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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종말 - 개정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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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에 청년실업률이 8%를 넘어섰다, 고용 없는 성장이다 신문마다 방송마다 난리가 아니다. 우리는 학교 특성상 이러한 경제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국한되고, 그들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의 한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 어려운 사회적 원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예컨대, 최근 자살률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 것을 단순히 당사자들의 성격문제로만 설명하기에는 어렵다.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생계의 문제가 커지고,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자살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가볍게 생각하는 의식이 일반화되면서 자살에의 선택을 수월하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자살률의 증가는 개인적인 성격이나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조건 및 상황의 변화와 이에 따른 자살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구조나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할 수 있다.
이렇듯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개인들의 행위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 속에서 그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함을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단순하게 개인들의 실업으로 볼 수도 있는 상황을 제3차 산업혁명이라 부르는 기술의 진전에 따른 노동자의 필요성 감소로 설명한다. 노동자 없는 세상.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동화를 핵심으로 진행된 제3차 산업혁명에 따라, 로봇화한 컴퓨터 시스템이 궁극적으로는 지금의 노동자들을 대치하고 있다는, 대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세세하고 구체적인 예를 통하지 않고서도, 실제로 우리생활 곳곳에서 기술의 발달로 대변되는 기계가 인력을 대체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흔한 예로 지하철의 무인승차권 발매기나, 금융기관에서 행하고 있는 폰뱅킹이나 인터넷뱅킹은 직접 은행에 가지 않고서도 관련 업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전에 비해 은행인력이 적게 필요할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대면접촉을 통하지 않고서도 필요한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편리함에 묻혀서 그 일을 수행하던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졌음은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다분히 가치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며 모두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기계화에 따른 생산성 향상과, 여가시간의 확대라고 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실제로 기술의 발전이라는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오히려 부정적이고 어두운 현재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기술의 진전에 따른, 이미 사회 곳곳에서 누리고 있는 편리함과 풍요로움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편리함에 가려져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바라볼 수 있고, 능력과 성향이라는 다분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작용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찾아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들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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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최전선
허동현·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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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과목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나 사회과목을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 우리의 생활에 얼마나 닿아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난 과거의 사실들이나, 우리나라의 지형이나 날씨, 지명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역사와 지리는 가장 필요 없는 과목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역사 최전선>은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알아야하고, 배워야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다. 서문에서 ‘논쟁의 출발점은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처한 상황과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 세기 전 청 ․ 일 두 나라와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근대라는 화두를 놓고 고심했던 선조들처럼, 오늘날 우리도 미국과 중국의 각축 속에서 나아갈 바를 몰라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라고 밝히고 있듯이 말이다.
흔히 말하길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과거의 경험이라는 축적된 date base를 통해서 현재의 모습을 성찰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것, 과거의 역사가 현재에 그대로 반복되어 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구조적 패턴이나 유사한 양상을 발견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책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최익현과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빈 라덴의 미국 테러는 그 양상에 있어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전통적인 질서를 지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묶을 수 있을 것이다.
학교수업시간의 시대구분처럼, 고대 ․ 중세 ․ 근세 ․ 근대는 딱딱 시기를 기준하여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흐름이며 각각의 시대는 이전시대를 기반을 두어 이루어진다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 과거가 갖는 의미를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황만을 파악하고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형성되어온 지난날의 모습들까지도 이해해야 한다. 즉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문제들도 하나씩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역사란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한 나라의, 사회의 지나온 과정이며, 그것이 현재의 나라와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왔음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생활하고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존재의 역사성을 느끼는 것, 역사가 내 삶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 결국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 아닐까.
<우리역사 최전선>을 통해서 저자들이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다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대학에 와서 수강한 역사과 수업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사란 무엇인가” 강의였다. 중 ․ 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교과서로 상징되는 절대적이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라 생각했던 것들이 가장 사회적으로 합의된 내용들이며 얼마든지 다른 관점에서 해석 가능한 것이다, 수업을 통해 배운 것은 수많은 해석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하는 것이 그 수업을 어려워한 이유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 책은 “역사적 상상에 관한 글. 별로 행복하지 않은 시대, 불행했던 시절, 실패한 역사에 대한 상상. 결국 식민지화로 귀결되고 만 개화기의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더 이상 상상력을 전개시킬 수 없는 한계지점, 이렇게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실천적 딜레마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일한 하나의 사건을 두고서도 사건자체와 그 영향력, 원인, 그리고 현재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다르게 파악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제 3의, 제4의 해석역시 가능함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교과서를 읽든, 그 외의 역사관련 책을 읽음에 있어서도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고, 그러한 다양한 관점들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관점을 선택하고 나아가, 자신의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요즘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시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도 그렇다면 다양한 관점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짐에도 역사학이 문학과 다른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야말로 “발명”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제한적이나마 근거자료를 통해서 합리적 상상으로 해석을 전개하는, 과거 사실에 대한 “발견”인 것이다.
과거의 사실을 왜곡하고, 그릇된 해석을 통하여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감추려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인 것이다. 역사를 기록할 줄만 알고, 그 역사를 통해 배울 줄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처럼 올바르지 못한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바르게 비춰낼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며 구체적으로 나아갈 방향 역시 왜곡되어 나타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철저하게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며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독일국민들과, 원폭공원을 남겨둔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과거 잘못에 대한 정리와 언급 없이 되려 미화시키려하는 일본의 차이는 앞으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게 될 거라 생각한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역사수업 시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단순히 사실만은 절대시하여 제시하고 있는 수업을 일주일에 한번, 두 번 더 받는다고 하여서 학생들로 하여금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물론 늘어난 수업 시간을 통해서 교사가 적절히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이슈들을 파악하여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교과서와 입시로부터 수업이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는 얼마든지 짐작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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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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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活着)'이라는 말은 우리 중국말에서는 하나의 단어이며 힘이 넘치는 말이다. 그 힘은 절규에서 나오는 것도, 박차고 나아가는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내와 감수이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감내를 우리의 책임으로 부여하며, 우리의 행복과 고난, 무료함과 일상의 현실을 감수하게 한다.

 

 한평생을 살아간다는 것, 사실은 살아낸다는 말이 옳을지도 몰라.

박민규가 말했던 사람들의 산수처럼.

소소하고 지지부진한 일련의 것들을 더하고 빼고 하다보면 어느새 끝나버리는 우리의 산수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거센 생명력의 발산도 아니요, 한평생 꿈과 목표의 도달도 아니요, 그저 그런 것들의 더하기와 빼기 정도.

 특출나게 빼어날 것도 한숨날정도로 바닥일 것도 없는 맹맹한 따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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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 - 제5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이지형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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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에서

습작하기 시작하면서 읽은 여류소설가들의 이야기들에서 느꼈다던.

하나같이 방안에 쳐박혀서 우울해하거나

원하지 않은 결혼은 왜 해가지고 불륜을 일으켜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부분에서 푸 하고 웃어버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댓글이라도 달고 싶었다는 ㅋ

그 소설들을 폄하하려는게 아니라.

 그저 정말.

이.해.할.수.없.었.다.는 거다. 

 

"모던보이의 불안한 첫사랑"

말 그대로 ^^

 나라를 찾는 것보다 변심한 애인을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낭만의 화신 이해명과 거짓말을 밥먹듯 해대는 조난실.

거기다 시대배경은 1930년대 경성.

 페이지마다 슬깃거리는 작가의 장난들( 20세기모던이미지댄스구락부라던지, 스타박스 다방같은ㅋ)

 무겁지 않은 내용.

뭐 가볍달수도 있을.

조금은 시대배경과 내용이 섞이지 않아 들뜨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특유의 탄력적이랄까? 싶은 표현이 뽕망치 때리는 연예프로에서 살짝 비켜치는 재미같이 신선하다. 

 결국 변심한 애인과 잃어버린 나라를 한방에 찾을 기회를 뒤로하고 출근해버린 이해명에게 한표 날리는게 요즘의 시대상일까..?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꽤 물음표가 남는다.

 

“지하철에서 거짓을 떠드는 정신병자들… 그들에게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힘과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작가의 말에서 또 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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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캘린더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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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
예컨대 책에서처럼,

첫 출산을 앞둔 엄마

해외에 있는 남편을 따라 이민을 준비하는 부인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결혼을 앞둔 여자.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실이지만,

손에 만져지지 않아 막연하기만한 것들. 어떤 책이었더라.

두려움(혹은 공포^^)은 그 대상이 없기때문에 생긴다던...

 

 요즘같아선 그저 옳습니다 싶다.

 

100에서 0만큼 안다면 낯설고 두렵겠지만, 기대나 설레임일 수 있겠지만, 20이나 30? 뭐 그정도 ㅋ

전체를 아는 것도 아니고,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

비루한 상태가 불안이되고 두려움의 씨앗이 아닐까 생각해.

그 명확하지 못함이 점점 머리속에서 점점 크기를 더해가다,

결국 실체를 대면하게 되면 뭐 기쁨이랄지 슬픔이랄지 아무튼 그런

뚜렷한 기분이 되는 거겠지

막연한 불안감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해보면 불안이란 것 자체는 good 도 아니고 bad도 아닌게 아닐까...

지금 나를 꽁꽁 싸매고 있는 이 녀석도 말야

100에서 이제 겨우 25를 알았을 뿐이니까,

불안한게 당연해!

라고 생각해야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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