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마음챙김
이응욱 지음 / 책과나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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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가진 것을 찾기 위해 떠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싯다르타』와 『연금술사』를 떠올렸다. 가장 먼 곳까지 돌아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이야기들. 그 여정은 우리의 삶과도 닮아 있다. 우리 역시 이미 가진 것을 알지 못한 채 삶이라는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이 도달하는 곳은 언제나 외부가 아니라 내면이다.

감정은 억누르거나 교정의 대상이 될 때, 분출되지 못한 에너지가 되어 질병으로 남거나 사회적 일탈과 범죄로 표출되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감정을 알아차리고 수용하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행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감정이 앞서는 순간, 즉각적인 반응 대신 자신의 상태를 의식하고 알아차리는 데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의 실천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가만히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이며 매 순간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정해진 시간에 하는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삶을 지속하기 위해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알아차림’이다. 행동과 생각, 감정을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힘. 그것이 있을 때 우리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보다 균형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조금 더 이른 나이에 이 책을 읽었다면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욕망이 강하고 증명해야 할 것이 많았던 시절, 명상은 비생산적이고 한가한 행위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시간들이 쌓이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응시하는 일, 반응하기 전에 감정의 뿌리를 묻는 일, ‘내가 당장 원하는 것’보다 ‘이 상황에서 더 성숙한 선택은 무엇인가’를 묻는 태도가 얼마나 깊은 전환을 가져오는지.

책은 자아의 욕망과 영혼의 바람을 구분한다. 결핍과 불안에서 비롯된 욕망은 더 많은 성취를 요구하지만, 영혼은 외적 성공보다 내면의 성숙을 향한다. 실패와 상실조차 공감과 인내를 배우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도전으로 다가온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기에, “고통은 현재에 대한 저항에서 생겨난다.”는 문장은 더욱 오래 남는다. 내맡김과 수용의 자세로 통제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삶과 관계 또한 자연스러운 조화를 찾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풍요로워진 시대라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과 성취를 강요받는다. 그 흐름에서 밀려나면 곧바로 낙오와 실패로 규정된다. 그래서인지 마음챙김은 하나의 유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덮고 나면 마음챙김이 현대인의 제한된 사고를 넓히고, 생존을 넘어 성숙으로 나아가게 하는 태도임을 알게 된다.

알아차림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덜 흔들리고, 나를 증명하려는 분주함도 잦아든다. 무언가를 더 얻지 않아도 괜찮고, 조금 모자라도 괜찮다. 그저 이렇게 숨 쉬고 있는 지금이 이미 충분하다는 감각이 찾아온다. 그때 삶은 이전보다 한층 안정된 시간 속에서 훨씬 단단해진다.

『오늘도, 마음챙김』을 통해 스스로의 시간을 감각하고 내면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은 삶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연습일지 모른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고 싶은 이들, 반복되는 감정에 지쳐 자신을 다시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미 충분한 자신을 알아차리는 힘을 건네는 책이다.

#오늘도마음챙김 #심리학 #마음챙김 #명상 #도서추천

*도서증정 @booknamu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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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을 위한 철학 - 나를 짓누르는 삶의 중력을 거슬러 은총으로 나아가는 길
시몬 베유 지음, 한소희 엮음 / 구텐베르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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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프랑스의 총명한 지성인이었던 시몬 베유는 짧고도 강렬한 생의 이력만으로도 눈에 띄지만, 무엇보다 시대를 뛰어넘는 영혼의 울림을 지닌 그녀만의 철학으로 오늘의 삶을 비추는 지혜를 남겼다.

베유의 사유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농밀한 언어와 깊은 성찰은 여러 번 곱씹어야 비로소 의미가 드러난다. 처음에는 지성인의 통찰로만 보이던 문장도, 천천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그것이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한 영혼의 치열한 체험에서 응축된 고백임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글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간의 영혼을 응시한 깊이 때문일 것이다. 얕은 물은 투명하지만, 깊은 물은 어둡게 보인다. 베유의 문장은 그 깊이만큼 쉽게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를 계속 사유하게 만든다. 이 책은 그런 그녀의 사상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엮어,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덕분에 비로소 우리는 그녀의 지혜와 대화할 수 있게 된다.

베유의 철학은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각자는 성취와 효율을 요구받으며 견고한 자아를 구축해왔다. 익숙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굳어진 언어로 세계를 해석한다. 관점을 바꾸는 일은 불편하며, 때로는 자신이 옳다고 믿어온 기반을 허무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더욱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베유가 말한 ‘주의’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을 비우는 태도는 자아를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안에 갇힌 시야를 넓히기 위함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자아일수록 더 깊은 질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확장된다. 그녀의 사유는 우리를 가장 본질적인 물음 앞에 세운다. 그 질문 앞에 잠시 멈추는 일, 어쩌면 그것이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은 뒤 베유의 저작을 다시 펼쳤을 때, 문장들이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 보이지 않던 주석과 해제가 생겨난 듯 그녀의 생각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난해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표현들이 하나의 맥락 속에서 연결되었고, 왜 그런 언어를 선택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베유의 사유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무심히 붙들고 있던 편견을 내려놓도록 이끌었다. 덕분에 나는 그녀의 문장을 해석하려 애쓰기보다, 그 사유 앞에 한 걸음 물러서 열린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열심히 쟁취하라고 부추기는 시대 속에서 분주히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무기력해진 자신을 만나게 된다. 쉬는 일이 불편해지고, 비워진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에 죄책감마저 느낀다. 그런 현대인들에게 베유의 철학은 깊은 울림을 건넨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억지로 무언가를 밀어붙이기보다 자신의 시간에 잠시 공백을 허용해보는 일. 그 멈춤 속에서 비로소, 삶이 우리를 향해 건네는 빛을 감지하게 된다.

더 얻기 위해 애쓰기보다, 비워두는 태도.
어쩌면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깊은 용기일지 모른다.

#아무것도하고싶지않은날을위한철학 #시몬베유 #철학 #인문에세이 #서평

*도서증정 @gutenberg.pub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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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
허나영 지음 / 비에이블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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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모든 지붕 위에 내린다”는 말이 있다. 고통은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상처는 유난히 크게 느껴져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늘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문득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상실과 불안, 가난과 질병, 관계의 파열 같은 시간을 지나게 되면 쳇바퀴처럼 무심히 흘러가던 일상도 멈춰 선다. 그제야 우리는 묻게 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나는 어떤 감정 속에 있는지, 그리고 삶이란 무엇인지.

“내면에 암울한 비밀을 지니지 않은 인간은 이야기할 것이 없다.” 작가 모리아크의 말이다. 흔히 예술은 고통에서 탄생한다고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 역시 그렇다. 빈센트 반 고흐의 격렬한 붓질, 에드바르 뭉크의 불안에 잠식된 화면,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그려낸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그리고 친구의 죽음 이후 깊은 우울의 색으로 세계를 물들였던 파블로 피카소까지. 그들은 내면이 흔들리고 세계에 균열이 생길 때 오히려 더욱 치열하게 화폭에 몰두했다. 어째서 고통은 예술과 그토록 자주 연결되는 것일까.

감정이 더 이상 흘려보낼 수 없는 무게가 될 때, 그것은 출구를 요구한다. 어떤 이에게 그 출구는 파괴가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창작이 된다. 색과 선, 빛과 어둠은 혼란한 내면을 표현하는 형태가 되고, 무너진 세계를 다시 세워보려는 시도가 된다. 어쩌면 창작이란 삶을 견디고 이해하려는 가장 치열한 몸짓인지도 모른다. 화가들은 그 고통을 그림 속에 응축해 담아냈다. 그래서 우리는 작품 속에서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며 위안을 얻는다. 동시에 그림을 바라보는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는 흔들리던 시기마다 그림 앞에 섰던 저자의 경험에서 출발한 책이다. 이는 예술과 삶이 맞닿는 지점을 따라가며, 뒤늦게 자신을 돌보기 시작한 한 사람의 고백이기도 하다. 독자는 그 고백을 따라 저자가 건너온 계절과 감정의 풍경을 함께 바라보며, 어느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된다. 그림을 바라보는 시간은 저자에게 자기 회복의 방식이었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연습이었고, 각박한 삶 속에서 스스로에게 허락한 멈춤이었다.

이 책을 만난 우리는 이제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잠시 그림 속으로 숨을 수 있다. 그림을 바라본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생을 함께 건너는 일이자, 흔들리는 자신을 마주하기 위한 작은 용기다. 책은 우리를 자연스레 그림 앞으로 이끌고,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갖도록 등을 밀어준다. 캔버스 위의 색과 선을 따라가다 보면 타인의 고통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지고, 내 상처 또한 이전과는 다른 빛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바람부는날이면그림속으로숨는다 #미술관 #예술에세이 #책추천 #서평

*도서증정 @samnparkers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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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세계의 농담 - 삶의 모퉁이를 돌 때 내게 다가와주는 고전들
이다혜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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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 이유로 상당히 분주했다. 하나는 이미 읽었던 책에 대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느라 바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읽지 못한 책에 대한 저자의 생생하고도 절절한(!) 추천이 내 마음을 끌어당겨 검색창을 열고 장바구니를 채우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나는 과거의 독자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독자가 되었다. 고전은 이미 지나온 시간 속에 있으면서, 아직 만나지 못한 나의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그렇게 분주하게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저자의 진솔하고 유려한 문장과 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작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어느 날 이 책이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들려주는 방식은 고전을 낡은 것이 아닌 지금 숨 쉬는 이야기로 되살린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독서의 경지, 그러면서도 쉽게 닿기 어려운 통찰이 이 책에는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읽기의 세계는 단번에 열리지 않는다. 시간을 들이고, 반복하고, 때로는 이해하지 못한 채 덮어두었다가 다시 펼치는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문학이 품은 오래된 숨결에 닿는다. 때때로 그 숨결은 혼란스럽다. 다정하지만 잔혹하고, 유쾌하지만 구슬프며, 단순해 보이지만 끝내 복잡하다. 그렇기에 더욱 읽어낼 가치가 있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살아보지 못한 시대와 삶을 건너가면서 결국은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고전은 과거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다혜 작가는 그 거울을 독자 앞에 조심스레 세워두고, 거기에 비친 우리의 얼굴을 함께 응시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오래된 세계의 농담』은 고전을 내 삶 가까이에 두는 법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 중심을 잡고 나아가게 하는 오래된 이야기들, 성장통을 통과하는 동안 잠시 기대 앉을 수 있었던 문장들, 세상을 더 선명하게 바라보게 하는 인물들을 한 권 안에 모아둔다. 특히 한 권의 고전을 음악이나 영화, 산책, 그림과 같은 일상의 장면과 연결해주는 구성은 고전을 독서의 영역에서 삶의 연장선으로 확장시키며 읽기에 활력을 더한다.

“책은 그 자리에 있지만 독자는 성장한다.”는 저자의 말은 그동안 읽어 내려간 고전들을 다시 펼쳐 들게 한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다른 내가 읽게 된다는 사실, 이 책은 그 변화의 앞으로 우리를 이끈다.

삶에서 돌아보기도, 내다보고도 싶은 날, 다시 펼칠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조금 든든해진다. 고전은 우리를 시험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건너온 시간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이 책은 농담처럼 친숙하고 오래 남는 다정함으로 일러준다.

#오래된세계의농담 #독서에세이 #에세이추천 #북스타그램 #서평

*도서증정 @originals_book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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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명성아파트
무경 지음 / 래빗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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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경성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라는 무거운 역사적 시공간을 좀처럼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세련된 모더니즘적 감각으로 전개된다. 독신자아파트라는 근대적 주거 공간, 영화 촬영이라는 대중문화적 장면,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은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게 지금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결국 시대가 달라도 반복되는 인간사의 본질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소설 도입부에 제시되는 명성아파트의 도면은 대칭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2층부터 4층까지 똑같이 반복되는 평면, 동일한 가구, 같은 위치에 놓인 거울까지. 이러한 대칭성과 규격화는 단순한 공간적 설정을 넘어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겉으로는 질서정연하고 근대적인 공간이지만, 그 내부에는 각자의 욕망과 비밀이 숨 쉬고 있다. 똑같은 벽 안에서 서로 다른 진실을 감춘 인물들은 마치 거울처럼 인간의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을 반영한다.

소설의 중심에는 열두 살 식모 ‘입분’이 있다. 처음 등장할 때 그녀는 어리숙하고 처연한 소녀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위를 바라보는 관찰력과 사려 깊음은 예사롭지 않다. 사건이 전개될수록 그 세심함은 총명함으로, 총명함은 상황을 읽고 움직이는 전략적 감각으로 확장된다. 인상적인 점은 이 작은 소녀가 힘도, 권력도, 제도적 보호도 없는 가장자리의 인물이라는 설정이 오히려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바로 그 위치 덕분에 입분은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오히려 쉽게 의심받거나 경계되지만, 입분은 위계의 말단에서 인물들의 틈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든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약한 위치에 선 존재가 가장 날카로운 추리의 주체가 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제약은 곧 무기가 되고, 주변성은 통찰로 전환된다. 독자는 입분의 시선을 따라가며 명성아파트의 주민들을 낱낱이 다시 바라보게 된다.

살인 사건은 단순한 범죄를 넘어, 시대적 욕망과 맞물리며 인간 개개인의 내면을 파고든다. “사람은 완전히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다”는 작품 속 문장처럼, 이 소설은 인간을 회색의 존재로 그린다. 범인은 특별히 규정된 악인이 아니라, 욕망과 두려움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거듭하는 평범한 인간들의 합으로 제시된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단선적인 애국주의나 반일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대에 살았을 법한 사람들의 생존 방식과 이해타산, 크고 작은 욕망과 체념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그래서 독자는 1939년을 읽으면서 동시에 현재를 읽게 된다. 시대는 다르지만 인간의 계산과 두려움, 욕망과 변명은 여전히 낯설지 않다.

『1939년 명성아파트』는 공간을 이용한 절묘한 트릭과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정통 미스터리의 매력을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인간의 양면성과 근대 도시의 불안이라는 질문을 남긴다. 명성아파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축소판이자, 속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은밀한 단면처럼 느껴진다.

그 회색 세계 한복판에서, 가장 작고 연약해 보였던 소녀가 누구보다 또렷한 시선으로 진실을 향해 걸어간다. 독자는 그 발걸음을 따라가며, 사건의 진실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한 음영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1939년명성아파트 #추리소설 #소설추천 #북스타그램 #서평

*도서증정 @rabbithole_book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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