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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왕국 - 식물은 어떻게 문명과 권력을 설계했는가
데이비드 스펜서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1월
평점 :
식물은 지구 곳곳에서 지배적인 존재이고, 지구에 사는 생물의 총 질량(바이오매스)의 99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러한 식물의 입장에서 인간과 동물은 단순한 흔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식물은 번식만을 놓고 보아도 인간이나 동물처럼 둘이 하나가 될 필요조차 없어 100퍼센트에 가까운 효율을 자랑한다. 어디 그뿐인가. 지구상에 동물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식물은 존재했고, 몸의 90퍼센트가 사라져도 다시 재생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다. 동물 중에 그러한 치명상을 입고도 살아남을 존재가 있을까.
동물계의 팝스타인 인간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식물들이 이러한 인간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코웃음을 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뿌리 왕국』은 우리가 고요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오해해온 식물들이 사실은 수억 년 동안 지구 생태계를 설계해온 전략가이자 협상가였다는 관점의 전환을 불러온다.
이 책은 식물을 배경에서 끌어내어, 인간 문명과 권력 구조를 함께 만들어온 주체로 세운다.
식물은 뿌리를 내리고 이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동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정교해졌다. 화학 신호로 소통하고, 곤충과 동물을 유인하거나 조종하며, 경쟁과 협력을 선택한다. 뿌리는 친족을 구분하고! (놀랍다!) 잎과 꽃은 빛과 환경에 맞춰 방향과 기능을 조정한다. 이는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환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인지적 행위에 가깝다. 저자는 이러한 식물의 생태를 통해 ‘지능’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신경세포나 이동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식물을 길들여 문명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그것이 일방적인 지배의 역사가 아니라 공진화(여러 개의 종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진화하는 것)의 과정이었음을 제시한다. 농작물과 약초, 커피와 차는 인간의 신경과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인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식물의 화학에 깊이 길들여져 왔다. 식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번성과 확산을 돕는 매우 유용한 동맹이었을지도 모른다.
『뿌리 왕국』은 식물학을 인류의 핵심 정치적 의제로도 끌어올린다. 식물은 식량과 에너지, 주거와 기후 안정성의 기반이며, 토양과 물, 기후의 붕괴는 곧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위기로 이어진다. 따라서 농업과 재배 방식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명을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된다.
저자는 해결책으로 효율과 단일성을 향한 집착 대신 다양성을 제안한다. 혼합재배, 다양한 품종의 공존, 시민 과학과 개인의 실천. 자연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도, 녹색이라는 이름에 쉽게 현혹되는 태도도 경계하면서, 과학적 사고와 생태적 책임을 동시에 요구한다. 식물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낭만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어온 공존의 생존 방식이다.
식물을 다룬 과학서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무엇보다 식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저자의 태도가 글 곳곳에서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 열정 덕분에 독자 역시 자연스럽게 식물의 세계로 끌려 들어간다. 읽다 보면 유쾌함과 세심한 사유가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유려하게 조율하며, 우리가 너무 사소하게 여겨왔던 주변의 식물들이 어느새 고귀하고 성스러운 옷을 입은 경이로운 공생체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자연을 보호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말이다. 식물을 이해하지 못한 문명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발아래 조용히 뿌리내린 세계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침묵이야말로, 우리가 너무 오래 오해해온 가장 강력한 목소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진심은 통한다. 작가가 얼마나 식물을 사랑하는지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읽는 내내 즐겁고 유익했다. 작가의 언변과 유려한 비유는 장난기마저 느껴져, 자꾸만 쿡쿡 웃음이 난다. 다 읽고 나자 이내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해, 다른 출간 도서가 있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작가의 국내 번역 책이 『뿌리 왕국』 한 권뿐이라는 점이 아쉬울 정도다. 책을 좋아하는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독서의 기쁨도 만끽할 수 있는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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