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호랑이
네주 시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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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되어야 할 마땅한 증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숨죽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악은 때로 너무도 평범한 얼굴을 하고, 너무도 익숙한 방식으로 삶의 내부에 스며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는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절대적인 고독 속에 고립된다.

네주 시노는 증언과 분석, 문학과 철학을 가로지르며 우리가 외면해 온 질문들을 깊고도 섬세하게 파고든다.

이 책이 보여 주는 것은 강간이라는 사건이 결코 한순간의 폭력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피해자의 삶 전체를 다시 쓰고, 존재의 방식 자체를 바꿔 놓는다. 숨 쉬는 방식, 타인과의 거리,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감각까지 침식해 들어간다. 그 경험은 과거로 밀려나는 사건이 아니라, 삶 위에 겹쳐진 채 사라지지 않는 또 하나의 차원으로 남는다. 그 안에서 피해자는 고통받는 존재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이해할 언어마저 박탈당한 채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된다.

가해자는 너무도 쉽게 자신을 정당화한다. 책 속의 가해자 역시 수감 생활 이후 아무렇지 않게 삶을 이어 간다. 바로 그 점이 더 큰 공포를 만든다. 우리가 상상해 온 괴물의 형상 대신, 악이 평범성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 세계를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피해자가 겪는 무력감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 끝내 이해할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고립에 가깝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것이 멈추지 않았는지, 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그 질문들 앞에는 좀처럼 닿을 수 있는 답이 없다. 그렇게 피해자는 더욱 깊은 고독 속에 놓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말하기를 선택한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도, 끝내 그것을 넘어 언어를 만들어 가는 일. 이 모순적인 움직임이야말로 이 책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문학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것이 한 개인에게만 갇힌 고통으로 머물지 않게 한다. 증언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세계를 해부하고 침묵 속에 남겨진 누군가에게 닿아 가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이야기되지 않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삶을 잠식한다.
침묵은 보호가 아니라 고립을 강화한다.

그래서 이 책의 존재는 더욱 절실하다.
누군가에게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분명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건네는 신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주 시노는 감정의 과장 없이 절제된 문장으로 분노와 고통, 기억과 사유를 직면해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 하나를 보여 준다. 문학은 모든 것을 치유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침묵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밖으로 끌어낼 수는 있다.

그것이 이 책이 가진 힘이다.
우리는 이 책 앞에서 쉽게 떠날 수 없다.
침묵하지 않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세상을 곧장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또 다른 침묵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끝내 믿게 만든다.


#슬픈호랑이 #열린책들 #네주시노 #페미나상 #소설추천

*도서증정 @openbooks21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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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사람을 위한 것
슬론 크로슬리 지음, 송섬별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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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다시 꺼내 읽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책이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다시 만나고 싶은 책. 마치 눈앞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서도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사람처럼. 이 책이 꼭 그렇다. 아주 사적이고 도발적이며, 애틋하고 깊은 사랑의 애도를 담은 아름다운 회고록이다.

이 이야기는 뜻밖의 도난 사건에서 시작된다.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순간. 그 감각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이 찾아온다. 가장 가까운 친구의 죽음. 그것도 예고 없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예견할 수 없었고, 준비할 수도 없었으며, 설명조차 불가능한 상실이 남긴 감각을 그녀는 글로 토로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잃기 전까지는 그것을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지 결코 알 수 없고, 미리 애도하는 방법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삶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얄팍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슬픔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자살이라는 죽음이 남기는 감정은 복잡하다. 그것은 슬픔을 넘어, 죄책감과 질문을 남긴다. ‘왜’라는 질문은 끝없이 반복되지만 어떤 답도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유가 아니라, 남겨진 사람이 삶을 이어가는 방식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유를 모르더라도 괜찮아지는 법을 배우는 것. 이 책은 그 불가능해 보이는 과정을 은밀할 만큼 솔직하고, 절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 과감하게 풀어낸다.

그녀의 애도는 정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극히 감정적인 문제다. 캐비닛 속에 넣어둘 수 없고, 억눌러도 불쑥 튀어나오는 어떤 것이다. 길을 걷다가도, 비행기 안에서도 아무런 예고 없이 다시 떠오르는 기억과 감정들. 애도는 삶의 한 장면이 아니라, 삶 전체를 바꾸어놓는다.

이 책에서의 애도는 원망과 분노, 사랑과 그리움이 한데 뒤섞여 때로는 웃음과 함께 돌아온다. 함께했던 사소한 말과 행동, 스쳐 지나갔던 순간들까지 반복해서 떠올리게 되는 과정 자체가 애도의 본질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애도’라는 단어 하나로는 도저히 포괄할 수 없는 모든 것이다.

그녀는 애도를 끌어안는다. 삶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삶이 기적인 이유는 특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다시 그것을 붙잡기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빠져나가려는 삶을 붙들고, 다시 살아가기로 하는 그 반복이야말로 기적에 가깝다. 그리고 그 선택은 슬픔을 품은 채 이루어진다.

어떻게 한 사람을 묻어두면서도 동시에 곁에 둘 수 있을까.

그녀의 질문은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맴돈다. 애도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결국 크고 아름다운 사랑이었다는 것을.

#슬픔은사람을위한것 #에세이추천 #현대문학 #신간추천 #서평

*도서증정 @hdmhbook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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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에디션 AI 네이티브 코리아 MK에디션
매일경제 국민보고대회팀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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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새로운 문명의 흐름이 되었고, 기술은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가 사회 전체의 구조를 어떻게 바꾸고 있으며, 그 앞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충분하지 않다. 이 책은 AI 기술의 명암을 현실감 있게 짚어내는 동시에, 산업·노동·교육·의료·행정·안보·분배에 이르는 문제를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입체적으로 조망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러한 관점은 집필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은 AI 전문가가 아니라 기자들에 의해 쓰였다. 엔지니어나 연구자가 기술의 정교함과 성능을 중심으로 AI를 바라본다면, 기자들은 기술이 사회에 들어왔을 때 누가 먼저 이익을 얻고 누가 뒤처지는지, 무엇이 가능해지고 무엇이 위태로워지는지를 묻는다. 그 덕분에 AI를 특정 산업군의 혁신을 넘어, 전기나 인터넷처럼 사회 전체를 관통하며 인간의 삶을 재편하는 기반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가능해진다. 이 관점이야말로 지금 AI를 이해하는 데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처럼 느껴진다.

AI의 역할을 설명하는 방식에서도 이러한 관점은 이어진다. AI를 단순히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로 보지 않고, 손실과 위험을 줄이며 인간의 의사결정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기술로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효용에만 머물지 않고, 노동시장 격차와 고용 불안, 부의 편중, 비판적 사고의 약화 같은 부작용을 함께 짚어낸다. 특히 기술 발전 속도에 비해 정책이 뒤처지는 ‘시차’를 핵심 위험으로 지적하며, 중요한 것은 AI 도입 여부가 아니라 그 혜택과 비용을 어떤 원칙으로 분배하고 어떤 사회적 설계 안에 정착시킬 것인가라고 지적한다.

기술을 사회적 구조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국가 단위의 전략 비교로도 확장된다. 각국의 AI 전략을 비교하는 대목 역시 인상적이다. 미국은 AI를 특정 산업이 아니라 전 산업에 스며드는 운영 기술로 확장하며 민간 중심의 혁신을 가속하고, 중국은 국가 주도의 통제와 대규모 데이터 활용을 바탕으로 빠른 성장을 추구한다. 유럽은 인권과 규범을 중심으로 기술을 설계하며, 프랑스와 싱가포르는 정책과 인재, 산업을 결합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경쟁력을 구축해나간다. 같은 기술을 두고도 각국이 전혀 다른 설계 철학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결국 AI 경쟁이 기술 자체를 넘어 제도와 문화, 국가 전략의 차이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비교 속에서 한국에 대한 분석은 더욱 선명해진다. 한국은 반도체, 통신망, 제조업 기반 등 탄탄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AI 밸류체인을 국가 내부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드문 나라이다. 동시에 소프트파워와 인재, 규제 혁신, 상업 생태계의 한계가 있다. 결국 이미 갖춘 기반을 사회 전반의 활용 구조로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의 혜택을 일부가 아닌 시민 전체의 역량으로 확장하려는 ‘전 국민 AI 네이티브 카드’와 같은 정책적 제안은 의미 있게 다가온다. AI를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환경을 설계하는 것이 곧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주장 역시 설득력 있다.

『AI 네이티브 코리아』는 AI라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지, 아니면 불평등과 소외를 확대할지는 결국 제도와 분배, 교육과 사회적 합의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AI의 미래를 감당할 사회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며 국가적 과제와 제안 또한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기술의 성능보다 기술 이후의 삶을 먼저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AI 입문서를 넘어 훨씬 넓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는 탁월한 보고서다.

#AI네이티브코리아 #경제전망 #매일경제신문사 #매경출판 #도서추천

*도서증정 @mkpublishing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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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 이야기 - 생명의 잉태와 탄생에 이르는 81가지 신비로움
안나 블릭스 지음, 황덕령 옮김 / 미래의창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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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 이야기』는 다양한 생명의 탄생을 통해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폭넓은 번식 생태계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좁은 시선으로 생명을 이해해왔는지, 인간의 경험을 얼마나 쉽게 보편으로 여겨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작가는 자신의 임신 40주를 통과하며 그 시간을 하나의 축으로 삼아, 매주 서로 다른 생명들의 번식과 출산의 세계를 함께 펼쳐 보인다.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지구 생명의 역사가 포개지며 흘러가는 이 기록은, 한 사람의 몸에서 겪는 입덧과 피로, 두려움과 버팀의 시간이 어느 순간 황제펭귄, 참솜깃오리, 악어, 캥거루, 돌고래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 연결은 자연 생태계가 지닌 무수한 다양성으로 확장되며 경이롭게 다가온다.

이 책은 인간 중심의 탄생 이야기를 넘어, 살아남아 이어져 온 존재들의 장대한 역사로 사고를 확장시킨다. “우리는 모두 생명의 나무 끝자락에서 저마다 다른 가지를 뻗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인간이든 아메바든, 캥거루든 모두 35억 년의 생명사 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며, 생명을 위계가 아닌 연결로 바라보게 만든다.

탄생은 아름답고 신비롭기만 한 일이 아니다. 종종 추위와 굶주림, 고통과 위험을 통과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다양한 동물들의 혹독한 임신과 출산의 장면은, 생명을 이어가는 일이 얼마나 처절한 버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생명은 때로 잔인할 만큼 냉혹하면서도, 동시에 놀라울 만큼 정교하다.

이 책은 과학조차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또한 상기시킨다. 우리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성 역할과 고정관념을 자연에 덧씌워 해석해온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가정이 얼마나 자주 현실을 가려왔는지를 짚으며, 연구자의 성별과 배경, 경험이 달라질 때 비로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실들이 드러난다는 점을 말한다. 과학 역시 자연 생태계만큼이나 더 넓고 살아 있는 다양성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남아 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그 오랜 이야기의 끝자락에 인간이 있다. 수많은 생명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책은 탄생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가 생명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한층 넓혀주는, 아름답고도 지적인 과학 에세이다.

#40주이야기 #미래의창 #자연과학 #생명과학 #도서추천

*도서증정 @miraebook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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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것들 - 바르샤바 게토의 아카이브로 떠난 여행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여문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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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역사를 거대한 흐름으로 이해하려 한다. 수많은 사건과 숫자, 지도와 연표 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방향성을 가진 이야기처럼 정리된다. 그러나 이 책이 붙잡고 있는 것은 역사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파편들, 흩어지고 부서진 채 남겨진 조각들이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수집된 종잇장들, 편지, 일기, 배급표, 사탕 포장지들은 처음부터 ‘역사’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라질 가능성이 더 컸던, 너무 사소해서 누구도 보존하려 하지 않았을 흔적들이다. 그러나 에마누엘 린겔블룸과 오이네그 샤베스의 활동가들은 바로 그 보잘것없는 것들 속에서 사라져가는 삶의 마지막 증거를 보았다.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잔존’을 선택했다.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무엇이라도 자신들의 현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을 남기려 했던 선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저항이었다.

이 책은 사소한 기록들 자체로 강렬하다. 역사적 정보를 넘어, 그 안에는 처절하고 절박한 생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린겔블룸은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는 관찰자임과 동시에 고통을 함께하는 참여자이다. 그래서 이 아카이브에는 언제나 탄식이 스며 있다. 감정의 표현을 넘어,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진실을 남기겠다는 의지와 결의가 기록들과 파편들 속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러한 기록을 통해 ‘상상력’의 역할을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상상력은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윤리적 능력이다. 우리는 그 시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고통을 온전히 재현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상하려고 시도한다. 결핍된 채로, 불완전한 채로, 끝없이 되돌아보는, 바로 그 상상 속에서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해는 완전한 재현이 아니라 도달할 수 없음에 대한 자각 위에서만 가능해진다. 우리는 상상해야만 하고, 역사 속에 묻힌 누군가의 고통과 진실을 응시해야만 한다.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또 다른 역할일 것이다.

너무도 연약해 쉽게 찢기고 불태워질 수 있는 종잇장들이 오히려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유는 인상적이다. 그것은 승자와 패자의 구분을 넘어 지속되며, 권력과 폭력을 초월해 증언한다. 심지어 이미지조차 그것을 만든 자의 의도와 다른 진실을 드러낸다. 결국 기록은 언제든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잠재적인 증언이 된다.

이 아카이브가 남긴 것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흩어진 자리에서 다시 무언가를 모으려는 욕망이 발생한다는 사실 자체다. 부스러기를 모아 하나의 의미를 만들려는 시도, 그것은 미래를 향한 행위다. 파괴의 결과를 진실의 집합으로 전환하는 일, 역사를 바로잡고 생과 죽음을 넘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하는 일. 이 책은 바로 그 과정을 따라가며, 기록이 어떻게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도 세계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처절한 생을 이어가며 죽음과 맞닿은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누군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삶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이름 뒤에 묻혀 우리의 의식에서 쉽게 사라진다. 그러나 전쟁의 잔상들, 파편들, 그 시간을 증명하는 흩어진 무수한 것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남기고 있을까. 역사는 완성된 이야기로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시 읽히고, 다시 쓰이며, 다시 구성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대한 서사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들을 외면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응답일지도 모른다.

#흩어진것들 #인문에세이 #리뷰어클럽리뷰 #도서추천 #문학과지성사

*도서증정 @moonji_books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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