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최전선
허동현·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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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른 과목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나 사회과목을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 우리의 생활에 얼마나 닿아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난 과거의 사실들이나, 우리나라의 지형이나 날씨, 지명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역사와 지리는 가장 필요 없는 과목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역사 최전선>은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알아야하고, 배워야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다. 서문에서 ‘논쟁의 출발점은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처한 상황과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 세기 전 청 ․ 일 두 나라와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근대라는 화두를 놓고 고심했던 선조들처럼, 오늘날 우리도 미국과 중국의 각축 속에서 나아갈 바를 몰라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라고 밝히고 있듯이 말이다.
흔히 말하길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과거의 경험이라는 축적된 date base를 통해서 현재의 모습을 성찰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것, 과거의 역사가 현재에 그대로 반복되어 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구조적 패턴이나 유사한 양상을 발견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책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최익현과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빈 라덴의 미국 테러는 그 양상에 있어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전통적인 질서를 지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묶을 수 있을 것이다.
학교수업시간의 시대구분처럼, 고대 ․ 중세 ․ 근세 ․ 근대는 딱딱 시기를 기준하여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흐름이며 각각의 시대는 이전시대를 기반을 두어 이루어진다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 과거가 갖는 의미를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황만을 파악하고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형성되어온 지난날의 모습들까지도 이해해야 한다. 즉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문제들도 하나씩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역사란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한 나라의, 사회의 지나온 과정이며, 그것이 현재의 나라와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왔음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생활하고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존재의 역사성을 느끼는 것, 역사가 내 삶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 결국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 아닐까.
<우리역사 최전선>을 통해서 저자들이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다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대학에 와서 수강한 역사과 수업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사란 무엇인가” 강의였다. 중 ․ 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교과서로 상징되는 절대적이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라 생각했던 것들이 가장 사회적으로 합의된 내용들이며 얼마든지 다른 관점에서 해석 가능한 것이다, 수업을 통해 배운 것은 수많은 해석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하는 것이 그 수업을 어려워한 이유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 책은 “역사적 상상에 관한 글. 별로 행복하지 않은 시대, 불행했던 시절, 실패한 역사에 대한 상상. 결국 식민지화로 귀결되고 만 개화기의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더 이상 상상력을 전개시킬 수 없는 한계지점, 이렇게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실천적 딜레마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일한 하나의 사건을 두고서도 사건자체와 그 영향력, 원인, 그리고 현재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다르게 파악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제 3의, 제4의 해석역시 가능함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교과서를 읽든, 그 외의 역사관련 책을 읽음에 있어서도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의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고, 그러한 다양한 관점들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관점을 선택하고 나아가, 자신의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요즘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시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도 그렇다면 다양한 관점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짐에도 역사학이 문학과 다른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야말로 “발명”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제한적이나마 근거자료를 통해서 합리적 상상으로 해석을 전개하는, 과거 사실에 대한 “발견”인 것이다.
과거의 사실을 왜곡하고, 그릇된 해석을 통하여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감추려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인 것이다. 역사를 기록할 줄만 알고, 그 역사를 통해 배울 줄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처럼 올바르지 못한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바르게 비춰낼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며 구체적으로 나아갈 방향 역시 왜곡되어 나타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철저하게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며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독일국민들과, 원폭공원을 남겨둔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과거 잘못에 대한 정리와 언급 없이 되려 미화시키려하는 일본의 차이는 앞으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게 될 거라 생각한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역사수업 시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단순히 사실만은 절대시하여 제시하고 있는 수업을 일주일에 한번, 두 번 더 받는다고 하여서 학생들로 하여금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물론 늘어난 수업 시간을 통해서 교사가 적절히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이슈들을 파악하여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교과서와 입시로부터 수업이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는 얼마든지 짐작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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