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 인상파의 정원에서 라파엘전파의 숲속으로, 그림으로 읽는 세상 '근대편'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아트북스. 2007)의 제목에서의 ‘거닐다’라는 표현이 눈길을 사로잡아 생각의 길로 이끈다. 작가는 말머리에서 그림을 읽는다며, 보는 것이 아닌 읽는 것의 의미를 풀어내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제목 역시 그림이 나무가되어 촘촘히 박힌 숲을 거닐며 단순히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풍경을 읽어내는 상상을 하게 한다.

산책은 식후의 더부룩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혹은 열띤 토론에 지친 머리를 쉬기 위해서 등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시도된다. 우리는 그 산책길에서 낯익은 혹은 낯선 풍경을 눈으로 보며 걸음을 옮기는데 그치기도 하지만 그 길에서 생각의 물꼬를 트기도 한다. 언제나 같은 귀갓길의 뻔한 풍경에서도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어, 막혔던 생각의 꼬리를 잡아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매일 걷는 산책로와는 달리 그림의 숲은 여전히 낯선 길이어서 그것을 읽는다는데 모종의 거부감이 든다. 몇 알지 못하는 화가들을 시대별 파별로 인덱스 붙이고 그에 따른 구구절절한 부연설명을 듣는 것에 대한 거부감 말이다. 그에 반해, 그림에 시선을 멈추고 몽상에 빠지는 읽기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그것은 동네 시장 통이나 출근길 콩나물시루 지하철에서 읽어 내는 생각과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게 만족하면 될 것인데 굳이 그림을 파고들어 읽는 것은 왜일까. 앞서 말한 거부감을 갖고 있음에도 작가와 그의 배경을 좀더 알고자 하는 욕구가 점점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과 생각으로 읽는 경계에서 답답해하는 것은 무슨 이유란 말인가.

미숙한 시각을 가진 감상자인 내게 이 질문에 답할 길은 요원하지만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갈증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저 섬세하다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는 읽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 마치 소설의 줄거리만 요약해서 읽은 것 같은 그림보기가 야기한 갈증. 실제로 평론가의 평을 접하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그림의 구석이 눈에 띄고 부분만 보았던 전체의 그림이 눈에 들어오니 그 갈증은 필연적인 욕구인지도 모른다. 학창시설 문학책의 시 마다 빼곡히 필기와 줄치기를 해야 했던 거북함을 넘어선 갈증. 때문에 그림을 읽고 싶어진다.

표현주의 화가라는 제목으로 묶이는 클림트와 뭉크의 그림에서 공통점을 찾기 힘든 것처럼 이 책에 두 줄기인 인상파와 라파엘전파의 차이를 그림만으로 분류하기는 힘들어 보인다.(이 무지함에 코웃음 치지 말아주시길) 이것이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의 구분과 같이 상이한 색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라면 인상파와 라파엘전파의 그림도 디테일만으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는 이미지가 서로를 넘나드는 경우도 있으니 그 구분은 더더욱 힘들어 보인다.

작가의 견해에 따른 이 다소 복잡한 구분은 ‘상징’의 유무로 나눌 수 있다. 대표적인 화가 마네의 그림으로 살펴본 인상파의 그림은 예술을 ‘가상’의 무대로 인식해 라파엘전파에 비해 자유로운 형식을 갖는다. 즉, 흔히 인상파의 ‘인상’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면 인상을 심어주는 매개로 상징물을 떠올리기 쉬운데 그와 반대로 인상파의 그림은 종교적, 도덕적으로 고정된 특정 의미의 상징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사견을 붙이자면 소설 <다 빈치 코드>에서 명화가 품고 있는 상징물이 종교적으로 해석되고 그것이 음모론을 부채질한 것과 반대되는 경우라고 보면 된다. 오히려 인상파의 그림은 기존에 세습되어오는 상징을 패러디하는 유연성을 보이기도 한다. 덧붙여서 이것은 사물을 자연 그대로 묘사한 것인지, 특징화된 주관적 표현으로 묘사된 것인지의 구분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 차이가 인상파와 라파엘전파와의 경계를 짓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반면 라파엘전파의 그림에서는 다소 고정적인 상징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술을 현실내지는 그것을 넘어선 진리의 척도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이것하면 무엇을 뜻한다는 자연스러운 연상이 가능한 연결고리에 집착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적인 차이로 근대의 두 주류를 파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그림의 의미를 어떤 위치에서 파악하느냐에 따라 모순 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길을 가는 두 갈래의 그림들이 세상을 어떻게 그려내는 지이고 우리가 그 그림에서 어떻게 세상을 읽어낼 것인 지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의 키워드이다.

요즘 들어 현대미술이 각광을 받는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세상과 가까운 미술. 그것은 회화의 형식을 넘어서 자유롭게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담아내는 것이다. 근대 미술 역시 그 당시의 사상과 시대를 담고 있다. 그 표현이 서로 다른 것은 세상을 읽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이냐는 것에 정답이 없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미술이던 현대의 미술이던 또는 인상파던 라파엘전파던 우리가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을 읽게 해준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는 듯 보인다.

그림으로 세상을 훔쳐보는 재미. 이 즐거운 갈증은 길을 잃기 십상인 그림의 숲을 탐험하는데 용기를 불어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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