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에 잊힌 사람들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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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이상한 감각에 빠진다. 분명 현재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동시에 오래전 기억 속 어딘가를 천천히 거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소설은 요양원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쥐스틴과 그곳의 노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면 단순히 “누군가의 삶을 들은 이야기”라기보다, 인간의 기억과 침묵, 사랑과 상실이 겹겹이 쌓인 거대한 감정의 방을 지나온 듯한 여운이 남는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소설의 장르적 감각이다. 처음에는 잔잔한 휴먼 드라마처럼 시작된다. 요양원이라는 공간, 나이 든 사람들의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쥐스틴의 다정한 태도는 마치 한 편의 에세이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의 삶을 조용히 받아 적고 기억해주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설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오래된 가족의 비밀과 죽음, 감춰진 관계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미스터리처럼 변하고, 때로는 범죄 스릴러를 읽는 듯한 긴장감까지 생겨난다. 또 어떤 장면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비밀이 뒤엉킨 막장극 같은 흥미도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런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설은 장르를 끊임없이 미끄러지듯 이동하면서도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된다. 그래서 읽는 동안 “이 소설은 대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된다. 고전소설 같다가도, 추리소설 같다가도, 누군가의 인생을 기록한 회고록처럼 느껴지는 이 카멜레온 같은 분위기가 굉장히 신선했다.

발레리 페랭의 문체 역시 그런 변화무쌍한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그녀의 문장은 아주 오래된 사진첩을 천천히 넘기듯 기억과 감정을 불러낸다. 특히 이 소설에는 ‘듣는 사람’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시선이 담겨 있다. 쥐스틴은 단순히 이야기를 수집하는 인물을 넘어, 상대의 기억을 묵묵히 들어주고,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며, 때로는 비밀을 침묵 속에 간직해준다. 누군가의 삶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행위 자체가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소설 안에서는 아주 깊고 의미있게 전달된다.

『일요일에 잊힌 사람들』은 잊혀지는 존재들에 대한 찬가이다. 요양원의 노인들, 오래된 사랑,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들, 그리고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었던 비밀들까지. 소설은 그런 것들을 다시 현재로 불러와 아름다운 순간에 빛을 비춘다. 인간은 결국 기억 속에서 한 번 더 살아간다는 듯이.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 소설이 끝까지 인간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결핍과 상처, 욕망과 후회를 품고 있다. 누군가는 비겁하고, 누군가는 잔인하며, 누군가는 진실을 숨긴다. 그런데도 작가는 그들을 단순히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 역시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 애쓰게 된다. 그것이 이 소설이 가진 가장 깊은 온기처럼 느껴졌다.

『일요일에 잊힌 사람들』은 빠르게 소비되는 이야기와는 반대편에 있는 소설이다. 천천히 사람의 삶 안으로 들어가고, 오래된 감정을 꺼내 보이며,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아름다운가를 보여준다. 읽는 내내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낡았지만 따뜻하고, 어딘가 슬프지만 이상하게 오래 곁에 남는 이야기. 그래서 이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뒤부터 다시 시작된다. 독자 안에서 아늑히 계속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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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증정 @ellelit2020 (가제본)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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