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불일암 사계
법정 지음, 맑고 향기롭게 엮음, 최순희 사진 / 책읽는섬 / 2017년 5월
평점 :

봄 여름 가을 겨울...
최순희님의 사진집 <불일암 사계> 속 사진들과 법정 스님의 글이 어우러져 편안한 마음으로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글들을 읽을 수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이 새겨진 삶
그리고 법정 스님과의 아름다운 만남
영화 <남부군>의 등장인물의 모델이기도 한 최순희님은 1924년에 태어나 이화여대를 나오고 일본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여성으로 사회주의자였던 남편을 따라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북한에서 지도층의 삶을 살다가 한국전쟁 때 한국으로 내려와 생포되었다고 한다.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 북에 남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 법정 스님과 만나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 책에는 최순희님이 그 사무치는 마음을 잊기 위해 올랐던 불일암 길과 그 길을 오르내리며 찍었던 사진 속에서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마다의 아름다움과 따스한 가르침에 읽어나가는 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천천히 녹차가 우려나듯이,
가장 페이지를 곱씹으며 읽어간 것은 겨울이었다.
소멸의 시기라 볼 수 있는 겨울이자... 또 다시 찾아올 희망인 봄을 기다리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몇 개만 설명하자면, “조고각하”를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신발을 벗어놓는 자리에서 자기가 서 있는, 지금 자기의 현실을 살피라는 것이다.
신발을 바르게 벗어두라는 표현도 되지만, 신발을 벗어놓는 다는 게 현재의 자신을 잠시 내려놓고, 이를 돌아보라는 교훈은 많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또,
지나친 감상주의인지는 모르지만, “불일암을 지은 이유”가 참 와 닿았다.
돈 한 푼 없었던 법정 스님이 불일암을 지으려는 게 헛된 생각인 것을 알았지만, 앞서 간 선인들이 지어놓은 집에서 덕분에 잘 지냈으니 그 은덕에 보담하기 위해 자기도 지어 또 다른 인연이 닿는 수행자가 와서 머물다 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었다고 해서 자기 것이 아니듯이.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어서 반가웠고, 또 나를 돌아보게 했다. 쓸떼없는 욕심과 번민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싶었다.
힘들 때마다 종종 불교서적을 읽곤 했었다. 특히 군부대에서 많은 혼란과 번민이라는 생각의 또아리가 머리 속에 틀어 감당할 수 없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무너지면 다른 사람도 힘들고, 나의 부정적인 기운이 남을 해할 수도 있으니 스스로 이를 삭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을 때 바로 도움을 받았던 게 불교서적이었다.
그 때의 기억이 많이 난다. 또, 불일암 풍경사진과 함께 법정스님의 글을 읽으니, 불일암을 거닐며 사색에 잠긴 스님과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내려놓으며 사진을 한 장 한 장 찍어갔던 최순희님의 모습이 상상도 된다. 그 느낌은 마치 잘 우려낸 녹차같은 느낌을 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맑고 향기로운 이런 풍경과 감정을 보고 느끼며 이유없는 복잡함이 나를 혼란스럽게 할 때 두고두고 손 가는 데로 페이지를 넘겨보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