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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중년의 대한민국 판사가 쓴 일기같은 수필이다.
극강의 집단주의 국가에서 집단주의를 혐오하는 대한민국의 한 판사 작가의 책이다.
개인주의자 라는 것과 독서를 좋아하는 것,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해보는 걸 좋아하는 것 말고는 딱히 이 작가와 나 사이엔 공통점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통된 경험치가 없다.
나는 전국 수석은 뒤로 제쳐두고, 전교 1등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다. 책도 어딘가 아릿한 감성을 자극하는 소설이라든지 고전문학이라든지 내가 좋아하는 문학 분야 빼고는 비문학이라 불렸던 정치, 경제, 과학에 대한 책들은 멀리하는 책 편식자였다.
그런 나도 나이가 점점 들어 소녀에서 아가씨가 되어가니 술술 읽히는 자극적인 허구의 이야기가 아닌 이런 종류의 책에도 관심이 생기더라.
사람은 확실히 나이와 환경에 맞게 취향이 변해가는 게 분명하다.
처음엔 사실 별 생각없이 이 책을 들었다.
원래 제목과 표지 등등의 끌림으로 책을 구매하는 편이고 대체로 내 안목은 믿을만했기 때문에 이 책도 읽을만하겠지라는 추측은 있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재미와 감동이었다.
대체 2015년에 나는 이 책을 안읽고 뭐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솔직히 엄마뻘의 판사 작가가 이런 종류의 소년감성을 가지고 있을거라고 생각을 못했고, 이렇게 재밌게 글을 쓸거라고도 생각을 못했다.
오랜만에 책 읽으면서 크게 웃었다가, 마음이 뭉클 했다가 왔다갔다 하며 읽는 행복감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특히, 속독 에피소드는 나의 어린시절에도 잠깐 속독법이 유행했던 적이 있어 개인적인 경험과 겹쳐져서 실소와 파안대소를 반복하며 읽었고,
나머지 이야기들은 달콤 씁쓸한 초콜릿을 먹는 듯한 기분으로 읽었다.
편한 것만 좋아하는 나태한 내가 그래도 인간이기에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을, 이제는 소녀가 아닌 투표권이 있고 세금을 내 힘으로 내는 20대 여성으로서, 그야말로 세상 곳곳의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하다보니 슬픔에 잠겼다.
어쩌면 작가의 비통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옮았을 수도 있겠다. 글이 너무 진심같아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던 날 맛있는 밥을 먹으며 데이트를 했었고, 지구 어딘가에서 학살과 테러가 일어나던 날 달콤한 꿈을 꾸며 자고 있었을 내가 누군가한테 미안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나태한 나같은 20대를 의도적으로 저격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스스로 그렇게 느낀 것이다.
오히려 시종일관 20대를 이해해주는 작가의 따뜻함에 마음이 누그러졌을테다. 작가의 노련함으로 보아 이런 심리를 의도적으로 이용했을 수도 있겠으나, 의도였든 아니든 읽으면서 느꼈던 뭉클거림이 나쁜쪽이 아니었기에 이 책의 불편함 조차도 마음에 들었다.
책 표지에 ‘일상유감’이라 되어있듯, 여러가지 에피소드들과 가벼운생각, 무거운생각들이 나열되어있지만 결국 이 책의 큰 틀은 제목 그대로 ‘개인주의자 선언’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허영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p.32에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집착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는 이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건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내가 평소에 늘 하는 생각을 누군가 책에 써주니 통쾌했다.
후반부에 필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 이야기에서 다시 한번 그 부분을 꼬집으며 그들은 허영보다는 서로간의 조화를 중요시한다는 것이 나와있는데, 문화의 기반 자체가 다르기에 동경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마인드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금은 닮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거 하나 사면 자랑해서 남을 기죽이며 만족을 느끼고, 또 그 자랑질에 배아파 죽으려고 하는 그런 문화는 근본적인 행복을 방해한다.
가진 사람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결국 행복해질 수 없다.
굳이 있는 사람이 있는거 자랑하면서 남에게 상대적 박탈감까지 심어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반대로, 남이 가지고 있는거 내가 못가졌다고 배아파하고 욕심부릴 필요까지 있을까.
서로에 대한 배려가 국가의 행복을 만든다. 우르르 몰려 다니면서 누구 하나 뭐 하면 다 따라해야되고, 못하면 소외되는 집단문화에서 벗어나, 서로 적당히 타협하면서 배려하는 합리적 개인주의 문화가 자리잡으면 어떨까.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든거 아는데, 그렇게 서로가 다 아니까 그런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살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넌지시 던져보게 되는 책이다.
간단한 독서 후기를 적으려고 했는데, 책 한권에 두서없는 수다쟁이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