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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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이라고 되어 있지만 분량은 짧아서 한시간 내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첫 문장부터 흥미진진했고 가독성도 좋아서 술술 잘 읽혔다.
추리소설이겠지 하고 읽었는데, 결론적으로 추리소설이 아닌 우울한 휴머니즘 소설이었다.

이 세상 아름다움이 아닌, 너무 아름답던 언니 해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동생 다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성형 중독에 빠지고, 언니가 죽었을 때 입고 있었던 옷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하기도 하고, 명랑하고 순수했던 과거의 표정과 눈빛을 잃었다.
고3의 ‘다 큰 처녀’인 나이에도 속옷하나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던 해언을 다언은 엄마처럼 챙겨왔었다.
책에서 말하길, 해언은 브래지어만 안하는 게 아니라 팬티도 안입고 학교도 다니고 밖에도 돌아다녔다고 한다.
사실 이 대목을 보고 당장은 뭐 이런 여자애가 다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타고난 예쁜 외모와 달리 어딘가 넋을 놓고 사는 듯 하기도 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백치미를 가진 여자로 그려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주던 아빠가 일찍 죽고난 뒤, 너무 어리고 순수한 나이에 ‘아빠의 죽음’ 이라는 심오한 문제를 견뎌내다 그때 알게 모르게 생긴 내상이 그녀를 약간 어긋난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듯 해언은 주위 모든 사람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 정도로 이기적이고 완벽한 미모를 가졌지만, 차가운 성격과 묘한 정신상태로 언제나 동생 다언을 걱정시켰다.
전혀 상반된 이미지의 자매는 학교 내에서도 유명인사였는데,
다언은 해언과는 전혀 다른 외모와 성격이었지만 공부를 잘했고, 시를 좋아했고, 성격이 참 예뻤던 아이였다. 그녀를 원래 알던 사람의 눈에는 그 사건 이후 완벽하게 자신을 잃어버린 다언의 모습이 안쓰러울 수 밖에 없다.

아까 이 책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휴머니즘 소설이라고 했다.
살해, 복수, 레몬, 공포 같은 키워드가 표지에 떡하니 있으니 당연히 보통의 추리소설이라 예상하고 속은 것도 내 탓은 아니다.
범인이 누구일까? 그래서 그 범인이 왜 그랬나?에 대한 것들에 대한 긴박한 전개는 없다. 그것들은 이 책의 바깥에 있고, 그냥 독자인 내가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다.
일반적인 추리소설 읽듯이 그래서 범인이 누구래? 왜 그랬대?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책은 지독하게 재미없는 책이다.
이 책에는 ‘공평하지 못한 삶’과 ‘삶의 몽환’만이 담겨있다.
‘질투’라는 무서운 감정까지도 흐릿하고 몽환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읽는내내 작가가 어지간히 우울한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결론적으로 책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이런 묘한 아이러니가 이 책의 여운이고, 매력이다.
예상을 빗나간 책이었음에도 문학적 즐거움은 확실하게 있었다. 스토리, 전개, 인물 구성, 문장들, 상징, 색체, 감정 표현 모두 좋았다.
소설을 읽고나서 그 소설을 음악화, 시각화, 추상화 해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 소설로 그려지는 색체들의 조화가 마음에 든다. 검정색, 옅은 레몬빛, 텁텁하게 붉은색, 잿빛들... ... .
독특한 우울감. 우리나라에서 딱 잘 먹힐만한 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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