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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규 오버그라운드 여행기
박훈규 지음 / 한길아트 / 2007년 6월
평점 :
영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런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빅 벤, 스톤헨지의 독특하고 인상적인 풍경, 비틀즈, 베컴과 축구. 이 정도로 영국을 떠올리고 있다면 이 나라의 아주 일부에 국한된 이미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하면 태권도와 김치를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책 <박훈규 오버 그라운드 여행기>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의 디자인과 문화, 음악 등을 소개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여러 건축과 조각들은 영국에 일 년 넘게 거주하면서도 내가 접하지 못한 것들이 꽤 많다.
그가 찾아다닌 여러 건물, 조각품들은 대부분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것들이다. 그러니 ‘빅 벤’과 ‘스톤헨지’ 정도로 영국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생소하고 독특할 수밖에.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라는 독특한 전공만큼 저자의 시각은 ‘세상과 소통하는 디자인’에 집중되어 있다.
책의 전반에 걸쳐 저자가 쫓아다니는 대표적인 작가들을 살펴보면 뱅크시, 앤터니 곰리, 윌리엄 모리스, 노먼 포스터 등이다. 이들은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그라피티, 건축, 조형 작업 등을 통해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미술 관련자가 아니면 잘 알 수도 없는 작가들이지만 책을 따라 그들의 작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런던에서 제일 먼저 저자가 조우한 작품은 뱅크시의 스텐실 그라피티다. 뉴욕이나 브룩클린 중심의 그라피티는 자기의 고유한 영역을 표시하거나 기존의 질서에 항의하는 듯 공공건물에 흠집을 낼 목적으로 그린 것이 많다. 그것들은 표현 형식의 절제도 없고 자유롭다는 느낌 외에 큰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진 못한다.
반면에 뱅크시의 작품은 아티스트로서의 특색이 물씬 풍기는 것들이 많다.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형태로 도시의 모든 환경을 거대한 캔버스로 삼아 현대적인 팝아트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코카인을 흡입하고 있는 경찰, 폭파 스위치를 힘차게 누르고 있는 원숭이 한 마리, 키스하고 있는 남성 경찰들 등 현대 사회를 조롱하는 듯 하는 주제성도 돋보인다.
저자가 찾아다니는 건물과 작품들 중에는 ‘밀레니엄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영국이 추진해 온 거대 공공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청계천 복원이나 시청 앞 잔디 광장, 광화문 프로젝트 등 공공을 위한 복지와 디자인에 최근 관심을 많이 두고 있다. 현재 영국의 밀레니엄 프로젝트는 90퍼센트 이상이 완료된 상태라고 한다.
밀레니엄 프로젝트는 새천년위원회의 주도 하에 새로운 과학센터, 시청 재건축, 시민 공동시설, 공원, 삼림지대, 교량, 극장, 환경, 교육, 예술 등의 사업을 수행하여 왔다. 이 위원회의 지원을 받기 위해선 일회성 전시든 영구적인 교량사업이든 기존의 것과는 다른 특출한 면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런던 아이(London Eye)라고 하여 템스 강변에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는 원형 기구는 우리나라 놀이동산에 있는 다람쥐 관람차를 확대해 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 이 거대한 조형물에 대해 저자는 놀라운 기술력과 디자인의 집합체라고 칭찬한다. 남산타워처럼 흔한 이름에 비해 ‘London Eye'라는 이름조차 콘셉트가 분명하여 좋다는 것이다.
런던 아이는 밀레니엄 프로젝트 중 2000년 1월 1일 카운트다운과 함께 개장한 최초 작품이다. 밀레니엄 프로젝트가 시작되던 당시만 하더라도 주변의 고전적인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 거대한 기구에 대해 혹평하는 영국인도 많았다. 지금은 런던의 명물이 되어 관광 상품으로 한몫 하고 있지만 말이다.
현재 밀레니엄 프로젝트는 꽤 많이 진행되어 고전적 분위기의 영국도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형태다. 7-8년 전 내가 영국에 있을 때만 해도 전혀 볼 수 없었던 대규모 현대식 빌딩이 곳곳에 들어서 있는 걸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오래된 것을 무조건 없애고 새로운 걸 짓는 방식은 전혀 아니다.
오래된 발전소를 현대 미술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한다든가(테이트 모던 갤러리), 맥주공장 주변의 시설들을 아티스트 전용 공간으로 이용하게 하는 등(브릭레인 방글라데시타운) 기존의 것을 재활용하는 데에서 영국인들은 놀라운 응용력을 보인다. 그러기에 오래된 것들과 새것이 전혀 따로 놀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풍경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 것이지만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 참으로 자부심이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거리를 걷다가 발견한 펭귄 출판사의 광고만 해도 그렇다. 역사가 오래된 이 출판사는 책 표지 모양을 열거하고선 다음과 같은 문구로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인식시킨다.
“지금까지 씌어진 책 중에서 가장 데카당스한 책(The Best Decadence Ever Written)
지금까지 씌어진 책 중에서 가장 수준 높은 책(The Best Highs Ever Written)
지금까지 씌어진 책 중에서 가장 섹시한 책(The Best Sex Ever Written)
지금까지 씌어진 책 중에서 가장 폭력적인 책(The Best Violence Ever Written)
지금까지 씌어진 책 중에서 가장 방탕한 책(The Best Debauchery Ever Written)
지금까지 씌어진 책 중에서 가장 최고의 책(The Best Book Ever Written)”
저자는 이런 자만이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는 감탄을 숨기지 못한다. 게다가 이 광고의 표현 기법 또한 독특하다. 게릴라 아티스트들의 표현 기법을 차용하여 마치 책꽂이에 책들이 죽 꽂혀 있는 것 같은 포스터를 만들어 거리에 붙여 놓는다. 언뜻 보면 광고라기보다 마치 거리 예술처럼 느껴지도록 말이다.
영국의 힘은 바로 이런 데 있다. 기존의 문화를 높이 사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어떤 이들은 영국을 ‘변하지 않는 나라’라고 평가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국은 변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끊임없이 변하는 나라라고, 그 변화의 방향은 새롭고 실험적이면서 독창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변화의 결과가 긍정적인지 그렇지 못한지는 후대의 역사가가 평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