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윌리엄 케네디 지음, 장영희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영화 ‘도망자’에서 해리슨 포드는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벗기 위해 총알을 피하고 두뇌를 회전시키며 관객의 흥미와 긴장을 유발시킨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도망은 그 본질에서 조금 엇나간 것이 아닌가 싶다. 극에서의 도망자는 권위와 안정을 누리는 삶에서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추락한 후 예전의 영광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시 말해 그의 도망은 처한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옮겨가는 과정이 아닌 같은 현실로의 회귀인 동시에 해피엔드 위한 고난의 여정일 뿐인 것이다. 만약 도망자의 해리슨 포드가 짊어진 죄가 누명이 아니었다면, 그의 손으로 아내를 죽인 것이라면 어땠을까?

그런 의미에서 여기, 진정한 의미의 도망자 혹은 방랑자가 있다. 바로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지식의날개. 2007)의 프랜시스이다. 소설 속에 흩어진 프랜시스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인생을 발견하게 된다. 우발적인 살인으로 시작된 도피는 사회의 바닥을 경험하게 했고, 그 바닥의 삶은 그에게 또 다른 범죄의 여지를 마련에 주며 도망자의 삶에 익숙해지게 한다. 때문에 돌아갈 곳을 지척에 두고도 주위를 맴돈다. 이미 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택한 도망자의 삶이 자신의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 탓이리라.

촉망받는 야구선수의 어깨로 던진 돌이 사람을 죽이고, 갓 태어난 자식을 자신의 실수로 잃고 자책하는 프랜시스. 사회의 바닥, 아메리칸 드림을 비웃는 처참한 부랑자의 삶에서 살기위해 타인을 죽이는 프랜시스. 살인의 죄는 그렇게 그를 도망치게 하는 무거운 죄의식이었지만 결국 생존을 위한 자기변명으로 변질된다. 누군가 그를 아는 사람, 그의 영광스러운 삶이 아닌 부랑자의 삶을 아는 사람에게 그에 대해 묻는다면 열이면 열 ‘그는 알코올중독 인간쓰레기일 뿐이라고, 비겁한 도망자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당신은 그런 그를 동정할 것인가. 아니면 진한 욕설로 힐난할 것인가. 소설을 읽는 동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잠시 유보하도록 하자.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 그 허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리에게 프랜시스와 그의 친구들이 배회하는 뉴욕 주의 올버니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알코올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궁리를 할 수 없는 우리의 주인공 프랜시스와 그에게 사랑을 느끼는 헬렌,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루디와 수많은 부랑자들에게 'I love NY'이란 말이 새겨진 티셔츠는 어떻게 보였을까. 아마도 프랜시스는 비웃으며, 헬렌은 그리워하며, 루디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말을 내뱉으며 그것을 바라봤을 것이다.

이렇게 작가, 윌리엄 케네디가 담고 있는 올버니라는 도시는 찬란한 빛을 잃은 아니, 애초부터 그런 빛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황량하게 그려지고 있다.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현실. 살기위한 죽음이 있고, 자살을 생각할 여유조차 사치스러운 이 곳, 올버니. 적어도 프랜시스들의 일상에 비친 올버니는 한없이 잔인한 곳이다. 그렇다면 그 잔인한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이 살길이 아닐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 먹을 것, 걸칠 것, 잠잘 것을 구걸하지 않는 일반적인 삶을 살 수도 있지만 정작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미 익숙해진 부랑자의 하루. 한 달 뒤를, 몇 년 후의 미래를 걱정하기에는 30분 뒤의 현실이 문제인 하루치의 삶. 그들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는가. 이 단순한 질문을 구체화해서 개개인에 맞춰 풀어본다면 다양한 목표로 대답할 수 있다. 특정한 대학에 가기위해 학교에 다니고, 번듯한 직장을 잡기 위해 도서관을 오가며 나아가 결혼을 그리고 그이후의 미래를 설계하며 대답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대답이 최초의 단순한 질문에 답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무엇을 바라보며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거추장스러운 조건만 내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30분 뒤의 현실조차 고민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조금 앞의 프랜시스에 대해 유보한 대답으로 돌아가 보자. 또한 도망이라는 의미도 다시 생각해보자. 알코올중독에 살인자이며 타인에게 냉정한 프랜시스. 그를 동정하거나 비웃을 수는 없다. 씨를 뿌리며 허락하지 않아도 보도블록을 비집고 올라선 엉겅퀴 꽃(원제 Ironweed의 정확한 이미지는 아니지만)처럼 프랜시스의 인생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치열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더불어 그를 비겁하다 비난할 수도 없다. 가족을 등지고 도망쳤지만 그는 방랑길에서 만난 헬렌에게 그리고 그리운 친구들에게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결국 그의 도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요, 죄에 대한 도피였지만 헬렌과 루디 등에게는 귀향의 의미가 된다. 그는 언제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억새풀이 되었든, 엉겅퀴 꽃이 되었든 그것은 자연의 들에 모였을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황폐한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듬성듬성 뿌리를 박고 피어난다면 인상을 찌푸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의 본질인 생명력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그것에서 끈질기도록 팽팽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때문에 프랜시스들의 일상은 더러운 우물에서도 빛이 난다. 아름답다는 표현에는 가당치 않을지 몰라도 나약하고 무의미하지는 않다.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도 돌아갈 곳을 찾아낸 프랜시스. 헬렌과 루디를 잃은 그는 돌아온 탕아가 되어 가족에게로 돌아온다. 아니, ‘돌아온’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돌아갈 사람을 잃고, 또한 돌아갈 수 없는 죄를 반복하고 도망친 곳이 가족이었을 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도피의 시작과 끝이 겹치는 원이 아닌 끝없이 뻗는 직선을 보게 된다. 프랜시스가 여전히 도망치고 있는 길이 놓인 직선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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