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 히틀러와 독일·미국의 자본가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질문의 책 27
자크 파월 지음, 박영록 옮김 / 오월의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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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우리가 몰랐던 히틀러의 '배후']

인류에게 20세기의 가장 큰 비극은 1차, 2차 세계대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가 있다. 흔히 그 참극의 주요한 원인으로 전쟁미치광이 히틀러와 나치로 호명되는 독일 파시즘이 지목된다. 이러한 문제인식은 히틀러라는 지도자의 그리고 독일이라는 국가의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제국주의적 양태를 지적하기에 적절하다. 즉 이러한 측면은 다소 개인적이고 정치적 맥락에서 사태를 이해하기에 수월하다.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는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그래서 표면에 바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산업계와 금융계로 대표되는 재계가 1,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전쟁의 배경, 촉발, 지속에 있어 직접적인 유발요인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것에 있다.

[히틀러-독일재계의 결합 관계]
이 책에는 "독일재계가 히틀러를 선택(고용)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히틀러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정치계에 등장했을 때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독일 재계의 입장에선 더욱 그러했다. 사회주의와 노동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물에 관심을 가질리 만무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1932년 뒤셀도르프에서 재계 인사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정치적이상을 밝힌 것이 큰 전환점이 된다. 당시 재계는 1918년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적 제도와 계급차를 줄여주는 사회복지제도에 불만이 있었고, 더불어 1차대전에 대한 복수 전쟁과 그것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열망에 가득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는 재계인사들에게 자신이 내건 국가사회주의는 반자본주의가 아닌 반유대자본주의이며 제국주의적 군국주의를 실행할 뜻을 내비친다. 결국 재계는 히틀러에게 갖은 경계적, 정치적지원을 하고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는데 큰 역할을 수립한다.
이 책은 분명히 말한다. '재계는 전쟁을 원했다'고! 단순히 나치정권의 군국주의에 반사이익을 누리기 위한 측면이 아니라, 전쟁의 촉발을 직접적으로 원했고 시작된 전쟁은 끝나지 않기를 염원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뒤 사회주의 사상의 좌파 정치인들을 숙출해내고 재무장 프로그램을 가동함으로써 재계의 요구에 충실히 응답했다. 끊임없이 무기를 생산해내는 재무장 프로그램을 통해 수익은 기업에게 돌아가고, 그 무기 생산의 재원은 사회복지 지출을 줄이고 일반시민에게 부과함으로써 충당하였다. 전쟁내내 철저히 수익의 사유화와 비용의 사회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히틀러정권과 재계의 결합관계는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를 통해 인종을 학살하고 노동력의 도구로써 가학하는 모습을 통해 잘드러난다. 나치스는 유태인, 소련군 포로, 동성애자를 아우슈비츠 등지에서 대량학살하였는데 그중에서 노동력을 제공할 만한 사람은 노예로 일을 시키며 일하다 죽게만들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였다.
이때 독일 기업들은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수용소 근처에 공장을 지었다. 이게파르벤은 아우슈비츠에 부나베르크라는 거대한 공장을 지어 합성고무를 생산했다. 도이체방크가 자금을 댄 사업이었다. 도이체 방크는 나치가 희생자들에게서 훔친 금(희생자의 금니를 뽑음)을 거래하여 큰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돈을 전쟁 자금을 조달하는데 사용하였다. 독일의 지배층은 히틀러의 전쟁이 자신들에게 보상을 하는 한, 혜택을 주는한, 그 전쟁이 끝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민주주의인 미국은 나치정권과 멀다?]

앞서 이야기한 나치정권과 독일 재계의 연관성은 나치정권이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추구한 결과로 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에선 결코 벌어지지 않을 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책의 후반부를 나치스와 미국 재계와의 관계를 집중 조명하면서 미국 재계가 히틀러 정권을 직접지원하고, 그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수익 극대화를 이뤄낸 사례와 증거? 를 끊임없이 까발리고? 있다.
미국 재계를 비롯한 지배층은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그리고 대공황이 야기시킨 문제에 대해 우려하며 자국내 파시스트를 지원하고 외국의 파시스트와 교류를 나누기도 하였다. 또한 독일 재계가 선택한 히틀러에 대해 헨리 포드, 듀폰 가문, 록펠러 가문, 제네럴모터스 등 수많은 기업가가 히틀러를 지지하고 재정지원을 하였다. 그것은 히틀러의 재무장 프로그램이 독일기업을 넘어 미국 기업에게도 큰 수익원이 되기 때문이었다. 전쟁중 히틀러는 모든 석유를 미국 석유트러스트를 통해 공급받았다. 결국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 국경을 넘어 전쟁을 벌이자 뉴욕의 주가는 근래 2년간 가장 높은 수치로 뛰었다.

우리는 2차세계 대전의 결과를 알고 있다. 그리고 나치 전범들의 최후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전쟁을 직접지원하고 가담했던 재계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였던가? 그들은 전쟁중에도 전쟁후에도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1941년이후 상황이 바뀌어 독일과 미국이 적국이던 상황에서도 나치스는 미국계 기업의 독일 자회사 소유를 그대로 인정했고, 미국 기업도 독일에 있는 지분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전쟁후에도 책임이 아니라 되려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돌려 받았다. 결국 전후에 독일의 미국자회사는 전쟁전인 1939년 보다 가치가 훨 높아져있었다. 이후 미국의 기업들도 독일 재건이란 이름하에 수익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를 민주주의체제와 함께묶어 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미국 기업가들이 나치즘 등 다양한 형태의 파시즘을 선호했다는 사실이다. 전쟁을 원하는 자본은 정치형태도, 국적도, 승리의 주체도 중요하지 않다. 자본 앞엔 수익만 있을뿐이다.





[파시즘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자본-파시즘-전쟁의 연결고리를 파고드는 까닭은 자본의 야욕이 파시즘과 전쟁이라는 가면 속에 파묻혀 그 야만적 본질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1,2차 세계대전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결과를 다룸에 있어서 제국주의가 아닌, 히틀러가 아닌, 나치가 아닌 자본의 수익 관점에서 따져 본 적이 과연 있던가?
세계 2차대전으로 파시스트 독재가 수익을 창출하는데 탈월한 도구라는건 입증되었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 물을 수 있어야 있어야 한다.

미국은 왜 끊임없이 전쟁에 관여하고 자주 전쟁을 일으키는가?
미국 정부가 스페인, 포르쿠갈, 그리스, 터키, 이란,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칠레, 아르헨티나, 대한민국, 남베트남, 도미니카공화국, 아이티, 남아프리카공화국... 과 같은 수많은 국가의 파시스트 독재 정권이나 권위주의 정권에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지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파시즘이 사라지면서 과연 자본의 수익창출 욕구도 같이 사라진 것일까! 자본이 존재하고 그 자본력이 수익창출을 원하는 한 파시즘과 전쟁은 그 이름과 형태를 바꿔 다른 가면을 쓰고 찾아 올 것이다.


"전쟁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전쟁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 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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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과 정의 - 대법원의 논쟁으로 한국사회를 보다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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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이 선택이라면..]

판결과 정의는 김영란 전 대법관의 '판결 돌아보기' 책이다. 그녀가 과거의 판결을 들춰내는 것은 판결을 '정의'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말은 곧그간의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다라는 말이 된기도 한다.

도대체 의문스런 말이다. 법은 우리 공동체의 토대를 세우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임을 의심해 본 적이 있던가. 판결이 정의와 멀다는 말은 놀람과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저자는 그의 서문에서부터 자신의 생각을 확고히 전하고 있다. 바로 '선택'이란 말을 통해서다. "판결은 선택이다" 그녀는 대법원으로 오면서 여러 재판연구관들을 만났고, 양립할 수 없어보이던 분절된 요소들이 논리성을 갖춘 판단 근거로 토대를 갖춰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문제는 연구관에 따라, 때로는 한 연구관이 상반되는 증거들을 토대로 논리성을 갖춘 2개의 판결보고서를 만들어내는 모습이었다. 정의를 세우는 일은 답을 가리는 일이라 생각해온 관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때의 경험은 저자에겐 두려움 같은 것이었고 그 두려움이 10여년이 넘도록 근무 내내 계속 되었음을 고백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여러 판례들로 이뤄진 개별주제는 각기 다른 정의 기준에 따라 판결이 선택의 결과가 되는 과정과 가능성들을 내비치고 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누구나 알만한 굵직한 사례들, 예를들어 삼성엑스파일, kiko사건,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판결이 진짜 정의로운 것이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판결들이 선택한 결과와 그 이유를 해부하고 있는데 , 그 이유를 이를테면 정치적 선택, 경제적 선택, 관습(기득권)적 선택이라고 불리울 만한 것들이라 보고 있다. 판결 결과는 곧 정의라는 이름 아래 헌법정신의 가치 축소, 계약효율성 맹신, 구조적불평등, 자기책임의 무한화가 의식 없이 그대로 적용되고 그것이 판결로 선택되는데에 다수의견의 중심을 이룬다는 것을 지적한다.물론 모든 판결이 선택된다거나 대다수가 그렇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례들에 대한 지적과 의문점을 따라 가다보면 그러한 선택의 가능성을 배제하긴 결코 쉬운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명확해져 간다.
이러한 현실 문제 앞에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미시적 판사의 거시적 판결]

책의 후반부는 사법시스템 속 판결이 어떤식으로든 정치와 결부된다는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사법의 정치화 또는 정치의 사법화가 그 것이다. 광우병 보도, 삼성엑스파일 등의 사례를 통해 표면적으로 판결의 쟁점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프라이버시이냐 언론의자유(또는 공공성 측면의 국민의 알권리)이냐의 대립으로 비춰지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선택의 결과임을 부인 또는 배제하기 어렵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 대해 저자는 '피할 수 없더라도 노력해야 한다'는 관점인듯하다.
판결이 언제나 객관적이어서 뭐든지 판결해줄 수 있는 만능이 아니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분명히 제한 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그러한 사회적 인식으로통해서 정치가 사법화되고 사법이 정치화 하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본다.

판결의 선택, 그리고 정의에 대한 저자의 이러한 이야기는 독자와 일반 대중에게 모든 권력에 대한 감시 레이더를 끄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구나가 생각하는 법은 곧 정의라는 관념에서 한발짝 물러서서 우리 사회의 권력(정치,경제,사회)구조가 판결의 과정에서, 그 이면에서 그 권력을 수호하는 지배논리로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심히 살펴 볼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저자는 오랜 대법관 생활을 통해 우리의 판결과정이 그 사건을 촉발시킨 거시적 차원의 배경과 맥락 그리고 본질을 고려하는 것을 놓치고 있다고 인식한다. 사건의 증거와 사실을 토대로 조문하나나를 분석하고 따지는 일은 매우 중차대한 일임은 분명하나, 미시적 차원의 타당성 만을 고려하게 되는 현재의 상황은 어떤 행동이나 사건의 원인이 보다 큰 차원의 구조적 본질에 있을 때, 그것을 놓치게 된다는 의미 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법에 대해서도 상상과 생각이 필요하다 말한다. '선택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에도 세계의 미래와 법의 미래를 생각해보고 상상해 보는 일들은 필요하다. '
판결의 과정은 미시적이나 판결은 사회적이고 거시적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어떤 모순된 본질이 맥락과 배경에 존재하는 한 사건과 행위를 쓰여진 그대로 해석하는 것만으론 우리 사회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러한 일은 쉬운일이 아니겠으나 포기해서도 안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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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는 기적이 산다 - 나를 찾아 떠나는 치유의 여행
조문희 지음 / 미다스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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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하는 글쓰기]'글쓰기에는 기적이 산다'를 읽고,


이 책은 "글은 나를 향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를 향해 본 적이 있었던가.
'내겐 내가 없다.'
언제부턴가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 불안과 공허. 살아있음은, 살아가고 있음은 분명한데 나와 괴리된 그것은 무엇인가? 자꾸만 거기엔 내가 없다는 생각으로 애워싸인다.

저자의 말대로 예고편이란 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인생은 언제나 훅 들어온다. 카운터펀치 앞에 그건 반칙이라고, 폭력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잠깐의 쉼•생각 앞에서조차 인생은 무심히 그리고 계속 흘러갈 뿐이다.
그런 불안을 애써 잊고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책읽기는 사실 매우 처절한 책읽기였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으로 시간을 가득 채워나갔다. 나쁜 것이 나에게 스며들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책에서 만나는 깊고, 새롭고, 재미있고, 다양한 이야기들로도 괜찮다 여겼다.

《글쓰기에는 기적이 산다》를 읽고나니 그걸로는 안되겠다 싶다. 나만의, 자기언어로 가득차 있는 글을 만나보고 싶다. 나는 단 한번도 내 이야기를 써 본적이 없다.
나는 스스로를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라 여긴 탓이기도하지만, 과거의 나와 마주하며 그 속의 상처와 직면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결코 내 의지가 자유롭지도 않았던 과거지만, 이상하게 그 과거는 늘 나를 작게 만들었다.

이 책은 '혼란투성이인 나로부터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나뿐이라고, 글쓰기가 그 방편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책이 내 인생에 훅 들어온 카운터펀치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든다. 지금껏과는 전혀 다른 반전의 시작과 같은 카운터!
나를 써 봄으로써 나, 나의 언어, 나의 삶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시간이었다.


♤ 인상적인 구절
"잘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그런 글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 함부로 쓰거나 글만 번지르르해 보이는 그런, 글만 잘난 글은 될 수 없다는 생각! 절대 내가 쓴 글과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그런 글은 쓰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내가 쓴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다짐을 오늘도 내일도 할 것이다."(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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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에 대하여 - 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한승동 옮김 / 돌베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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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화적 공존이 가능한 나라인가?]
_책임에 대하여_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평화적 공존이 가능한 나라인가?]​

《책임에 대하여》는 단순히 해묵은 과거를 들쳐내는 식의 책임 추궁이나 일본의 응답부재 문제만을 거론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책임'이란 가치에 대해 다층적인 논의를 이어가기에 어느덧 두 사람의 대화에 오롯히 집중하며 읽어나갔다.


두 지성인의 대담은 조선인의 내셔널리티(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와 폭력의 피해자)관점, 그 이상의 본질적이고도 총체적인 일본과 일본인의 모순에 깊이 파고들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사회의 현재성이 어떤 역사적 맥락속에서 자리하게 되었는지 보다 뚜렷히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현재 일본이 처한 사회적, 정치적 모순을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는데,

하나는 2차 대전 패전 이후 일관되게 보여 온 책임의 부인(전쟁책임, 전후책임, 식민지배)이 아베정권을 강력히 지지하는 일부세력이 아닌 중심부 일본 국민 전체가 그에 대한 판단을 회피해왔다는 것과 그 중심엔 천황제가 자리하고 있음을 밝히는 일이다.

또 하나는 그러한 '부인'속에서도 일본이 경제적 번영과 허구적 평화를 유지해왔으나 지진과 원전사고를 계기로 뚜렷해진 도금 민주주의의 실체와 희생의 시스템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이다.

마지막 하나는 분단과 차별 그리고 가해로 대변되는 일본 근대사의 폭력적 침략의도가 결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님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세 부분의 문제인식은 일본의 근대사 전체를 관통하는, 즉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그 역사적 흐름속에 침략 본성이 일관되게 내포되어 있음을 전하는 것이다.











[잘못을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천황제와 도금 민주주의]​


그 동안 우리는 일본의 부인과 책임 회피에 대해 아베 정권과 일부 강경 극우파의 왜곡 정도로만 여겨온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저자인 서경식과 다카하시는 아베정권이 결코 일본 국민의 의사에 반해서 독재를 펼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엄연히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민주적으로 존속하고 있으며, 그러한 맥락에는 제국시대 이래의 본성이라 할만한 일본의 속성과 배경이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책임 회피가 일본의 본성이 될 수 밖에 없음은 천황제라는 제도가 전체주의적 집단성과 결합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근대사적 역사는 모두 천황제 하 신민들이 천황의 뜻을 이행한 결과이다. 그래서 이웃민족을 상대로 한 일본제국의 무자비한 약탈성이나 2차 대전의 폭주와 패전의 책임도 모두 천황에게 지워져야만 한다. 하지만 일본의 천황은 그 잘못과 책임을 단 한번도 인정한 적 없다. 도의적 차원의 사과 조차 없었는데 그것은 천황제의 태생적 성격이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 완전함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경기침체, 냉전해소 등으로 일본을 떠받치던 조건들이 변하자 드러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일본이 그토록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에는 잘못을 할 수 없는 주체인 천황의 잘못을 천황제가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집단주의적 문화속 개인의 자율적 책임의식과 비판의식이 꽃피울 수 없었던 환경이 한 몫했다.



일본은 패전 후 신민에서 국민이 되었지만, 상징천황의 존재는 국민을 여전히 신민으로 묶어두고 있으며, 더욱이 아베 정권 하에서 일본 국민은 신민으로의 자발적 회귀라 부를 만큼 주체성과 책임의식이 결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이 가히 메이지 이후 배태시켜 온 본성이라 할만하다. 전후의 민주주의와 평화주의 체제는 마치 이 본성을 잠시 가리고 있던 도금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로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 오키나와 희생의 영속화]​

일본 제국이 타이완, 조선, 만주, 필리핀 등으로 야욕의 손을 뻗치우기 이전 가장 먼저 침탈과 식민지배를 자행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이다. 중국과 일본 한국의 영향을 모두 받은 류큐왕국으로서 일정한 독립성을 지녀 온 그 나라를 제국 일본은 군사적인 위협 으로 복속시켰다. 류큐나라 사람들의 고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후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는 것과 맞교환으로 오키나와의 시정권이 미국 손에 넘어갔으며, 1972년의 오키나와 반환 이후부터는 1972년까지의 미군 지배 시대에 존치된 기지들이 고정화 되어 미군 시설 중 70퍼센트가 몰려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이 기지를 통해 많은 전쟁과 침략의 전진 기지로 활용)

미군기지 문제는 식민주의의 현재적 형태이며 오키나와는 일본,미국의 이중 식민주의에 노출되었다. 그리하여 오키나와 사람들의 인권은 온갖 형태로 침해당해왔다.

사실상 일본 본토는 오키나와에 대한 식민지배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수많은 희생과 차별, 배제를 통해서 그 지배의 폭력성을 스스로 노출시키고 있다.


2차 세계 대전의 결말로 일본은 단연코 패전했으나, 한국 등에의 식민지배 및 위안부 문제나 오키나와에 강요하는 영속적 희생 시스템을 보고 있으면 이 나라가 결코 패전한 나라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책임의식과 문제의식 없는 일본 본토이다. 그들은 우리 모두를 위협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 자신까지도.....









[타국을 넘어 스스로의 미래마저 위협하는 일본]​

일본이 전쟁과 그 과정에서 행한 만행에 대한 책임을 모두 불문에 부쳐왔다는 점은 피해당사자인 우리에게 지속적인 공분을 불러왔다. 이에 더불어 저자 서경식과 다카하시의 대담은 일본 자국내에서도 작동되는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과 분리 그리고 배제의 시스템이 정말 21세기 강대국이자 초현대 사회의 면모를 지닌 일본이 안전한 정상국가가 맞는지 에 대해 깊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진짜 위험은 의심에만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현실적이고도 실재적인 문제는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응답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가까운 인접국가로서 서로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신뢰와 인정에 대한 응답을 받지도 느낄 수도 없는 상황 때문이다.

위험 신호는 곳곳에서 뚜렷해지고 있다. 아베 정권은 전후 70년 담화에서 러일전쟁을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자찬하였다.


아베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요시다 쇼인은 대동아 공영권을 부르짖던 시대부터 대륙사상의 선구자로 떠받들여졌고, 전후에는 역사 소설이나 대하드라마에서는 개국의 예언자라는 이미지로 영웅시 되어왔다. 2015년에는 대외침략론을 가진 쇼카손주쿠의 건물이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대외 침략 정당화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수 있으며, 아베 정권과 자민당의 개헌시도는 이러한 인식의 최종 형태로서 달성하려 한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은 심각한 원전사고를 동반하였다. 그동안 일본이 원전사고의 피해와 부정적 영향을 은폐, 축소시켜왔다는 기사가 최근 한국쪽에서 나오기도 했다. 그것은 원전의 피해는 일본뿐만 아니라 근접국가인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일본이 원전 재가동과 관련하여 국가나 전력회사가 완전히 낙관하는 부분이다.

원전 재가동은 자국민만 아니라 주위 민족, 지구환경, 다음 세대에 대한 명확한 가해행위이다. 재가동으로 인해 축적되는 방사성 폐기물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원전사고에 대한 인정, 사죄, 원인규명과 책임이 명확히 이뤄져야 함에도 모든것이 가려지고 유야무야 되는 실정이다. 아베는 재난 6주년 담화에서 원전사고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원전이야기는 감쳐지고 일본의 정치는 북한의 위협, 도쿄올림픽, 천황의 양위 등의 토픽만 중심이 된다. 이들 정치적 자원을 여당과 지배층이 자기 이익의 확장을 위해 철저히 이용하고 있다.


근대 일본 국가는 전쟁과 차별로 만들어 졌다. 1945년의 패전은 종전으로 탈바꿈되고, 주권회복을 위해 도입한 민주주의는 도금에 지나지 않으며 평화주의 헌법은 허구에 불가하다.

아베를 비롯한 우파는 또 다시 전쟁과 차별의 시대를 본격화 하려 한다.

이 시대의 진실을 전해야 할 매스미디어는 전쟁과 차별의 시대에 편승하고 있으며 일본 국민의 절대 다수는 아베에 동조하거나 무감각할 뿐이다.

우리는 일본에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상식적인 응답요구를 하고 있다. 당신들은 우리의 이웃국가로서 공동체 아니 최소한의 공존의식이라도 있는가? 과연 이러한 질문에 일본은 어떤 응답을 보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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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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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우주적 로맨스의 현실감각>



<우주적 로맨스의 현실감각>

이 SF같은 로맨스 소설이 끌린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으로 만드는 것은 한아가 외계인 남자친구를 만나서여서가 아니다. 물론 처음 시작은 나 좋다고 2만 광년을 달려온 외계인에 호기심도 있었다. 그리고 엑스 남친인 경민이 나를 두고 우주여행을 떠나가 버린 일에 대한 분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SF같은 사랑의 완성은 지극히 현실의 반영이자 현실을 일깨우는 측면이 강하다.

옛 남친인 엑스(경민)과 현 남친인 경민은 얼굴이 같다. 엑스가 우주여행을 대가로 한아를 운명의 대상으로 여겨 우주를 초월해 온 외계인에 자신의 모습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경민이 자신의 슈트를 엑스와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했지만 사실 경민은 엑스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외양이 똑같은 두사람?을 다른 존재로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아뿐이다.

한아에게 경민(원래의 경민인 엑스도 포함)은 특별한 사랑을 일컫는 보통명사와 같다. 엑스와 11년간 사귀면서 한아 자신만으로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엑스를 온통 휘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같이 있는 순간만큼은 충실하고 사랑스러웠던 엑스는 한아에게 충분히 특별한 존재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엑스가 그렇게 떠나지만 않았다면 엑스가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런 한아였다.

하지만 현재 한아에게 경민은 더이상 엑스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아 옆에 있는 지금의 경민이 한아에게 누구보다 특별한 사랑이다. 그 감정은 무엇보다 명확하다. 경민이 외계인이든 아니든 그 사실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한아는 경민의 껍데기 너머의 그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있다. 경민이란 보통명사가 누구보다 경민에게 어울리는 이름인 이유이다.

경민은 한아에게 그 어떤 사랑보다 특별한 사랑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경민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이따금씩 초록불을 내뿜어 한아를 당황시키기도 했지만, 경민은 한아의 감정과 말과 행동 그대로에 집중하고 바라봐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 둘은 대화가 잘 통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연스럽게 한아는 엑스에 대한 감정도 원망에서 그 어떤것도 아닌 감정으로 변화되어갔다.

한아와 경민은 21세기 내내 유한하지만 결코 짧지 않은 그 순간 만큼은 온우주가 부러워할 만큼의 특별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하였다.
사실 누구나 이런 온전하고 완성적인 사랑을 꿈꾼다. 꿈꾸는 사람이 많다는 건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렵다는 뜻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아와 경민의 로맨스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해 매우 현실적인 태도와 그 조건에 대한 현실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 사랑이 이토록 순수하고 열렬한 이유는 결코 지구인과 외계인이 만났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한아와 경민이 특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특별히 대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엑스와 한아의 관계와 비교해 보면, 엑스에 비해 경민은 한아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 사랑은 타오르는 감정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헌신을 의미한다. 경민은 한아의 전통적이고 오래된 아름다운 것을 복원하는 행동과 절제적인 삶을 자체로 특별하게 봐라봐주었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에 묵묵히 또 귀기울여 집중해주었다. 그리고 경민은 지구인이 아니기에 완전히 모방할 수 없는 여건, 이를 테면 냄새를 맡은 감각기관인 코가 경민에게는 사실 다른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한아가 자신과의 온전한 사랑 감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신의 코를 그녀의 머리 결에 파묻는 행동을 하곤 했다. 또 경민은 한아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슈트(얼굴)를 업데이트 했다.

경민의 배려와 사랑은 외계인이라는 특정한 조건속에서 이뤄지는 형태였지만 그 본질은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특별히 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특별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특별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그런 사랑이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특별한 사랑은 관계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특별하게 바라보며 생겨나는 희생과 배려라는 노력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혹시 자신이 연인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라고 느끼고 있다면 매우 행복한 사람이다.
그속엔 사랑이란 감정보다 더 본질적으로 배려와 헌신을 통해 그 사랑의 특별함이 유지되도록 하는 상대방이 노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 . #지구에서한아뿐#정세랑#우주적로맨스#현실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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