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못해 닳은 사랑
히코로히 지음, 권남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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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드라마의 인상적인 대사를 기억한다.
“나쁘지 않은 정도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거지.
근데 좋은 점은 하나도 없는데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어.”

사랑의 시작은 무엇으로 결정되는 걸까.
그리고 그 끝은 또한 무엇으로 정해질까.
좋아하고 싶던 대상과는 수없이 빗겨가던 일들이
어째서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대상과는 매번 이토록 쉬울까.

연애에서만큼은 시작할 때 빛나던 모든 것들이
시간이 쌓일수록 비에 젖은 눅눅함처럼 빛을 잃는다.
설렘은 익숙함이 되고, 배려는 의무로, 기다림은 외로움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어느 순간 나조차 알지 못하던 내가 불쑥 튀어나와
상대를 시험하고, 상처 주고, 상처받기를 반복한다.

살면서 이리도 휘둘리기를 자처한 적이 또 있을까.

무엇에 이끌려 연애를 하고
무엇에 이끌려, 그 사람으로 세상을 단정 짓게 되는 걸까.
여러 번 반복해도 여전히 제멋대로 휩쓸리고 욕망하며 상처받고 울지언정 사랑을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연애적 사랑을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있었다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쉬웠을까.
평범한 대화의 끝이 어째서 연애의 탈을 쓰면 불가침의 영역을 그렇게도 쉽게 넘어설까.

사랑은 왜 우리를 더 솔직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가장 비겁하게 만드는 걸까.

연애를 하다 보면 드라마틱한 낭만보다 삶과 맞닿아 있는 관계라는 지점에서 더 많은 감정이 남는다. 크고 선명한 사건보다 차마 말로 다 꺼내지 못한 감정의 잔여들, 애써 무시했던 불편함,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이름 붙일 수 있는 마음의 마모들.

『닿지 못해 닳은 사랑』은 끝내 서로에게 닿지 못한 채 지속되었기에 닳아버린 마음의 기록이다.

절제된 결말은 사랑 앞에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최선만큼이나 압축적이다.
다 꺼내어 보여줄 수 없어 증명되지 못한 순간들.
스스로도 정의 내릴 수 없어 방황한 감정들은 이 책을 통해 선연하게 떠오르고, 생활감 있는 익숙한 상황들은 문장의 힘을 빌려 비로소 이름을 얻는다.

화려한 장면보다 마음에 남는 것은 아주 평범한 순간들이다.
말하지 못한 말, 늦어버린 타이밍, 이해받고 싶었으나 끝내 설명되지 않은 마음들. 이 소설은 미화된 사랑을 과감히 덜어내고 내내 감춰두었던 익숙한 감정을 불러온다.

닿을 수 없어 증명을 잃은 감각들이 닳아버릴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기어코 다시 사랑 앞에 선다.

여전히 사랑을 향해 기울어지는 마음을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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