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빨간 사랑 - 다섯 영혼의 몽환적 사랑 이야기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장르소설. 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문학의 한 장르인데, 그 안에 또 장르라니?
이것은 무식의 소치인가? 물론 문학, 그것도 소설이라는 한 장르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다루고 있는 주제, 발표 시기 등 여러 구분으로 가지 쳐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만, 앞서 말한 장르문학. 요즘의 그것은 단순히 순수와 통속, 영미, 일본, 남미 등의 세계와 한국 등과 같은 명백한 구분이 아니다. 어느 한 범주에 속하지 않지만 특정한 미각에 몰두하고 있는 것. 요즘의 장르문학은 그런 외곬으로 고집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새빨간 사랑>(노블마인. 2007)은 그런 의미에서 온전한 장르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연애소설, 공포소설 등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이것 참 난감하다. 앞서 장르문학에 대한 열변을 토해 놓고, 이 소설을 그 범주 안에 구속시키고 나서 단정 지을 수 없다니. 말에 어폐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을 포함한 것이 요즘의 장르문학이 아닌가 싶다.
최대한 단순히 감상을 정리해 몇 키워드로 이 소설을 규정짓자면, 글의 재료가 되는 소재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죽음, 성(sex), 공포, 원시적인 욕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만드는 감성. 5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이런 단어의 나열로 그 성격을 살펴 볼 수 있다. 이 모든 단편이 <미스테리즈!>(도쿄소겐샤)에 실린 것이라고 하니 어림잡아 특정한 독자를 위한 소설이라 단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시체에 성욕을 느끼는 자가 등장하고(영혼을 찍는 사진사), 고교괴담에 실릴 법한, 보이지 않지만 존재감 있는 유령이 등장하는가하면(유령소녀 주리), 앞서의 비정상적 성욕을 다룬 <영혼을 찍는 사진사>와 귀신의 존재를 다룬 <유령소녀 주리>가 섞인 듯한 단편(레이니 엘렌)이 등장한다. 뒤를 이은 네 번째 단편은 첫 단편을 읽으며 단련된 비도덕적 시각을 비웃듯 더욱 심화된 변태적 성욕을 다룬 <내 이름은 프랜시스>이다. 대망의 마지막? <언젠가 고요의 바다>는 앞서의 단편에서 느낄 수 있는 거부감이 스트레이트라면 5번째 단편은 그것을 희석시킨 칵테일 같은 느낌이다.
분명 이 소설은 뜨거운 감자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점잖은 감성을 뒤집는 감성을 단순히 포장으로, 그리하여 자극적 소재로 관심의 파도에 편승한 글로 치부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도덕적 판단으로 이런 소재가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로 읽히는 현실을 개탄하는 독자가 꽤 되리라 판단된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 그 중에 한 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옮긴이의 조심스러운 후기를 보자. 역자 이규원은 이 단편들의 작가, 슈카와 미나토의 다른 대표작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작가의 소설이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그 수명을 다하는 일회성에 그치는 것만은 아님을 말하고자 함일 것이다. 또한, 도덕적 판단, 즉 옳고 그름의 잣대를 내려놓으면 새로운 감각을 즐길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흑백의 구분이 모호한 시대가 아닌가.
평범한 일상이라도 이야기가 되는 것은 분명 소설의 괄목할만한 매력이다. 때문에 자극적인 소재는 되레 구설수에 오르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예술과 외설의 끝없는 전투가 승자는 없이 상흔만 남기듯, 이러한 가치판단은 허무한 뒷수습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새빨간 사랑>이다. 이 제목은 나눠보자면 ‘새빨갛다’와 ‘사랑’이라는 두 단어로 나뉜다. 판단컨대 ‘새빨간’이란 소재에 대한 대변일 테고, 사랑이라는 것은 추해서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것이 인간의 욕망이고 그 욕망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 ‘사랑’이라는 말 아닐까?
즐기고 아니고의 차이가 독자 개개의 판단에 달려있음이 분명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