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열차 - 꿈꾸는 여행자의 산책로
에릭 파이 지음, 김민정 옮김 / 푸른숲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오늘도 어김없이 지하철 1호선을 타기 위해 버스에 오른다. 출근시간 체험 삶의 현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원버스에서 조금 더 안정적인 자세를 잡기 위해 안면몰수도 감수한다. 때로는 운전기사의 호통을 이어폰으로 무시한 채 뒷문 승차도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간신히 지하철 역 입구에 도착하면 타블로이드 신문에 실린 현실을 무시한 채 읽고 있는 책을 손에 들고 노란선 앞에 적절한 포지션을 잡는다. 조금 덜 찬 차량이 들어오면 연결구 쪽 자리를 잡고, 만원이라면 출입문 쪽에 자리를 잡기 위해 소박하지만 치밀한 계산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쟁을 치루고 나면 책을 펼치고 코를 박는다. 이것이 내 하루의 시작이다.

루브르가 있고 오르세가 있는, 파트릭 모디아노가 거니는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벗어난 작가의 야간열차 기행은 내게 다소 참담함까지 느끼게 한다. 떠나지 못하는 삶, 지겹도록 지치게 하는, 날이 선 작두 위에의 일상에 무슨 애착이 있기에 난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책에 대한 이 열정은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에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신장치에 대한 집착일지도 모른다. ‘나를 구해줘’, ‘나를 데려가줘’ 이런 외침을 받아주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말이다.

작가에게 야간열차는 여행 이상의 의미가 있는 듯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영감’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열차 속에서, 열차가 지나치는 풍경 속에서, 열차가 데려다준 살풍경 속에서 그는 영감을 얻는다. 그 영감이 어찌나 섬세했던지, 화자의 모습을 여성으로 착각하는 고정관념에서 허우적대기도 했다. 삶에 있어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영감’이 아닐까? 고된 삶을 채찍질하기위해 수많은 이유를 들어 동기부여를 하지만 여기에 영감은 결여되어 있다. 그 달의 카드 값을 매우기 위한 급여명세서, 최소한 뒤처지지는 말아야지 하며 발버둥치는 직장 내의 경쟁과 흔해빠진 재테크. 이런 것들이 영감을 가져다 줄 순 없지 않은가.
현대 사회의 고질병, 스트레스. 이 시쳇말처럼 나는 지쳐버렸다. 비단 일이 힘들고 사는 게 힘들어서라기보다 아무런 감흥이 없는 삶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즈음 여행에세이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나와 같은 이유에서건 아니면 훨씬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우리는 떠나고 싶은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여행은 시간의 소모가 아닌, 치유의 과정이다. 마땅히 무엇인가를 찾아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로의 여행이다. 그 과거가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연결되어 있는지 조차 중요하지 않다. 멈춰서있지 않고 떠나는 여행은 현실의 시간에서의 도피가 아닌, 오히려 시간의 저축과 같다. 우리가 흔히 현실의 삶을 잊기 위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여행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그런 여행은 언젠가 돌아와야 할 일상을 의식하고 있지만 야간열차는 그렇지 않다. 일상의 자신과 분리된 정지된 시간으로의 여행은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의식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보너스 같은 존재란 것이다. 야간열차는 알려지지 않은 경제논리로 우리의 시간에 큰 이자를 붙여 인생의 통장잔고에 차곡차곡 시간을 쌓아준다.

여행이 외롭지 않은 이유는 마음 맞는 일행 때문만은 아니다. 이 야간열차에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친구들이 동행한다. ‘카프카’와 ‘뒤렌마’트. 이들은 내게도 친구이다. ‘히치콕’, 그 역시 학창시절 나의 절친한 친구였다. 작가 에릭 파이의 여행에 동승한 그의 친구들이 반가운 건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내게도 친구이기에 말이다. 물론 처음 만나는 친구들이 더 많다. 그렇기에 여행은 즐거운 건지도 모른다. ‘카프카’가 내린 역에서 교체하듯 올라탄 생경한 이름의 여행자들을 감히 친구라고 불러도 좋으니 여행의 묘미란 언제나 상상 이상의 것이다.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처럼 한을 안고 찾은 것은 아니지만 야간열차가 내려준 곳은 그만큼의 황폐함이 있기도 하다. 안위만을 따진다면 이 여행, 수많은 친구들과 함께 했음에도 고통의 연속이다. 환희의 흔적을 찾아,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 상처를 찾아 가는 과정에서 인간에 지치고 불면증의 미열에 달뜨기도 한다. 그래서 찾은 그곳엔 그 환희가 종적을 감췄고, 찾고자한 흔적의 실체는 더 요원하다.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소용없다. 어쩌면 그것은 여행자의 욕심이었으리라. 때문에 이 여행은 눈으로 발걸음으로 하는 여행이라기보다는 사고의 여행인지도 모른다. 광활한 시베리아에서, 유라시아 횡단에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사고의 실타래를 움켜쥐고 전전긍긍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때문에 세상의 끝에서 그 끝을 확인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의 사고의 여행 또한 그럴 것이다.

월요일이면 더 좁게 느껴지는 지하철에서 나는 작가와 함께 야간열차를 상상했다. 잠시나마 새로운 세상을 보며 ‘숨 좀 돌려야지’ 하며 따라나선 여행이었는데, 한가로운 산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여전히 만원버스와 지하철에서 콩나물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어쩌면 이 역할극은 언제고 끝나지 않는 인생 자체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서로 다른 의미로 여행을 꿈꾼다. 만약 그 여행이 휴식의 의미가 아니라면 야간열차가 이끌어줄 사고의 여행을 떠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이제 그 여행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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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장 피에르 카르티에.라셀 카르티에 지음, 길잡이 늑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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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농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 그 한가운데 있을 법한 그의 존재를 찬양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향수병일 수도 있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단순한 동경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말은 자연에 대해, 조화로운 삶에 대해 향수를 느낄 만큼의 경험 자체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북에 가족을 둔 실향민 부모 슬하의 자녀처럼 말이다.

말이 앞서고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철학자’는 곧 ‘몽상가’에 불과하다는 부정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 철학자가 주는 거부감, 사고 자체에만 집중한 나머지 현실 도피자에 그치고, 실천철학은 자기계발서 정도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실천력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현실과 괴리가 있는 말랑말랑한 몽상으로 이상론을 펼치는 이들을 매일같이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피에르 라비의 철학자라는 명판이 그들과 다른 점은 실천가라는 것이다. 그가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자신의 터전인 땅과 흙,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으로 자란 농작물이다.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의 가치를 알기에 그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닌 농부로 불리고 싶어 한다.

농부로서, 인류의 과오와 앞날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을 가진 철학자로서의 피에르 라비는 지금의 우리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문명의 해택을 무조건 거부하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창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맹렬히 비판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문명의 함정에 빠진 우리는 발전의 넓은, 그리고 본질적인 의미를 불과 1-200년의 산업화에 국한시키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이에 대한 피에르 라비의 비판을 굳이 변명하자면 바로 경제성을 꼽을 수 있다. 대량생산과 전 방위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득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정된 화석연료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사상누각에 불과하고, 동시에 비용적인 면에서도 경제성과는 거리가 멀다.

두 번째로, 앞서의 잘못된 시각이 파생한 문제인데, 소위 생산제일주의자(부정적 의미로 그렇게 지칭하기로 하자)들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저개발국의 침범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산제일주의자의 시각으로 그들은 가난한 나라이지만, 사실 그 무례한 침략이 있기 전 그들은 자급자족의 자생력을 갖춘, 그래서 산업화의 부는 축적하지 못했지만 결코 가난하다고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생산제일주의자들이 변명인 경제적인 이득은 바로 이 다른 세계를 노예삼아 성립된 잔인한 공식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실천적 의식과 행동은 어떤 것일까.
우선 피에르 라비의 실천적 사고를 따져보기 전에 그 의식의 저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영성’이라는 단어를 반복함으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꾀하고자 한다. 이것은 일종의 믿음과 경외라고 할 수 있다. 신앙심과도 흡사한 면이 있지만 그 대상이 다른 이것의 시선은 결국 자연을 향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을 숭배하거나 보존하자는 것과는 다르다. 단지 자연속의 지구속의 그리고 시간의 영속성 속에서 인간의 일회성을 깨닫고 겸양을 깨우치자는 것에 가깝다. 즉, 자의적인 판단의 합리화를 버리고 의식의 밑바닥에서부터의 깨달음을 항시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관념은 그 실체가 없기에 말과 글로는 잘 설명하기가 힘들다.(피에르 라비의 책을 읽어보기를 권할 뿐)

그의 사상(과연 사상이라고 할만하다)의 근본이 그렇다면 그것을 유효하게 하는 의식의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환경생태학의 측면에서 현상을 바라보자.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한 우리의 선택은 종자의 개량과 농업과 화학의 결합으로 가속도가 붙는다. 자연의 본질은 자연이 낳은 것을 자연이 키우고 그것이 맺은 열매가 죽어 자연을 형성하는데 있는데, 인위적인 우리의 선택은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깨뜨린다. 그로 인해 우리가 잃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자연의 맛이다. 도시의 어느 상점에 가도 같은 모양의 정해진 품종의 과일과 채소를 사게 되는 것에 전혀 어색함이 없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기에 본래의 자연의 맛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처럼 들린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경험하지 못했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바로 이 ‘당연함’이다. 박탈감을 느껴야 마땅하지만, 무감각하고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잃어버린 미각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는 비판과 자기반성에 따른 변화를 꾀할 수 없다. 정형화된 맛에 길들여져 판에 박힌 사고밖에 못하는 꼴이 아닌가.

이에 대한 반대의견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화학비료와 종의 개량으로 대변되는 과학의 이기가 없었다면 전 지구적인 기아와 굶주림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우려를 살펴보자. 물론 이런 우려는 타당한 것이다. 하지만 저개발국의 식량난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과학기술의 힘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기술적 진보를 얻어낸 성취는 인정할만한 일이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의식에 큰 구멍이 뚫려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한 생산력의 증대는 오히려 저개발국의 식량난을 가중시켰다. 이것에 바로 두 번째 의식의 가지가 숨어있다.
자급자족. 이것은 국가 간의 무역을 원천봉쇄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생존권과 관련된 식량을 자급자족하자는 것이다. 생산성과 경제성을 이유로 대단위 농업이 발전하고 그 바탕에는 앞서 예로 든 기술적 진보가 있다. 이 시각에서 보면 대단위 농업과 무제한적 무역을 통해 저개발국의 식량난을 해소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발목을 잡아 식량수급의 불균형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대단위 농업이 불가능한 저개발국에서는 수익성이 높은 커피나 담배 사탕수수 등에 노동력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것은 경제적인 부를 약속해 줄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그 경제성의 셈에 의한 희생양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의 자급자족을 불가능하게 한 농업의 대량생산 체제와 무역만으로는 균등한 식량배분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이로써 명백해졌다. 또한 그들의 끝끝내 물고 늘어지는 경제성 역시 의심된다.

셋째, ‘순망치한’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분명 자연 그대로의 것을 비료 삼아 작은 농경지에서 이루어지는 ‘생명농업’ 역시 생산성의 한계에 부딪힐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생명농업이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돋아나는 ‘이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잇몸’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자연퇴비를 이용한 농업은 결국 대지와 물을 보호한다. 이것만으로도 생명농업의 효용은 두말할 나위 없다. 나아가 생명농업이 보호하는 자연의 숲은 이미 존재하는 사막을 오아시스로 바꾸지는 못하지만 사막화의 전염을 막는 완충지대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사막화가 곧 저개발국의 식량난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더 중요하다.

피에르 라비가 인류에게 외치는 소리는 결국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라는 것이다.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 지구를 인류의 정복지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이 빌붙어 살고 시간의 영속성에 인간이야말로 스쳐지나가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의 전환을 주지시키는 사람이 드문 것은 아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이런 주장은 벽에 부딪혀 있다. 생산제일주의, 즉 모든 가치를 생산성과 경쟁력의 잣대로 보자면 그런 사고방식은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침없는 실천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성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라비의 목소리를 다소 추상적으로 느낀 것은 자연의 혜택을 곡해하는 환경에서 자라 좁은 시야를 가진 탓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할 필요가 있다. 생산제일주의의 노예, 소비 주체로서의 삶이 과연 자신이 택한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피에르 라비가 도시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현대사회를 내팽개치고 녹색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환경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환경주의자가 되자는 것 역시 아니다.(그렇다 해도 좋겠지만) 다만 무엇이 행복의 기준인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비를 위한 돈에 매이는 생활이 과연 옳은 것인가? 아니,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것이 행복을 주는지를 생각해야한다. 만약 이런 고찰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이 문명의 이기라는 이기적인 파괴자들에게 호도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 꾸며진 행복의 대가로 자연을 헌납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지 않은가.

이 한권의 책으로 철학자로서, 실천가로서, 그 무엇보다 농부로서의 피에르 라비를 모두 알 수는 없다. 또한 그의 격분에 무조건 동조하는 것은 위험한 사고의 전개일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대지와 물, 공기 그리고 으를 보호하는 사람과 숲을 파괴하며 이루어진 이 위태로운 왕국의 권위와 폐해를 맹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자연의 맛’이라는 거짓광고가 쓰인 감자칩을 먹으며, 우리 주면의 산더미처럼 쌓인 불필요한 소비의 결과물을 볼 때만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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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진화를 밝힌다 다윈의 종의 기원 Easy 고전 21
이중원.정은주 지음, 박종호 그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삼성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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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어와 요약에 길들어진 교육을 받아왔는지 모른다. 세기의 사상가의 이름과 연대기를 기억하고(연대기조차 뚜렷한 업적의 시기만을) 그의 저서의 출판(?) 년도와 제목만을 기억하는데 익숙하다는 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다윈의 진화론 역시 그런 교육과정의 한계를 갖고 있었다. 물론 하나의 사상 혹은 한 권의 책이 파생하는 수많은 의문과 논제를 고려한다면 사실상 통사적 이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겠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우리의 교육과정에 비친 다윈의 진화론은 요약설명이라는 말이 가당찮을 정도로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앞서의 언급과 관련되어, 이 논제를 정해진 교육과정의 한 귀퉁이에서 다룬다는 것 자체가 가진 한계 때문이라 자위할 수 있다. 그렇다면 ‘통합논술’이라는 것은 왜 생긴 것인가? 그저 몇 줄에 지나지 않는 설명으로 무엇을 이해할 것이며, 이해한 척하고 풀어내는 논리의 흐름을 논술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이 통합논술이라는 것 자체가 수박 겉핥기식의 멀티 플레이어를 요구하는 제도라면 하루속히 사장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전문성과 멀티 사이에서 힘들 우리 청소년에게 혼란만 가중시키지 말고.

사견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시작한 것은 고전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을 나 역시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시각을 30대를 바라보는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실하지 못한 학업태도를 감안하더라도 고전의 수혜를 받지 못한 안타까움을 위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지(easy)라는 슬로건으로 무장한 이 책 역시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출발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전이라는 것은 이 시대의 사상의 근원이라는 점에서도 유효하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는 사고의 근본이라는 것에 그 효용이 극대화된다고 생각한다. 현대에는 다소 부합되지 않는 또는 전혀 맞지 않는 현상이나 사상을 다루고 있다고 할지라도 깊이 있는 사고의 과정을 담금질 해줄 테니 쓸모없는 뒤떨어진 고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고전을 다루는 좋은 책들이 상당히 많다. 개인적으로 특히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유전공학에 관한 두툼하고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권하고 싶은 책이 꽤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바쁘다. 또한 모든 분야에 열린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때문에 쉽게 읽히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 같은 요약의 도움이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전체적인 그림을 과신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결국, 청소년에게, 그리고 나에게(아니, 대상의 구분이 없이) 한 분야의 집요한 추적 보다는 여러 분야를 부담 없는 분량에, 쉽게 읽히는 형식으로 잘 꾸려 소개하는 것이 절실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반갑다. 통합논술 특수를 누리기 위한 다소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할지라도 반가운 게 사실이다. 앞서 다소 쓴 소리를 했지만, 통합논술 역시 빈약한 제도라도 우리의 관심을 촉발시킬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번외의 이야기에서 돌아와서 책의 내용과 구성을 살펴보자. 이 책의 구성은 쉬운 읽힘을 지향하는데 있어 인터뷰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마치 고인의 영혼을 불러 낸 영매처럼 해설자는 독자의 궁금증을 다원의 대답으로 때로는 자신의 정리를 통해 풀어준다. 또한, 해설자와 다윈의 대화 중간 중간에 적절히 <종의 기원>의 내용을 발췌함으로써 이해력을 높이고 글 자체의 신뢰감을 보장해주고 있다. 진화론의 주요한 사항, 곡해되고 있는 부분, 그리고 반대급부의 의견을 성실히 설명함으로써 다윈의 시대의 의식과 그것의 현대적 의의를 적절히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이론에 영향을 끼친 여러 학자들의 논지를 짧은 설명으로 나마 집어주는 것은 진화론에 대한 보다 넓은 시야를 위함일 것이다.

유전공학이 21세기 지(知)의 키워드로 떠오른 이때 다윈의 진화론을 구태의연한 옛 추억으로 치부하는 목소리가 그리 억지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그 급변의 과정에서 이전의 것은 거짓이 되어버리거나, 그 효용을 잃는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고전으로서의 다윈의 <종의 기원>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현대사회에 얼마나 적합한 논지인지, 혹은 그것이 유전공학의 근간이나 시발점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그 사고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윈의 그것이 과연 최초의 것인지 아닌지의 논쟁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종의 기원>은 여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라는, 생명이라는 아니, 모든 종의 기원은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누군가 이에 대한 정답을 물샐틈없는 논리로 설명한 다해도, 그래서 그에 대한 반론이 전혀 없어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판단하는 것조차 위험한 것일 진데, 끝이 보이지 않는 실타래를 쥐고 있는 지금 참과 거짓에 정확한 색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우리에겐 더 많은 다윈이 필요하다. 집요한 자료수집과 정리, 그 속에서의 추론, 같은 의견을 가진 학자와의 연동, 이 모든 것이 연구의 기본이 아닐까? 이것은 가히 언론플레이와 추측이 난무하는 지금의 연구문화에 경종을 울릴만한 것이다.

고전인 동시에 현재의 논리와 맞닿아 있는 논문으로서 그리고 자기반성의 도덕서로서 재조명된 읽기 쉬운 이 한 권의 책이 진지한 시선의 촉매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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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은 옷을 입지 않는다 - 인류 최후의 에덴동산, 아마존 오디세이
정승희 지음.사진 / 사군자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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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하릴없이 TV리모컨을 손에 쥐고 모로 누워 TV삼매경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한 채널에 1,2분 이상 머무는 경우가 드문데 그것은 아마도 TV를 즐기지 않는 개인적인 이유 때문일 수도, 단 몇 분 사이에 경중을 따질 수 없는 수많은 정보가(연예인 신변잡기 등도 정보라 한다면) 쏟아져 나오는 이 바보상자가 버겁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도전 지구탐험대’ 역시 그런 프로그램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단 1분의 채널고정이 여의치 않은, 그런 프로그램 말이다. 무딘 칼 하나로 정글을 해치며 거대한 사냥감을 초라한 도구로 포획하는 전사들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이며, 집 앞 탐험조차 버거워 일요일 오전을 TV로 소진하고 있는 내게 과연 그 땅이 무슨 감흥을 줄 것이냔 말이다. 그것은 곧, 대자연의 아마존 인디오의 삶과 뉴욕의 거들먹거리는 리얼리티 TV쇼와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치열한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선뜻 집어 읽게 된 이유는 ‘자연’이라는 단어가 주는 휴식의 평온함 때문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짜증’인 빼곡한 도시의 삶에, 쫓기듯 마치는 5분의 식사와 그에 버금가는 속도의 관성에 맥을 못 추는 삶에 지친 탓이리라. 때문에 잠시나마 안식을 주는 책읽기에서 조차 성공을 향한 자기계발과 삶의 방식에 호도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옷을 입지 않는 아마존에서라면 명품 슈트를 걸치고 고급승용차를 타기 위한 발악을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아마존의 삶은 내게 휴식을 주었다. 실제로 ‘자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도시에 유린당한 삶을 살아온 내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히 지켜지고 유지되기에, 혹은 있는 그래도 보존되기에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경외는 아니었다.
인디오에게 아마존의 삶은 현실이다. 그것에 태초의 자연 속에 아름답게 빛난다느니 하는 수식을 구구절절이 붙이는 것은 소위 문명인이라는 망상에 빠진 우리들인 것이다. 그 현실 속의 치열한 삶이 아름다운 것은 시멘트로 온 땅을 도배하는 포장에 익숙한 우리들의 동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천년이고 그 이상이고 바람에 날리고 다시 쌓이기를 반복하는 아마존의 맨바닥에 새겨진 주름살이 우리의 성형수술에 기댄 인공적인 얼굴엔 없지 않은가.
 
옷을 입지 않은 책
이 책속에서 옷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은 비단 아마존의 인디오들만은 아니다. 십 수 리터의 물을 마셔도 요의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더위와 강행군에 웃통을 벗어버린 작가처럼 그의 글도 옷을 입지 않는다. 달필의 전문 작가가 아니기에 조금은 서투른 문장이 연결되고 감정을 숨기지 않고 하고자 하는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강조되는 그의 글은 마치 술 취한 삼촌의 흥미진진한 모험담과도 같다. 그렇다고 그의 글 솜씨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삼촌은 조금은 허풍이 있고 쉽사리 흥분을 하며 그때마다 했던 말을 반복하지만 들을 때마다 귀를 솔깃하게 하는 이야기꾼이기에 말이다.
 
문명인과 자연인의 경계에서
작가의 아마존과 인디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칭송은 곧 문명인(굳이 이름을 붙이자면)에 대한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수 세기 전 우월감에 도취되어 그들을 약탈했던 유럽의 개척자들과(이 단어도 상당히 거부감이 들지만) 그에 못지않은 욕심을 가진, 아니 그 욕심에 이자까지 차곡차곡 쌓아 화를 자초하는 현대 사회인에 대한 비판 말이다. 그것은 작가의 시선이 별천지를 담기위한 카메라 뷰파인더를 넘어 아마존의 인디오의 삶을 바로 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즐겨먹는 음식을 같이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삶에 관성을 느끼듯 동화되어 가면서 아마존에 대한 예찬론이 시작되고 급기야 그것이 삶의 올바른 기준이 되어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문명인의 틀 안에 갇혀 있다. 예전 광고카피로 유명했던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문구가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연을 찾고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며 그곳에 꿀 맛 같은 휴식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그와 우리가 문명을 누리며 살고 있기에 생기는 변명 때문일 것이다.
 
아마존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아마존의 자연이 주는 혜택과 장애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을 윤간 당하고 이제는 가끔 찾아드는 문명인에게 전통의식을 팔아 연명하는 샤마꼬꼬 부족, 그리고 부족과 도시 노동자의 삶에서 시소를 타는 많은 인디오들. 이렇게 아마존의 더 이상 과거의 아마존이 아니다. 지금의 아마존이 내일의 아마존일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명의 혜택에 의해 천혜의 자연이 쓰러지듯 그들의 의식도 차츰 무너지고 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일 수 있는 까닭은 자연스러움,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의 방식에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당연함에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아마존 밖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고,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마약에 절어 백인에 굴복했던 인디언처럼 자신의 정신마저 헌납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인디오를 의식적으로 보호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작가와 그의 글은 읽는 동안의 우리가 아마존을 보호한답시고 뒷돈을 챙기는 인디오와 브라질의 부패한 말단 정부기관인 후나이들에게 분노한 것처럼 무엇을 보존한다는 것은 우리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말이다. 이 때문에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고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작가의 주장에도 일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긴다. 어쩌면 그들과 우리 사이에 대자연의 정글과 늪이 존재하는 이유는 두 집단 사이의 불가침의 선을 그어놓은 신의 묘안인지도, 아니면 그런 삶을 택했기에 인디오는 아마존에서 옷을 입지 않고 우리는 아마존과 같은 곳을 휩쓸고 그 위에 옷을 입힌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미 세계 평화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몇 강대국의 폐해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아마존엔 어김없이 폭우가 쏟아져 정글 구석구석을 가로지르는 물길이 생길 것이고 인디오들은 그곳에서 애벌레를 간식삼아, 아나콘다나 악어를 주식삼아 살아갈 것이다. 부족의 마을 곳곳에 일제 보트모터나 발전기가 있고 삼양라면 봉지가 집 안 구석구석을 차지하더라도 비가 오고 해가 뜨고 지듯이 아마존의 벌거벗은 자연은 그대로일 것이다. 아마존의 인디오는 과한 욕심으로 정글을 해치고 장난감으로 사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아마존의 자연이 태양이라면 우리는 태양을 바라볼 수 없는 드라큘라 같은 존대이기에 말이다. 다만 그들의 욕심 없는 중도의 삶이 부럽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괴로움이 이 욕심에서 파생되지 않는가.
또한 문명이라는 망상에 빠져 그들의 삶을 뒤흔들 우리의 욕심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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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미셀러니 사전 - 동서양을 넘나드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앤털 패러디 지음, 강미경 옮김 / 보누스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단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 할지라도 한 권의 책으로 망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단편적인 조각을 모아 한 권의 책에 역사의 거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은 헛된 욕심이자 망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아니, 유추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있어서 ‘정확한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역사를 다루는 일은 언제나 고된 인내심을 요구하는 풀리지 않는, 신이 내린 숙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 자체가 후대의 유추로 살을 붙이고, 승리자의 전리품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 당위성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 누구도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고, 가졌다 손치더라도 그 기준이 분분한 역사이이에 이 조각모음의 한 권을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 칭하는 것이 그리 억지스러운 주장만은 아니다. 무엇을 역사라고 할 것인가는 개개인의 판단에 달려있는 것 아닌가.
 
아폴로 11호로 달에 처음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을 기억하지만 뒤이은 버즈 올드린의 발자취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역사 미셀러니 사전>(보누스. 2006)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떠올린 책이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열린책들. 2001)이었다.―이 책의 전신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열린책들. 1996)이다.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이 나에겐 닐 암스트롱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은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와는  상당한 거리감을 보인다. 언뜻 보면 단지 ‘믿거나 말거나’ 모음집 정도의 인상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각을 조금 넓혀 생각해보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누군가(다른 곳, 다른 시대의)에게 절대적인 지식이 우리에게 믿거나 말거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절대적임과 상대적임의 경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역사 미셀러니 사전> 역시 상대적인 의미와 절대적인 의미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거의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이 두 기준에 따라 타당성을 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읽는 사람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나뉜다. 역사의 방대함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가진 독자에게는 이 길지 않은 분량의 한 권의 책에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부제가 거부감을 줄 것이고, 역사 자체의 맹점에 시선을 맞춘 상대적인 기준을 가진 독자라면 시작도 끝도 없이 연결고리조차 찾기 힘든 역사의 기원과 흐름을 갈무리한 작가의 고된 노력에 박수를 칠지도 모른다.―나의 경우는 후자이다.
 
인간의 역사는 고정관념에 따라 이루어진다. 때문에 과거의 사실은 현재의 허구가 될 수 있다. 그 고정관념이라는 것 자체가 시간의 영속성에서 본다면 일시적인 변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떤 진실로 마무리 지어질 지 가늠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인류와 지구와 우주, 그리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한 권의 책에 모든 것을 담아낸다는 다소 치기어린 시도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책에 하나의 사건의 고찰을 담아내는 인내까지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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