렌과 루디 등에게는 귀향의 의미가 된다. 그는 언제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억새풀이 되었든, 엉겅퀴 꽃이 되었든 그것은 자연의 들에 모였을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황폐한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듬성듬성 뿌리를 박고 피어난다면 인상을 찌푸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의 본질인 생명력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그것에서 끈질기도록 팽팽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때문에 프랜시스들의 일상은 더러운 우물에서도 빛이 난다. 아름답다는 표현에는 가당치 않을지 몰라도 나약하고 무의미하지는 않다.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도 돌아갈 곳을 찾아낸 프랜시스. 헬렌과 루디를 잃은 그는 돌아온 탕아가 되어 가족에게로 돌아온다. 아니, ‘돌아온’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돌아갈 사람을 잃고, 또한 돌아갈 수 없는 죄를 반복하고 도망친 곳이 가족이었을 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도피의 시작과 끝이 겹치는 원이 아닌 끝없이 뻗는 직선을 보게 된다. 프랜시스가 여전히 도망치고 있는 길이 놓인 직선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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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재앙 보고서 - 지구 기후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현재.미래, E Travel 1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이섬민 옮김 / 여름언덕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지금의 삶이 가능하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수렵하여 먹고, 죽은 나무나 우연히 생긴 동굴에서 살며, 변변히 입을 것이 없어 체온 유지를 위한 철새생활을 하는 것을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과학기술의 존재와 효용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미 과학기술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되어 의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 지척에 있다. 아니, 지척이라며 그 거리를 따질 수 없을 정도다. 이런 기술과 인간의 두터운 우정은 우리가 현대의 과학기술의 진보를 특혜가 아닌 당연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가치관 역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귀결은 큰 문제를 감추고 있다.
 
기술의 발전의 폐해가 환경을 망친 것이라면 그 문제는 환경을 고려한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한 과학기술의 진보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문명의 흐름을 멈추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문제는 모든 것을 기술의 발전이 해결해주리라는 지나친 낙관주의에 있다. 이 기술적 낙관주의는 결국 과학기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지 못하고 반복되는 실수에 대한 책임 전가와 안도만을 보장해 줄 뿐인 것이다. 이 책, <지구 재앙 보고서>(여름언덕. 2007)에서 지구 재앙의 원인을 집어내라면 바로 이것, 우매한 기술적 낙관주의와 그것에 탄력을 얻는 집단이기주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재앙 보고서>에서의 보고서라는 이름값만큼, 이 책은 지구 기후의 변화와 온난화의 과거, 현재, 미래를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현저한 기후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을 찾아가 눈으로 확인한 것과 그곳의 전문가들을 통해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예측 가능한 미래에 대한 연구과정에 대하여 들은 것을 보고서에 옮기고 있다. 또한, 온난화에 대한 책임이 분명한 산업과 정치계를 찾아가 그들의 의견과 실태를 파악하기도 한다. 이것이 이 책의 기술된 지구 재앙에 대한 상반된 의견충돌이다.
 
일반인들이 기술적 낙관주의자들의 미끼를 물고 지구 온난화에 대한 심각성을 외면하고 있는 와중에 많은 전문가들은 우려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그 이상의 반대파들은 그 비명이 들리지 않게 방음벽을 치고 있었다. 현재의 우리는 후자의 노력의 산물인 방음벽에 갇혀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방음벽을 넘어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옴에도, 봄 같은 겨울과 겨울 같은 봄을 체감하고 매년 여름 갱신되는 최고 기온을 경험하면서도 에어컨을 마련하거나 신기해하며 억지로 무시해 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산화탄소의 증가(다양한 원인에 의한)로 인한 온실효과는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되새기자. 지구는 거대한 온실이 되어 온도를 점점 높여가고 있다. 이로 인해 극지방의 빙하가 점점 녹아가고 해수면은 상승한다. 다소 황당한 영화 ‘일본침몰’과 ‘Tomorrow’에서의 과장된 미래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 불안한 미래에 가장 근접한 지역으로 알래스카와 같이 영구동토의 지역을 꼽을 수 있다. 이곳이 빙하는 녹고 있고, 얼음 쐐기가 지탱하던 영구동토에 균열이 가고 있다. 기적적인 해결책이 없는 한 이런 지역에서 사람이 발을 딛고 살 수 있는 땅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비단 이같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지역만이 문제가 아니다. 불모의 땅덩어리로 인식되는(자원에 대한 인식을 제외하고) 이들 지역은 지구를 지탱하는 축이다. 때문에 이 축이 흔들린다면 이로 인한 간접적 피해는 엄청난 것일 것이다. 지구의 균형이 무너지는 일 아닌가.
 
둘째, 자연은 그 자체의 활동으로 인해 오염되기도 한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산업화로 인한 대기오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혼탁한 자취가 화산폭발 등의 자연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니 말이다. 또한, 진화론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생물의 종은 자연의 흐름에 의해 멸종과 변이를 거듭한다. 그렇게 지구는 변화해 왔다. 이러한 인식에 비춰 일부 학자들은 인간에 의한 환경오염을 극히 정상적인 자연의 흐름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난화 현상 등의 기후의 변화와 생물의 멸종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지구에 ‘인위적 강제력’이 되어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또한 그 변화는 지구의 나이에 비해 극히 짧은 시간에 일어나고 있다. 때문에 이것을 자연의 흐름으로 보는 시각은 비겁한 낙관론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자연의 흐름에 따라 한정된 장소에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종은 인간이 만든 비닐하우스에서 갈 곳이 없다. 즉, 역에서 역으로 철길이 놓이기도 전에 종착역을 맞은 것이다. 그리고 그 철길을 끊은 것이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며 하위 종(만물의 영장이라는 기준에서)의 멸종에 여유부릴 때가 아니다. 다음 멸종의 차례에 인간의 이름이 올라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도 뭣도 아닌 세입자일 뿐이다. 세입자가 오래도록 싼 값에 편안히 살려면 집주인의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없다. 바로 지구하는 주인의 비위를 말이다.
 
셋째로 이미 인간은 파괴된 자연에 버림받은 경험이 있다. 사라진 문명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 보다 낮은 네덜란드의 경우, 일부에서 ‘물에 뜨는 집’과 같은 미비하지만 현실적인 대안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 ‘물에 뜨는 집’이 시사하는 바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의 그들의 대응 방식과 그것을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콘크리트 구조물을 쌓아올려서 국토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이 안전하리라 예상하며 쌓아 올린 제방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기후에 변화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인간이 주도적으로 이끈 지구 재앙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전 인류에 있다. 먼저 ‘석탄을 때운 너희가 져라 아니, 한참 석탄을 때고 있는 너희가 져라’하며 책임 소재 운운할 때가 아니란 것이다. 그만큼 기후의 변화는 시급한 당면과제이다. 또한, 재앙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적 차원의 공동 노력은 집단이기주의 앞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교토의정서’에서 합치된 뜻이 이산화탄소 생산량의 부동의 1위, 미국이 발을 빼면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데이터와 연구 조작, 그리고 고집불통으로 전 인류적인 노력에 제동을 걸었다. 이래서는 매년 무서울 정도의 경제성장 이상의 이산화탄소의 생산량을 늘리고 있는 중국의 각성을 기대할 수 없다. 프론티어 정신과 평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나라 아니었던가.
 
물론 미국 내에서 노력의 성과를 나타내는 몇 몇 ‘주’가 있다. 또한 이러한 노력에 동참하는 ‘주’가 늘어나고 있으며, 그 목표와 대안도 구체적인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인류 모두의 책임이라는 의식에서 봤을 때, 아래에서 부터의, 개개인에서 부터의 행동 개시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의 결실을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 국가의 정책이다. 수많은 사람이 생활 패턴을 바꿔가면서 전등을 교체하고 쓰레기를 재활용하며 행한 십여 년의 노력이 이에 대한 무관심 혹은 반대되는 정책으로 인한 단 몇 시간의 방탕함으로 무의미해 지기 때문이다. 즉, 지구 재앙에 대한 노력은 국가적 차원의 협력이 필수라는 것이다.
 
92년 ‘내일은 늦으리'라는 슬로건으로 시작된 환경콘서트를 기억하고 있다. 물론 당시 좋아했던 가수의 곡이 담긴 앨범으로 인한 다소 불순한 기억이다. 듣기로는 작년엔 이름을 바꿔 계속되고 있다는 데, 솔직히 그것이 맞는지조차 관심이 없다. 만약 이것이 환경에 대한 관심이 턱없이 부족한 개인의 문제라면 나 몰라라 하는 모든 개인의 문제가 된다. 나아가 그 무관심이 모인, 또는 무관심을 조장하는 정부의 문제이고 국가 간의 문제이다. 결국, 지구에 세를 내어 사는 전 인류의 책임이다.
 
내일이면 늦는다는 말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늦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미 저지른 무책임한 실수의 대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치룰 수밖에 없다. 여태껏 지구의 재앙이 후대의 고통일 것이라 안심해 왔을지도 모를 현재의 우리가 치룰 밀린 월세인 것이다. 때문에 예견된 지구 재앙의 보고서는 명세서가 되어 다가왔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망쳐놓은 것이 얼마이고 미래에 그것에 얼마만큼의 이지가 붙을지 대략 계산된 명세서 말이다.

갚을 수 없다고 해서 야반도주 할 수도 없고, 개인파산을 신청해 타인의 사회에 책임을 나눌 수도 없는 빚더미, 이제 갚아나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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