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 랜딩
나규리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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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과 불안이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수인과 단아는 사랑에도, 관계에도 서툰 사람들이다. 이전과 다른 삶을 바라면서도 다르게 보일까 늘 먼저 움츠러드는 이들은, 각자의 삶이 시작된 자리 또한 달라 서로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며,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음에도 이해에 다다르지 못하는 순간들이 쌓인다. 사랑했으나 출발지와 도착지가 어긋난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짧은 비행처럼 허공에서만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소프트 랜딩』은 사랑을 감당하기 어려운 삶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삶 안으로 들이는 일은 기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이미 많은 것을 잃어본 사람들에게 사랑은 위안인 동시에 또 다른 위험이 된다. 수인과 단아에게 남는 것은 언제나 어긋난 타이밍과 말해지지 못한 진심, 그리고 뒤늦은 자책과 후회다.

두 사람의 운명이 시작된 영종도는 도피처이자 유일한 선택지다. 멀리 떠날 방법도, 더 멀리 갈 의지도 없었던 이들에게 섬은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삶은 결코 동등하지 않다. 공항이라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두 사람은 같은 보안검색원으로 일하지만, 계약 구조에 따라 또다시 나뉜다. 처우는 다르지만 허탈과 무력함은 공평하게 주어진다. 이 소설은 사랑의 균열이 개인의 감정 문제를 넘어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적 간극 위에서 더 쉽게 벌어진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 앞에서 멈추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상공으로 향한다. 불안하고 서툰 비행이 부드럽게 착륙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하고 만다. 수인과 단아의 사랑 역시 사랑만을 고민하기에는 삶이 팍팍해, 끝내 흔들리고 위태로운 결말에 이른다. 그것은 해피엔딩도, 완전한 비극도 아니다. 다만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아픈 현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쉽게 닫히지 않는 이유는, 두 사람이 내내 조금씩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는 이동하고, 형태를 바꾸며, 때로는 더 깊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만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붙들 수 있다. 수인과 단아가 겪은 이 비행은 이후의 삶을 견디게 하는 단단한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어떤 필연들은 지나고 나서야 그 필요를 알게 된다. 선택의 결과가 기대와 멀더라도, 그 과정에서 손에 쥐게 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것이 미련이나 자책, 혹은 후회의 모습일지라도, 우리는 완전히 부서지지 않는다. 다시 나아가는 힘은 자신 안에 존재한다. 『소프트 랜딩』은 그러한 삶을 부드럽고도 애틋한 문장으로 증명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덮고 나면 우리는 삶의 어디쯤에서 비행 중인지,
어떠한 착륙을 시도하고 있는지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비행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만들어줄 온기는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모두가 부드럽게 안착하는 사랑의 도착이 가능한 사회와 관계를 희망하며 수인과 단아를 마음으로 끌어안는다.

#소프트랜딩 #장편소설 #소설추천 #북스타그램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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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동물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전대호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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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분들의 총합이 이 책을 이룬다면, 그 수많은 논점 중, 내가 일부만을 이해했음을 먼저 밝힌다.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철학적 훈련과 사유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꺼운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어나갈 흥미로운 지점은 많다. 그것은 꼭 이해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정의한다. 어떤 릴스 영상에서는 인간만이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길가에 핀 꽃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니 생각을 내려놓고 그저 살아 있음 자체를 받아들이라는 조언을 전한다. 하지만 나는 그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무엇이 가능하고, 그 외 지구 생물들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고는 이분법적인 동시에 전 지구적 합의에 의한 결정이 아니다. 그 생각을 정의 내린 것이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도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에 오히려 해답이 가까울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다행인 사실은 이 사실 또한 인간 스스로 안다는 점이다.

이러한 포괄성과 복합성을 인정하는 철학적 사고는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와도 관통한다.

인간은 동물이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동물임을 인간 스스로 정의 내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동물에 머물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간은 스스로를 동물로 규정하고, 동시에 동물 이상의 무언가(이성,언어,정신)를 덧붙임으로써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정의해 왔다. 이 자기정의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에 온전히 들어맞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자연 안에 있으나, 자연을 설명하고 분류하고 해석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좋아하는 분류 작업, 우주, 지구, 자연, 생물, 인간, 동물, 식물을 나누는 수많은 학문들은 그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이지, 그것들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은 훨씬 더 넓다. 인간은 다 알지 못함으로 아는 것에서 멀어진다. 아는 것 이상으로 판단할 수 없고, 모르는 것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기 때문이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정한 것도, 그 경계를 그은 것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비판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설명하려는 시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설명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인간이 세운 이분법과 위계는 자연과 다른 생명체의 입장에서는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내부의 복잡성을 증폭시키며,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강화해 왔다. 가브리엘은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된 예외적 존재로 세우는 것도, 인간을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환원하는 것도 모두 거부한다. 인간은 동물이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성찰하고 판단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결국 가장 오래된 철학적 질문 앞에 우리를 다시 세운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가브리엘의 철학이 머무는 곳은 정의가 아니라 태도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완전히 알 수 없다면, 그 알 수 없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가 제안하는 것은 ‘무지의 윤리’다. 모든 것을 안다고 믿지 않는 겸손,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태도,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자세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도덕적 인식 능력때문에 다른 생물들과 우리가 공유한 환경에 대해 책임이 있다.

우리가 누구이건, 무엇이건 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책에서 언급한 대목 중 한 부분을 옮겨 온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을 인간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인간이 속한 환경과 전 지구적 생명 전체로 확장해 읽을 때 이 문장은 비로소 온전히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확장된 의미로 수정했다.

“비극이 발생할 개연성을 낮추는 일, 최대한 많은 존재가 존엄하게 살고 죽을 수 있게 만드는 일, 사회적 정의의 원리를 통해 되도록 만인이 서로에게—인간은 물론 지구와 환경,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게—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각자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일
―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유의미하다고 느낀다.”

#인간은동물이다 #철학 #마르쿠스가브리엘 #북스타그램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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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사라졌다 북멘토 가치동화 75
김정숙 외 지음, 남수현 그림 / 북멘토(도서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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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겨울을 담은 푸르고 하얀 표지,
그리고 〈바람이 사라졌다〉라는 제목.
아이의 쓸쓸하고 체념이 묻어나는 표정은 책을 펼치기 전부터 마음을 붙잡는다.
이내 펼쳐진 겨울 풍경 속에서 얼굴에 검은 반점을 지닌 하얀 고양이, 바람이가 등장한다. 바람처럼 날쌔지만 홀쭉한 배를 지닌, 배고프고 안쓰러운 작은 길고양이다.

바람이에게 이름을 지어준 아이 서진이 역시 얼굴 한쪽에 반점이 있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엄마가 없다는 점까지, 둘은 닮아 있다. 이렇게 닮은 두 존재가 자주 향하는 곳은 동네 중앙시장이다. 서진이는 시장길을 오가며 바람이에게 참치캔을 챙겨 주고, 바람이는 그 작은 친절에 하루를 버틴다.

이 책은 네 명의 작가가 각기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바람이, 서진이, 주하, 그리고 생선 가게 아줌마. 네 개의 시선은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겹치고 어긋나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장면들을 하나씩 드러낸다.

얼굴을 드러내기 어려워 늘 주눅 들어 있는 서진이, 장사는 안 되고 삶은 팍팍한 생선 가게 아줌마, 왕따를 겪었고 동물털 알레르기가 있지만 이제는 친구를 만난 주하까지.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바람이를 걱정하고 챙기지만, 때로는 자신의 삶에 치여 “괜찮겠지” 하며 지나친다.

그리고 그 작은 무심함들이 모여, 모두가 행복해야 할 크리스마스 아침, 바람이는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된다. 인물들은 그제야 자신이 했던 선택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바람이에게 전하지 못한 미안함을 고백한다. 하지만 바람이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잠시나마 자신을 바라봐 주었던 따뜻한 시선과 손길을 기억하며 조용히 이야기를 마친다.

이 책은 작은 행동 하나가 생명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초등 중·고학년 아이들이 읽기에 적합한 동화로, 인물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발견하고, 학교와 일상, 길 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 그리고 이름 모를 이웃들까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과장되지 않은 문장과 일상적인 장면들, 그리고 바람이의 짧은 삶은 큰 울음 대신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다정하게 안부를 묻는 일, 그냥 지나치지 않는 마음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에, 아름다운 겨울 그림이 주는 고요함이 잔잔하고 따뜻한 울림을 준다.

아이들에게, 그리고 어른들에게도 건네고 싶은 의미 깊은 겨울 동화다.


#바람이사라졌다 #북멘토가치동화 #창작동화 #동화책추천 #동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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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을 구워냅니다
김나을 지음 / 한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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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정성껏 내린 향 좋은 드립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촉촉하고 폭신한 시나몬롤을 한입 베어 물며 영화 카모메 식당을 다시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한겨울 싸락눈을 맞다 찬 공기를 피해 우연히 들어간 곳에서, 분위기 좋은 따뜻한 카페를 만나는 장면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차를 타고 두 시간쯤 달리면, 나만 알고 싶은 작은 과자점이 마법처럼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경험과 장소들은 분명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에 이름을 올릴 법했다.

책 한 권으로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들이 이렇게 늘어날 수 있다니. 새삼 책이라는 존재가 고맙게 느껴지는 시간을, 나는 또 한 번 선물 받았다.
그렇게 오늘, 구워진 행복이 내게 도착했다.

『오늘도 행복을 구워냅니다』 속에는 우리와 꼭 닮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진짜 자신을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행복과자점’이라는 작은 카페로 하나둘 모여든다.
그들의 이야기는 부모이자 형제, 친구이자 동료의 얼굴을 하고 있어 읽는 내내 자연스럽게 겹쳐지고, 깊이 공감하게 된다.

삶은 좀처럼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계획에 없던 삶이 오히려 또 다른 기회가 되고,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진짜 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행복과자점에는 이미 행복이 준비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여러 번의 계절과
숱한 망설임을 통과해야 했을 뿐이다.

그 시간이 길수록, 그 자리가 ‘나의 자리’임을 실감하는 순간은 더 단단해진다. 어쩌면 삶이란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선택을 오래 기다려주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아름다운 이유는 삶 속에서 맺어지는 인연들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
충분히 사랑받고 또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곁에 존재한다.
그 사실 자체가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 일인지,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를 보듬는 관계를 통해 가장 따뜻한 형태로 증명해 보인다.

책을 읽다 보니 첫 직장을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매일같이 반복되던 야근 끝에 씻지도 못한 채 잠들던 밤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아프거나 사고라도 나서 출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어느 날.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 자신의 불운을 바랄 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사표를 낼 결심을 하고 회사를 등지고 나오는 길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무엇이 그토록 억울했는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길에 우뚝 서 한참을 울던 내 모습이 소설 속 인물들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성장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 책은 400페이지가량의 장편소설이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인기 에세이들에는 아름다운 문장이 많지만,
읽고 나서 오래 남는 장면이나 문장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그 이유는 아마 충분한 서사가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조금은 긴 시간을 내어
한 권을 오롯이 읽어내는 경험이 필요하다.
들인 시간만큼 우리에게도 서사로 남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과 맞닿은 서사가 이 책에는 있다.
오래된 추억처럼, 언젠가의 잊지 못할 기억처럼 떠오를 장면과 문장이 가득하다.

머뭇거리고 오래 고민하는 인물들이
삶에 대한 사랑을 가득 품은 채 향긋한 커피를 앞에 두고
나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 속에는 그동안 쉽사리 꺼내지 못했던 치열한 과거와,
이제는 정리되어 말할 수 있게 된 마음,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용기가 담겨 있다.

『오늘도 행복을 구워냅니다』는 특별한 사건 없이도
일상 그대로, 천천히 오래 따뜻해지는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데워주는 소설이다.

유난히 마음이 시린 날,
이 책 속 ‘행복과자점’에 잠시 들러
한 조각의 달콤함과 온기를 건네받아도 좋겠다.
고민과 걱정이 무색해지게, 이내 다정한 행복이 나를 이끈다.

#오늘도행복을구워냅니다 #장편소설 #힐링소설 #소설추천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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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왕국 - 식물은 어떻게 문명과 권력을 설계했는가
데이비드 스펜서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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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지구 곳곳에서 지배적인 존재이고, 지구에 사는 생물의 총 질량(바이오매스)의 99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러한 식물의 입장에서 인간과 동물은 단순한 흔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식물은 번식만을 놓고 보아도 인간이나 동물처럼 둘이 하나가 될 필요조차 없어 100퍼센트에 가까운 효율을 자랑한다. 어디 그뿐인가. 지구상에 동물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식물은 존재했고, 몸의 90퍼센트가 사라져도 다시 재생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다. 동물 중에 그러한 치명상을 입고도 살아남을 존재가 있을까.

동물계의 팝스타인 인간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식물들이 이러한 인간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코웃음을 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뿌리 왕국』은 우리가 고요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오해해온 식물들이 사실은 수억 년 동안 지구 생태계를 설계해온 전략가이자 협상가였다는 관점의 전환을 불러온다.

이 책은 식물을 배경에서 끌어내어, 인간 문명과 권력 구조를 함께 만들어온 주체로 세운다.

식물은 뿌리를 내리고 이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동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정교해졌다. 화학 신호로 소통하고, 곤충과 동물을 유인하거나 조종하며, 경쟁과 협력을 선택한다. 뿌리는 친족을 구분하고! (놀랍다!) 잎과 꽃은 빛과 환경에 맞춰 방향과 기능을 조정한다. 이는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환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인지적 행위에 가깝다. 저자는 이러한 식물의 생태를 통해 ‘지능’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신경세포나 이동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식물을 길들여 문명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그것이 일방적인 지배의 역사가 아니라 공진화(여러 개의 종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진화하는 것)의 과정이었음을 제시한다. 농작물과 약초, 커피와 차는 인간의 신경과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인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식물의 화학에 깊이 길들여져 왔다. 식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번성과 확산을 돕는 매우 유용한 동맹이었을지도 모른다.

『뿌리 왕국』은 식물학을 인류의 핵심 정치적 의제로도 끌어올린다. 식물은 식량과 에너지, 주거와 기후 안정성의 기반이며, 토양과 물, 기후의 붕괴는 곧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위기로 이어진다. 따라서 농업과 재배 방식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명을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된다.

저자는 해결책으로 효율과 단일성을 향한 집착 대신 다양성을 제안한다. 혼합재배, 다양한 품종의 공존, 시민 과학과 개인의 실천. 자연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도, 녹색이라는 이름에 쉽게 현혹되는 태도도 경계하면서, 과학적 사고와 생태적 책임을 동시에 요구한다. 식물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낭만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어온 공존의 생존 방식이다.

식물을 다룬 과학서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무엇보다 식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저자의 태도가 글 곳곳에서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 열정 덕분에 독자 역시 자연스럽게 식물의 세계로 끌려 들어간다. 읽다 보면 유쾌함과 세심한 사유가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유려하게 조율하며, 우리가 너무 사소하게 여겨왔던 주변의 식물들이 어느새 고귀하고 성스러운 옷을 입은 경이로운 공생체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자연을 보호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말이다. 식물을 이해하지 못한 문명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발아래 조용히 뿌리내린 세계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침묵이야말로, 우리가 너무 오래 오해해온 가장 강력한 목소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진심은 통한다. 작가가 얼마나 식물을 사랑하는지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읽는 내내 즐겁고 유익했다. 작가의 언변과 유려한 비유는 장난기마저 느껴져, 자꾸만 쿡쿡 웃음이 난다. 다 읽고 나자 이내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해, 다른 출간 도서가 있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작가의 국내 번역 책이 『뿌리 왕국』 한 권뿐이라는 점이 아쉬울 정도다. 책을 좋아하는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독서의 기쁨도 만끽할 수 있는 이 책을 추천한다.)

#뿌리왕국 #자연과학 #생명과학 #책추천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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