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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장 피에르 카르티에.라셀 카르티에 지음, 길잡이 늑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농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 그 한가운데 있을 법한 그의 존재를 찬양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향수병일 수도 있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단순한 동경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말은 자연에 대해, 조화로운 삶에 대해 향수를 느낄 만큼의 경험 자체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북에 가족을 둔 실향민 부모 슬하의 자녀처럼 말이다.
말이 앞서고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철학자’는 곧 ‘몽상가’에 불과하다는 부정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 철학자가 주는 거부감, 사고 자체에만 집중한 나머지 현실 도피자에 그치고, 실천철학은 자기계발서 정도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실천력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현실과 괴리가 있는 말랑말랑한 몽상으로 이상론을 펼치는 이들을 매일같이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피에르 라비의 철학자라는 명판이 그들과 다른 점은 실천가라는 것이다. 그가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자신의 터전인 땅과 흙,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으로 자란 농작물이다.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의 가치를 알기에 그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닌 농부로 불리고 싶어 한다.
농부로서, 인류의 과오와 앞날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을 가진 철학자로서의 피에르 라비는 지금의 우리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문명의 해택을 무조건 거부하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창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맹렬히 비판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문명의 함정에 빠진 우리는 발전의 넓은, 그리고 본질적인 의미를 불과 1-200년의 산업화에 국한시키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이에 대한 피에르 라비의 비판을 굳이 변명하자면 바로 경제성을 꼽을 수 있다. 대량생산과 전 방위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득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정된 화석연료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사상누각에 불과하고, 동시에 비용적인 면에서도 경제성과는 거리가 멀다.
두 번째로, 앞서의 잘못된 시각이 파생한 문제인데, 소위 생산제일주의자(부정적 의미로 그렇게 지칭하기로 하자)들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저개발국의 침범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산제일주의자의 시각으로 그들은 가난한 나라이지만, 사실 그 무례한 침략이 있기 전 그들은 자급자족의 자생력을 갖춘, 그래서 산업화의 부는 축적하지 못했지만 결코 가난하다고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생산제일주의자들이 변명인 경제적인 이득은 바로 이 다른 세계를 노예삼아 성립된 잔인한 공식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실천적 의식과 행동은 어떤 것일까.
우선 피에르 라비의 실천적 사고를 따져보기 전에 그 의식의 저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영성’이라는 단어를 반복함으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꾀하고자 한다. 이것은 일종의 믿음과 경외라고 할 수 있다. 신앙심과도 흡사한 면이 있지만 그 대상이 다른 이것의 시선은 결국 자연을 향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을 숭배하거나 보존하자는 것과는 다르다. 단지 자연속의 지구속의 그리고 시간의 영속성 속에서 인간의 일회성을 깨닫고 겸양을 깨우치자는 것에 가깝다. 즉, 자의적인 판단의 합리화를 버리고 의식의 밑바닥에서부터의 깨달음을 항시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관념은 그 실체가 없기에 말과 글로는 잘 설명하기가 힘들다.(피에르 라비의 책을 읽어보기를 권할 뿐)
그의 사상(과연 사상이라고 할만하다)의 근본이 그렇다면 그것을 유효하게 하는 의식의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환경생태학의 측면에서 현상을 바라보자.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한 우리의 선택은 종자의 개량과 농업과 화학의 결합으로 가속도가 붙는다. 자연의 본질은 자연이 낳은 것을 자연이 키우고 그것이 맺은 열매가 죽어 자연을 형성하는데 있는데, 인위적인 우리의 선택은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깨뜨린다. 그로 인해 우리가 잃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자연의 맛이다. 도시의 어느 상점에 가도 같은 모양의 정해진 품종의 과일과 채소를 사게 되는 것에 전혀 어색함이 없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기에 본래의 자연의 맛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처럼 들린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경험하지 못했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바로 이 ‘당연함’이다. 박탈감을 느껴야 마땅하지만, 무감각하고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잃어버린 미각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는 비판과 자기반성에 따른 변화를 꾀할 수 없다. 정형화된 맛에 길들여져 판에 박힌 사고밖에 못하는 꼴이 아닌가.
이에 대한 반대의견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화학비료와 종의 개량으로 대변되는 과학의 이기가 없었다면 전 지구적인 기아와 굶주림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우려를 살펴보자. 물론 이런 우려는 타당한 것이다. 하지만 저개발국의 식량난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과학기술의 힘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기술적 진보를 얻어낸 성취는 인정할만한 일이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의식에 큰 구멍이 뚫려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한 생산력의 증대는 오히려 저개발국의 식량난을 가중시켰다. 이것에 바로 두 번째 의식의 가지가 숨어있다.
자급자족. 이것은 국가 간의 무역을 원천봉쇄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생존권과 관련된 식량을 자급자족하자는 것이다. 생산성과 경제성을 이유로 대단위 농업이 발전하고 그 바탕에는 앞서 예로 든 기술적 진보가 있다. 이 시각에서 보면 대단위 농업과 무제한적 무역을 통해 저개발국의 식량난을 해소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발목을 잡아 식량수급의 불균형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대단위 농업이 불가능한 저개발국에서는 수익성이 높은 커피나 담배 사탕수수 등에 노동력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것은 경제적인 부를 약속해 줄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그 경제성의 셈에 의한 희생양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의 자급자족을 불가능하게 한 농업의 대량생산 체제와 무역만으로는 균등한 식량배분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이로써 명백해졌다. 또한 그들의 끝끝내 물고 늘어지는 경제성 역시 의심된다.
셋째, ‘순망치한’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분명 자연 그대로의 것을 비료 삼아 작은 농경지에서 이루어지는 ‘생명농업’ 역시 생산성의 한계에 부딪힐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생명농업이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돋아나는 ‘이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잇몸’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자연퇴비를 이용한 농업은 결국 대지와 물을 보호한다. 이것만으로도 생명농업의 효용은 두말할 나위 없다. 나아가 생명농업이 보호하는 자연의 숲은 이미 존재하는 사막을 오아시스로 바꾸지는 못하지만 사막화의 전염을 막는 완충지대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사막화가 곧 저개발국의 식량난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더 중요하다.
피에르 라비가 인류에게 외치는 소리는 결국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라는 것이다.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 지구를 인류의 정복지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이 빌붙어 살고 시간의 영속성에 인간이야말로 스쳐지나가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의 전환을 주지시키는 사람이 드문 것은 아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이런 주장은 벽에 부딪혀 있다. 생산제일주의, 즉 모든 가치를 생산성과 경쟁력의 잣대로 보자면 그런 사고방식은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침없는 실천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성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라비의 목소리를 다소 추상적으로 느낀 것은 자연의 혜택을 곡해하는 환경에서 자라 좁은 시야를 가진 탓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할 필요가 있다. 생산제일주의의 노예, 소비 주체로서의 삶이 과연 자신이 택한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피에르 라비가 도시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현대사회를 내팽개치고 녹색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환경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환경주의자가 되자는 것 역시 아니다.(그렇다 해도 좋겠지만) 다만 무엇이 행복의 기준인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비를 위한 돈에 매이는 생활이 과연 옳은 것인가? 아니,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것이 행복을 주는지를 생각해야한다. 만약 이런 고찰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이 문명의 이기라는 이기적인 파괴자들에게 호도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 꾸며진 행복의 대가로 자연을 헌납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지 않은가.
이 한권의 책으로 철학자로서, 실천가로서, 그 무엇보다 농부로서의 피에르 라비를 모두 알 수는 없다. 또한 그의 격분에 무조건 동조하는 것은 위험한 사고의 전개일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대지와 물, 공기 그리고 으를 보호하는 사람과 숲을 파괴하며 이루어진 이 위태로운 왕국의 권위와 폐해를 맹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자연의 맛’이라는 거짓광고가 쓰인 감자칩을 먹으며, 우리 주면의 산더미처럼 쌓인 불필요한 소비의 결과물을 볼 때만이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