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삶
정소현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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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품위있는 삶(품위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품위 있는 삶은 무엇인가?>​





품위 있는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사실 하루 하루를 살아내기도 버겁다고 느끼는 사람이 널린 시대에 내 삶에 품위까지 생각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소현 작가 소설집의 첫 타자인 [품위 있는 삶, 100세 보험]은 누구에게나 품위가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의사인 주인공 윤승은 열심히 일한 덕분에 노년의 빈곤에서 해방 될 수 있었다. 이십년 전부터 불입한 보험 덕분에 매일 같이 보조인 방문하여 요리, 청소 등의 가사일과 개인적인 용무와 건강까지 도맡아 케어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 빈곤과 고독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인과관계인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자립수단을 확보한 윤승은 한국의 일반적인 노인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우리에게 품위가 필요하며 그 품위는 물질수단의 유무에 따라 갈리는 현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매일매일이 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니 늙어가는 현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그덕에 지금 누리는 소소한 일상과 여유가 더욱 소중하다고 여긴다. 그녀가 생각하는 품위있는 삶의 조건은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온전한 신체와 정신을 갖춘 상태를 의미한다. 그녀는 치매에 걸렸던 아버지를 보며 내가 스스로를 자각 할 수없는 삶은 실존적인 삶이 아니라고 여긴듯하다. 치매로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보험의 옵션으로 치매에 걸릴 경우 안락사를 시켜달라는 조항을 넣도록 이끌었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윤승을 통해 단순히 노인에게 풍부한 부와 건강한 신체가 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피해만 주는 삶, 내가 나를 모르는 삶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겠다던 그녀는 자신에게 치매을 받아들이라는 현실앞에서 구차한 본색을 내비친다. 살고 싶은 욕망을 떨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탓해야 할까?



그녀가 모르는 건 자신이 치매라는 것 뿐이 아니다. 윤승이 윤승일 수 있게 하는 또하나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로서의 그녀이다. 소원해져 자신을 보러오지 않지만 내심 아들을 기다리는 엄마이자, 회사일을 제쳐두고 자신을 돌보는 손자의 할머니로서의 윤승은 그녀 스스로를 규정짓고 살아가게 하는 원천과도 같다. 치매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에게 더 충격적인 것은 아들과 손주라 믿었던 인물들이 보험사 직원들이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녀가 가입한 보험 상품은 도우미들이 친자식, 친가족 처럼 고객을 케어해 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었다. 치매는 그녀로 하여금 그들을 내 자식과 손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독자들은 윤승을 바라보며 노년의 삶이 어떻게 다가올까?

무덤덤할 줄 알았던 죽음앞에서 살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이 구차해 보일지 모르겠다. 윤승과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자각하지도 못하는 모습이 생각하면 끔찍하게 여겨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도 나를 잃어가는데 나를 기억하고 위로해줄 가족하나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절망적일지 모르겠다. 나도 늙으면 저렇게 될까 싶어 걱정이 앞설 것이다. 그런의미에서이 작품의 결말은 비극적이라 생각한다. 분명 해피엔딩도 덤덤한 엔딩도 아니다. 주인공 윤승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충격적 두 가지 사실에 마주한 채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은 비극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막닥드려야 할 지극히 현실적인 지점을 이야기 한다. 품위 있는 삶이 경제적 안락, 건강한 신체 , 가족의 존재나 가족간의 유대감 등 어느 하나만으로 충족되지 한음을 윤승을 통해 보이고 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사유해 보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과 같은 내일이 영원히 계속 될거라 여기며 살아간다. 윤승역시 그렇게 살아왔다. 현재에 치여 영원할 것같이 살았고 그것에 떠밀리는지도 모르게 노년을 맞이했다. 열심히는 살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와 구분, 그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녀는 죽음을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그에 맞춰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치매와 안락사는 삶에 대한 본능적인 미련을 가지게 만들 수 밖에 없다. 죽음을 앞둔 모습이 비극적일 수 있지만 우리가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모습이라면 비극이라고 볼 수도 없다. 우리가 어차피 대면해야 할 일상이자 현실이다.

이 소설은 마치 우리 모두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리고 죽음을 통해 내 삶의 의미를 찾아 보라고 말하는 소설처럼 느껴졌다. 품위는 노년이 되는 순간 갖춰지는 그 어떤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이다.










<품위있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소현 소설의 표제작 격인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을 읽으며 노년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특히나 아무리 대비해도 노년의 '품위'는 쉽지 않음을 느끼기도 했다. 그 뒤 품위 있는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어지 않아 여러 형태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이 소설 속에 담긴 서로 다른 6편의 소설이 비추는 삶을 통해서였다.

이 소설집의 두번째 작품인 [어제의 일들]은 자살시도후 장애를 얻게 된 상현의 삶을 다룬다. 첫 번째 작품에서 윤승의 삶이 품위와 멀어졌다는 확신을 갖게 된 건 그녀가 의지했던 아들이나 손주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마당에 그녀를 기억해줄 사람조차 없는 현실이 안쓰러워 보였다. 고독과 외로움은 본명이 사람을 힘들게 하고 품위 있는 삶에 장애 요인으로 보인다 . 하지만 [어제의 일들] 속 상현을 보고 있으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고독과 외로움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가족도 없는 것과 다름없고 장애마저 가진 그녀에게 세상은 벽이라 인식하는 것은 그녀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인식일 뿐이다. 그녀는 사고 이후 그림책 작가로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가족은 없지만 엄마라 부를수 있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존재가 있고, 과거에 집착하시도 고통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불행속에서도 희망적 미래를 고대하며 노력한다. 지금 살아있는게 다행이라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고!

어차피 해피인생이 가득한 인생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능한 일일뿐이다. 인생은 비극에 더가깝고 자주 찾아오는 법이다. 상현이 취하는 삶의 태도야 말로 품위 있는 삶이 어떠한지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집의 세번째 소설인 [지옥의 형태]는 두번째 상현의 소설에서 등장했던 율희가 다시 등장하는 특이한 소설이었다. [어제의 일들]에서 율희는 상현을 질투하며 시기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남편과 자신도 있고 장애가 있지도 않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허덕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수십년 만에 장애를 얻은 상현을 만난 율희는 자신보다 나을 거 하나 없어봬는 상현에게 또다시 시기와 질투, 분노를 내보인다. 상현에 비해 모든 걸 갖춘 율희는 사실 하나디 갖추지 않은 것과 같다. 그녀를 채우고 있는 건 오로지 불안과 고도기 분노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이 그녀의 몸과 정신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너무나도 불행해 보이는 상현이 사실 자신과 달리 불행하지 않고 건강한 모습을 보이자 터져 나온 모습이었다. 품위 있는 삶은 비춰지는 조건들이 풍족한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이루고 있는 나의 조건, 상황인식 속에서의 삶의 의미를 따져보고 그속어서 피어나는 단단한 나의 정체성이 중요함을 이 두 소설은 대비 시키고 있다.

[그 밑, 바로 옆]과 [꾸꾸루 삼촌]은 다소 현실적이지 않은 설정과 상황속에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그 밑, 바로 옆]은 주인공 '견'은 갑작스런 할머니의 사망속에서 자신의 진짜 가족을 찾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할머니가 나의 진짜 가족으로부터 나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결국 진짜 가족과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은 시체, 썩어가는 할머니 곁으로 돌아오게 된다. 결론이 명확히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돌아가신,할머니와의 대화라는 설정과 그 곁에 머문다는 상황이 죽음과 연결지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꾸꾸루 삼촌]에서는 삶에 미련이 많아 떠나지 못하는 한많은 한 삼촌과 조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문제는 조카인 철완은 자신이 죽은 사실을 인지 하고 못하고 있다. 성공하기 위해 가족과 연락도 끓고 가수라는 목표를 위해 노력한다. 그 조카를 방문한 삼촌과의 재회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 죽은 이들끼리의 재회라 볼 수 있다.

이 두 소설은 삶과 죽음에 있어 자신을 둘러싼 사람과 유대 또는 관계가 매우 중요함을 독특한 설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 밑, 바로 옆]에서 견은 진짜 가족을 외면하고 죽은 할머니를 찾아갈 정도로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고 규정짓는 건 할머니와의 기억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꾸꾸루 삼촌]에선 어떤 한 불운, 불행이 인생을 망친 그래서 삶에 미련이 많은 영혼들의 이야기인데 이런 삶을 통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고, 성공을 바라는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하지만 결국 죽은 삼촌을 통해 떠날 때임을 깨닫고 나아가는 철완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두 도설을 보고 있으면 품위있는 삶이 그리 원대한 목표나 거대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내 삶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 여건 들속에서 불운이나 불행없이 소소하게 영위할 수 있는 여건들이 중요얌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지루하다 느끼는 일상이 어떤이에겐 어떤 것보다 소중한 품위가 됨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 소설집의 각기 다른 단편은 서로 다른 인물과 삶그리고 죽음을 이야기 하지만, 공통적으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죽음이 가까이 있고 그리고 죽음을 통한 삶의 의미 즉, 고독의 사유가 필요하고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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