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을유사상고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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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내내 읽었지만 관련된 칸트 입문서 쇼펜하우어 입문서 등을 읽고 찾아보며 번역이 좀 갸우뚱할 때Payne 및 Janaway등 영문판 3개와 비교해보며 읽어서 정말 숨가쁘게 읽었다. 쇼펜하우어 말대로 플라톤의 작품들처럼 미로를 통과한 후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고 깨뜨린 이후 다시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가 나의 무지를 혹은 나와 세상의 무를 담담히 받아들인 기분이고 워낙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이 아니하 각 장마다 서로 긴밀하고 유기적인 연결을 통해 소통하기에 두번에 그치지 않고 서너번은 읽어야겠다.

알라딘 인덱스로 부족해서 여기저기 다 끌어모은 이 난잡함;;; 책 속은 더 지저분하다;; 부끄;;

1,2권이 각자 표상과 의지의 총론이라면 3,4권은 각론으로 그 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즉 예술과 성스러움 속에서의 의욕의 부정에 대해 각각 다룬다.

 

1,2권에서 어려움을 느낀 사람은 부록인 칸트철학비판을 읽고나면 1,2권이, 즉 쇼펜하우어의 글이 칸트에 비해 훨씬 더 글솜씨도 좋고 사상도 더 명료하고 덜 혼란스럽다는 걸 절감하고 상대적으로(?) 더 쉽게 읽을 수 있다. 플라톤의 글을 읽을 때처럼 쇼펜하우어의 글은 통상적인 철학자들에 비해 훨씬 시적이고 문학적인 느낌의 적절한 비유와 적절한 예시를 통해 꽤 명쾌하고 예술적 영감을 주는 글이다. 그래서 을유문화사의 개정판이 철학을 전공한 다른 역자들에 비해 독문학을 전공한 홍성광의 번역이 어쩌면 더 적절했을지도 모른다.

 

홍성광의 가독성 높은 번역 외에도 을유문화사의 개정판의 장점은 바로 풍부한 삽화! 각 권마다 epitaph와 그 권에 적절한 삽화도 좋지만 특히 예술작품에 대한 제3권에선 정말 이 삽화들이 소장가치를 뿜어낸다. 라오콘의 표정을 아무리 말로 잘 표현한다해도 백문이불여일견. 이렇게 한눈에 감이 뙇! 와닿는다.

 

 

 

1권이 수학 과학 논리학 등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다루고 (이과생인 나로서는 쇼펜하우어의 이 책이나 심지어 고대 그리스철학에서도 다윈의 진화론이나 현대 물리학과 인지과학에 관한 통찰이 담겨있다는게 놀랍다) 2권은 표상과 함께 마치 메타인지를 논할 때의 에셔의 그림 “서로 그리는 두 개의 손”인 듯한 의지와 표상 간의 관계를 다룬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버트란트 러셀 등 생전에 무시받았던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안 닿은 현대 거장들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1,2권과 칸트 철학 비판을 함께 보면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3권이 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두 방법 중 하나인 예술과 문학에 대한 고찰로 공감하게 하고 고독한 천재성과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저속한 취향의 범인들에 대한 비아냥으로 (실로 쇼펜하우어는 문학 음악 등 많은 예술에 대한 감각과 재능이 훌륭하고 칸트처럼 예술을 무슨 이론이나 평가 공식으로 판단하려는 걸 비판했다.) 쇼펜하우어 자신의 이야기를 보는 듯해 재미있었다. 반면 4권은 윤리, 종교, 삶과 죽음 등에 대한 고찰로 엄숙한 숭고함을 안겨준다.

나는 한번은 자의적으로 그리고 한번은 비자의적으로 죽음과 마주봐야한 경험이 있다. 죽음을 거부하고 삶에 대해 집착하고 후회하는 동안의 나는 너무나도 괴롭고 좌절했지만 오히려 더이상 어찌 할 방법이, 달리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오히려 그전에 비해 평안이 찾아왔다. 아 내 아이들은 어쩌지 지금까지 난 왜 이렇게 살아온거지 하고 “고뇌를 단순히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제 이렇게 무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라는 걸 “스스로 감각”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의지의 부정이 가능한 것을 종교인이나 성인이 아니어도 고뇌나 죽음을 맞닥뜨렸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공감이 갈 것이다.

 

.그리고 자의적으로 죽음과 마주한 아주 경솔하고 이기적인 나를 돌아보고 질책하둣 69장은 자살이 삶에의 의지의 부정이 아닌 긍정이라고 한다. 진정한 의지의 부정은 삶의 고뇌가 아니라 삶의 향유를 혐오하는 것이고 자살자는 이런 삶을 의욕하지만 삶의 여러 조건에 만족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을 읽고 한없이 부끄럽고 후회가 되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며 무로의 회귀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정한 의지의 부정, 열반을 느낀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고뇌와 고독 속에 지쳐서 위안이 필요해질 때 쇼펜하우어의 글을 되찾아올 것 같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우리가 한편으로 치유할 수없는 고통과 끝없는 비참을 의지의 현상인 세계에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다른 한편으로 의지가 없어지는 것에서 세계가 녹아 없어지는 것을 보고 눈앞에 단지 공허한 무만을 간직한다면, 이 고찰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p. 544

칼 세이건의 책에 나온 세르비아 속담대로 “Be humble for you are made of earth, be noble for you are made of stars”처럼 우리 모두가 별들의 먼지로 이루어진 것을 깨닫고 스스로와 대우주를 하나의 무로 받아들이면 숭고함과 겸허함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데 쇼펜하우어의 양면적 세계에 대한 책에서 발견한 마지막 문장도 그런 양가적 감동을 준다.

... 우리는 모든 덕과 성스러움의 배후에서 궁극적인 목표로 떠도는 어두운 인상, 아이들이 어두움을 무서워하듯 우리도 무서워하는 무의 어두운 인상을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의지가 완전히 없어진 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직 의지로 충만한 모든 사람에게는 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고백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의지가 방향을 돌려 스스로를 부정한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그토록 실재적인 이 세계는 모든 태양이나 은하수와 더불어 무無인 것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p.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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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
사마광 지음, 푸챵 엮음, 나진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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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서나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을 읽으면서

중국역사에 대해 너무 무식해서 언젠가 사마천이 사기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큰맘먹고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만 해오다가 그 방대한 양을 한 권으로 축약해준 책을 얻게 되어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이렇게 간편하게 접하게 되었다.

기전체인 사기와 달리 시대순으로 된 편년체의 형식을 취한 자치통감은 일단 제목의 '통'에서 나왔듯이 통사를 볼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서부터 후주까지 사마광이 살던 송나라에 이르기 전까지의 중국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볼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자료가 되며 역대란 거울을 통해 현재를 비춰볼 수 있다는 취지가 제목에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대왕, 마오쩌둥, 시진핑 등 많은 지도자들의 사랑을 받은 책이다.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그냥 중간관리 정도의 단계에서나 말단 신하의 단계에서나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우선 역사의 흐름을 보면서 대개 첫 시작이 웅장해도 그 성함에 취해 오만이나 태만, 방탕에 빠져 끝으로 가면 갈수록 기울어져 쫄딱 망하는 게 한 인간의 일생이나 한 나라의 국세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 지도자 뿐 아니라 평범한 범인도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이 될 것 같다.

다만 이 책에서는 명시해있지 않지만 원서에서는 신광왈(臣光曰)이라는 표현으로 사마광 자신의 commentary를 더했듯이 중간중간에 작가의 의견이 개입되어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편집함에 있어서도 보수적인 작가의 bias가 들어간 것이 아닐까 싶다. 한과 당에 대하여 책의 배분을 많이 할당한 것 같고 대부분 그의 보수적 유교주의와 정통성에 의해 어떤 인물의 적합성이나 미덕을 평가하면서 그와 대치한 왕안석의 신법을 뒤엎기 위한 초석을 깔아놓는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마광이 역사가이기도 하지만 또한 현직 정치가였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윈스튼 처칠이 쓴 '제2차 세계대전'처럼 항상 역사가가 누구인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염두에 둬야하는 책이다.

예를 들어 평이 엇갈리고 역사의 판단에 맡긴 무자비(無字碑)를 남긴 측천무후는 사마광(또는 이 자치통감을 편역한 푸창)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 것 같은데 과연 그녀가 궁녀라고 해서 그녀의 자질이나 업적(정작 그녀가 다스린 시기에 대해서보다 그녀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녀가 총애하던 남자들에 대해서만 다룬 것도 좀 편파적이다)은 무시할 수 있나? 당나라 조정의 부패 속에서 반란자들이 과연 물리쳐야할 적이었나? 그리고 환관들의 일방적 문제였나 아니면 그 전에 환관들이 조정을 휘어잡기 전에 무능하고 방탕한 왕족과 대신들의 문제인가? 결국 싹다 갈아엎어야 할 정도로 썩은 조정이나 능력없고 해만 되는 왕에 대한 충성을 지키려고 싸우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수시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교조주의적으로 정통성과 충을 옹호하는 유교적 역사관이 통사를 통해 유지될 수 있는가? 마지막 송의 태조가 될 조광윤이 반짝하며 등장하는 후주의 세종이야기로 마무리하는 것에서도 그의 편집능력이 돋보인다.

특히 사마광의 원서를 안 본 상태에서 이 편역자인 푸창이 그 중에서 또 편역자의 의견에 맞는 부분만 발췌하고 편역할 가능성이 있어서 어찌보면 사마광의 원서도 이 짧은 축약본도 역사란 거울의 깨진 파편 중 하나 뿐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친숙한 고사성어들의 유래를 역사 속에서 접한 것, 그리고 삼국지에서 익숙했던 캐릭터들을 새롭게 접하는 점 그리고 내 자신이 여성이어서 중국사에서 그려진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당태조의 후궁들처럼 왕을 타락시키거나 (그런데 솔직히 왕이 국사를 등한시하고 후궁에 빠져 사는것은 그 여자들 탓만 하면 안되지 않나?) 자기 사리사욕만 챙기는데 급급한 호태후도 있는 반면 알코올중독이 되고 성격까지 변한 듯한 못난 왕에게 모욕받고서도 측은심을 느낀 누태후같은 여성도 있다. 그 외에도 공사구별이 확실하며 검소하고 현명한 국모라고 극찬받은 동한 명제의 마태후와 당 태종의 장손황후 등의 모습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보수적인 현모양처를 옹호하는 사마광 입장에서는 좀 편파적으로 묘사되고 업적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중국 황제가 된 무측천도 있으며 곽기를 해독하기 위해 희생당한 계집종도 있는 등 참 고대 중국에서 다양한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흥미로웠다.

마지막으로 사마광의 자치통감이 아닌 바로 이 책,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에 대해 특별히 평하고 싶은 것은 한 권으로 짧게 묶여서 몇백권이나 되는 자치통감을 일주일 안에 읽을 수는 있어서 전체적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실제로 조각들이 많이 빠진 퍼즐을 보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무측천 이후 갑자기 당 문종의 감로지변으로 넘어가는 등;;) 완역본은 못 읽을지라도 권중달 교수의 3권으로 이루어진 자치통감으로라도 다시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은 각 장마다 삽화들이 있어서 보는 즐거움이 있는데 그 삽화들을 넣는 배려로 인물 연대기와 고대 중국의 지도를 부록으로 넣어주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중국역사에 무지한 나는 심지어 중국 역사의 흐름도 확실하지 않아 유흥준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초반에서 저자가 알려준 중국사 흐름을 외우기 쉽게한 조선족 학생들이 만든 노래를 참고하기도 했다. 하물며 인물들이나 고대중국지도(아니 실은 현대중국지도도 자세히 모른다;;)는 더욱더 낯설다. 이왕 독자에 대한 배려를 하는 김에 좀더 인심을 썼으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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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하게 산다는 것 - 모멸의 시대를 건너는 인간다운 삶의 원칙
게랄드 휘터 지음, 박여명 옮김, 울리 하우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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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나는 책을 잘못 골랐던 것 같다.

뇌신경학자고 하고 소개글의 '당신의 죽음이 존엄하길 원한다면 먼저 삶이 존엄해야 하지 않겠는가'란 글만 보고 나는 존엄사에 대한 뇌과학적 최신 견해를 알려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이 책을 골랐는데 일단 '미리보기'를 어느정도 읽어보고 다음에는 서평을 골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존엄사에 대한 내용은 없다. 오히려 존엄하게 죽기에 앞서 우선 존엄하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설파하는 책이고

과학적 내용이 아주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이미 잘 알려진 연구결과라면서 그다지 깊게 들어가지 않고 연구 출처도 밝히지 않는 점이 매우 아쉬웠다.

앞의 1장은 현대사회에서 갈수록 이익극대화와 최적화의 알고리즘에 의해 복잡해지고 타인과의 공존이 이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유일한 나침반이 되어 주는 것이 존엄이라고 한다. 2장에서는 이 존엄이라는 것의 언어적 (독일의 문법이 참 어렵다고 새삼 느낌;;) 역사적 사상적 유래에 대해 칸트 및 독일 헌법, UN헌장 등을 언급하며 다소 긴 서론으로 들어간 후 3장부터에서야 다소 뇌과학자다운 글들이 나온다.

3-5장에서는 뇌과학과 관련된 내용이 많아서 관심을 갖고 재미있게 읽었으며 밑줄도 많이 쳤다.

다만 연구 출처 등이 수록되지 않은 점이 많이 아쉬웠다. Jared Diamond의 Upheaval도 그렇고 요즘 reference 안 다는 게 트렌드인가? 도중에 집어넣은 사진들을 줄이고 reference를 넣는 편이 나았을 텐데..

가소성(Plasticity)를 가진 인간의 뇌는 학습능력이 가장 많이 진화하고 죽을 때까지 그 학습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덕분에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하고 후세에도 그리고 수평적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에게도 이 지식을 전해줄 수 있다. 이렇게 전파된 견해와 지식은 구성원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가치관과 삭방식을 만들어 공존을 위한 기준이 된다. 즉 이렇게 끊임없이 학습이 가능하고 전파가 가능해진 인류의 뇌는 사회적 뇌인 것이다.

개체에 맞는 신체적 특성에 맞추어진 삶을 살아가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평생에 걸쳐 새로운 경험들을 토대로 뉴런이 연결되고 회로 패턴이 형성되며 지금까지의 발전과정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우리의 관념에 따라 만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이렇게 세상에 적응하도록 고착되고 구조화된 우리 적응 방식이 옳지 않다고 판단될 때는 더 나은 방법을 위해 고민하고 실행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글로벌 시대 속에서 환경파괴가 진행되며 우리는 살아갈 터전이 줄어들며 심지어 외계 행성까지 넘보고 있다. 어차피 인류가 갈만한 행성이 있다고 해도 그 행성 또한 지구처럼 황폐하게 만들어버릴 것이라면서 작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가치관을 유지하며 지금처럼 살아갈 새로운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이해다."라고 말한다.

그런 인간답게 만들어줄 만한 이해를 위해 각자의 신념이나 시각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작가는 '실패'와 '만남'을 추천한다. 지금까지의 인생관과 그에 따른 자아상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어야 여태껏 놓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각성을 위한 '실패'보다 더 효과적인 '만남'은 자신과 다른 낯선 신념을 마주하고 자아상과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것들을 확장시키며 상대적인 관점을 얻게 할 것이다.

이런 '만남'의 필수적인 사회 구성원에 대한 '관심'은 영장류의 사회적 학습의 특징이라고 작가가 지적한다. 다른 구성원의 행동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흥미롭게 여기며 이를 따라하는 것으로 공동체에 지식과 능력이 전파되는 공동체 조직의 능력이다.

이런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경험들은 소속감과 자율성이라는 인간의 두 가지 욕구를 충족시켜 공동체 안의 구성원들이 각자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각자 유익한 발견을 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개개인의 발전이 계속되면서 이 구성원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감이 필요하기 때문에 구성원 모두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한다. 새로운 발견이나 능력 뿐 아니라 유익하다고 인정받는 신념 또한 전파되는데 이 신념은 다시 개인의 유일무이함을 인식할 수 있게하는 정체성, 자율성을 강화할 수도 있고 구성원들 간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이념으로 피드백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자율성의 본능이 너무 강하게 표출되며 인간의 이기심으로, 반대로 연대감을 바탕으로 사랑이나 이타주의 등의 관념이 생기기도 한다.

개인이 과거에 겪은 경험들이 이후 개인적/사회적 경험들을 통해 끊임없이 재현되며 그 과정에서 사용하지 않는 신경망들은 위축되고 자주 활성화되는 경험과 행동 패턴들은 갈수록 강화되며 신경망 패턴의 형태로 뇌 안에 구조적으로 저장된다. 어떤 문제가 있으면 인간의 뇌는 감정중추가 활성화되면서 혼란을 일으키는데 뇌활동이 일관된 상태에서 멀어지면 이를 안정시키도록 활성화된 신경망들은 더욱 확장되고 강화된다. 즉 삶의 중요한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한 해결책들을 기반으로 뇌가 구성된다. 이 과정에서 소속감과 자율성을 동시에 경험하면 경험할 수록 이런 욕구들이 뇌에 단단히 고정되며 자기 존엄성을 인식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즉 존엄이라는 관념은 인간의 뇌의 조직과 기능방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인간에게만 있는 표상이며 분명하게 의식할 수 있는 성향이라고 자가는 정의한다.

현재의 우리가 왜 자신의 존엄과 타인의 존엄을 위한 삶과 공존에 무능한지에 대한 질문에도 작가는 생존의 문제라는 생물학적인 설명으로 대답한다. 생존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며 우리는 해결책을 찾는데 그 해결책이 단기적 해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성공적 전략같아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시킨다.

여기서 작가는 재미있게 열역학 제2법칙을 언급한다. 에너지가 자연의 모든 현상에 고르게 분배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의 논리에 따라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는 자기 조직화의 능력을 갖고 있어야한다. 엔트로피를 낮춰야 생존을 위한 에너지 공급이 가능하고 자기 조직화를 잘 할 수록 생존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부 조직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소비되는 에너지의 양이 적을수록, 조직의 해체를 극복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우리 뇌도 내부조직 중 하나이고 가용 에너지의 양은 한정적이다. 시스템의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시스템은 무너지고 그 에너지는 다시 균일하게 자연계에 분산된다.

우리가 어떤 문제로 인해 갈등상황에 처하거나 새로운 것을 학습할 때 우리의 가만 있고 싶어하는 뇌는 이를 반기지 않고 에너지 소비량은 급격히 치솟는다. 이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는 인간의 몸에도 영향을 주어 지치게 만든다. 이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감정의 억압, 기분 전환, 분열, 부정 등 여러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뇌의 내부질서가 혼란스러워지면 뇌는 다시 에너지 소비를 평소대로 낮춰줄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고 이 해결책 중 하나가 '단순화' 작업이다. 우리 몸의 다양한 단일 행동과 반응을 조화롭게 조정하기 위해 상위의 패턴을 형성하고 자동화시키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 '태도'는 지난 삶을 통해 축적된 경험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특정 상황에 처할 때 매번 그에 적합한 행동패턴을 고민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일관된 행동으로 이끄는 go-to manual같은 '태도'를 가지는 게 에너지 소비가 적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과 태도 역시 뇌에 뿌리 내린 상위 행동 패턴에 따라 조정되고 형성된다. 이것은 유년기에 이루어진 '자아상'이고 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결정하며 어떤 존재가 되길 원하는지, 어떠한 삶의 방향을 따라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토대로 결정을 내리는지에 대한 개념이다. 이런 시스템들 간에 마찰이 없이 일관성 (consistency)을 유지하면 내적 질서를 위해 소비되는 에너지도 최소화할 수 있다.

행동의 지표가 되어주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자아상을 형성하여 복잡성을 줄이는 것이 우리 뇌의 본연의 능력이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동물의 폐쇄적 구조, 특화된 인지 능력, 타고난 행동 패턴을 갖지 않고 매우 개방된 체계이기 때문에 일관성이 무너지기 쉽다.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내부조직의 불일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뇌는 계속 진화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평생 학습할 수 있는 뇌가 발달했다. 불일치 상태에서 일관성을 되찾기 위해 중뇌에서 신경가소성을 가진 (neurotrophic) 화학물질들이 배출되어 일종의 거름처럼 신경세포 돌기의 성장을 돕고 문제해결을 위해 활성화된 뇌 영역에서 새로운 신경망 형성을 자극한다.

신념, 표상의 형성과정에서도 역시 복잡한 뉴런 연결 패턴의 형식으로 전두엽에 자리잡는데 이는 개인의 경험을 통해 저장되는 모든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만든다. 즉, 새로운 경험은 전두엽에 형성된 자아상 형태의 경험에 추가되고 연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내적 표상은 인격의 핵심이 되며 고유의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경험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경험들을 통해 내적 표상을 만든다. 공존에서 오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어떤 모습의 인간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찾기 위해 5장에서는 동물들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형성되지 않은 인간의 신경망 때문에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학습되는 사회화된 신경회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특정 상황이 자신의 기대와 일치하지 않는 불일치상황을 정상적인 상태와의 비교를 통해서만 인지하고 이 정상적인 상태에 대한 정보가 이미 신경망에 저장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아기일 때부터 인간은 타인과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 무엇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즉 존엄에 대한 내면의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작가는 역설한다. 이것은 엄마의 자궁 속에서 뇌가 생성되는 과정부터 생긴다고 한다. 자궁 속에서부터 타인과의 관계라는 (태교에 대한 근거가 되는건가?) 경험 속에서 이런 내면의 기준에 대한 뇌의 연결패턴이 활성화되며 뿌리내리는데 이 때 반드시 해야할 경험이 소속감과 개인으로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자율성의 경험, 그리고 자신의 창의력에 대한 경험이라고 하며 이런 경험들을 주는 만남을 '사랑'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후 6장부터는 그래서 이런 지식들을 어떻게 교육적 사회적 방침에 적용할지 앞으로 존엄을 어떻게 되찾을지에 대한 방향에 대해 피력하는데 교육적/사회적인 정책으로 발전하기에는 다소 두리뭉실하기도 하고 너무 낙관적이다 못해 좀 단순하다는 게 아쉬웠다. 메시지는 좋지만 그 메시지를 담아내는 매체가 시작이 너무 거창한 데 비해 그 메시지를 잘 다듬지 못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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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거위
라이먼 프랭크 바움 지음, 윌리엄 월리스 덴슬로우 그림, 문형렬 옮김 / 문학세계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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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로 유명한 프랭크 바움의 동시집을 한국에서 번역했다. 그것도 덴슬로우의 삽화를 그대로 싣고 원 영문과 한국어 번역을 동시에!

(민음사 세계시인선도 이렇게 원문과 번역을 함께 싣는데 소설과 달리 시는 이렇게 원문의 느낌을 알 수 있게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

프랭크 바움은 페미니스트 운동을 지지해서 그런지 제목부터 mother goose가 아닌 father goose로 뒤집었는데.. 글쎄 엄마 거위 이야기가 쓸모없었다는 거나 엄마 대신 아이들을 돌본다고 해서 '불쌍한' 아빠 거위라고 하는 거나 페미니즘에 대해 뭔가 오해한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을까 우려도 된다. 뭐 장모가 suffrage 운동가 Matilda Joslyn Gage였으니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자신은 여성 편에 서있다고 하면서 실은 왜곡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의 흑인이나 미국 원주민에 대한 인종차별적 태도가 담긴 시들은 한국 출판사 측에서 현명하게 없앴다지만 그가 기고한 인디언 학살을 옹호하는 사설 등과 함께 현재 이 작품이 아무리 그런 작품들을 걸러냈다고 해도 문학적 가치를 갖고 있는 책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빈티지한 덴슬로우의 삽화는 마음에 들고 어떤 시들(대머리 할아버지, 조지 워싱턴)은 살짝 마음에 들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너무 단순해서 내가 동시에서 바라는 상상력을 자아내는 그런 맛이 부족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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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서구 사회에서 살아온 동양인 여자애로서 나는 안그래도 ‘어울리지 못함‘에 대해 자의식과잉이었던 사춘기에 ‘나‘를 이 동네의 ‘타자‘로 인식하고 심지어 모국인 한국에 돌아와서도 단일민족 문화에 대한 자긍심 때문인지 마치 내가 한국인으로서 뭔가 결여된 듯이 완전한 소속감이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갖고 성장했다. 그리고 미투 운동, 김치녀, 맘충이란 단어에 분노하는 여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외국인과 성소수자 무슬림 장애인 등에 대한 혐오나 차별적 발언을 함께 들으면 ‘아, 저 사람들은 남성 사회에서는 차별받거나 배제된 경험이 있는 피해자였어도 다른 정체성의 속성에 대해서는 아예 타자와 직접 교류한 경험이 별로 없거나 경험이 있어도 차별/소외의 대상이 아닌 또 다른 입장에서만 서본 사람들이구나..‘하고 정체성은 참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처럼 ‘나‘와 ‘타자들‘을 경계짓는 선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다원화 사회 속에서 이전에 비해 더 복잡해진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솔데 카림은 그 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태도를 깨뜨리기 위한 망치가 되는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우선 저자는 다원화 사회를 파헤치기 이전에 되돌아가 과거부터 시작한다. 과연 다원화라는 말이 나오기 전의 과거에 있던 동질사회는 무엇인가? 이 책은 변화 이전의 동질사회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상징적, 물리적 폭력을 필요로 한, 의도된 정치 행위의 결과로 보고 있다. 게다가 민족이나 동질 사회라는 상상은 언제나 잘 기능하는 허구였다고 한다.

우리가 소위 독일인은 꽉 막혔고 이탈리아인은 제멋대로고 그런 식의 스테레오타입화된 민족 유형은 민족 형성을 통해 이루어졌다. 유럽 사회의 민족 형성과 민주화 운동은 동시에 일어났지만 정체성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 반대의 방향을 가리킨다. 민주주의는 ‘보편적 개인‘의 생성을 의미하고 책에서는 이 사회의 개인화를 크게 1세대, 2세대, 3세대 개인주의로 분류한다. 1세대 개인주의의 민주화에서는 보통선거의 1인1표 원칙을 위해 우리가 누구든 상관없이 산술적으로 동등한 추상적 평등을 지향했다. 반면 민족 형성 운동은 이렇게 생성된 공적 정체성에 민족서사를 통해 구체적인 형상과 규정을 제공했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동질사회에서 규정한 하나의 환경이 개인에게 온전한 정체성을, 그리고 당연한 소속감을 보장했다.

하지만 다원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단 하나의 유형, 단 하나의 환경으로 조직되지 않고 민족적 형상이라는 허구가 없어진 우리는 더 이상 온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2장에서는 그런 오늘날의 다원화를 설명한다. 동질 사회의 허상을 파헤친 저자는 다원화에 대한 오해 또한 해부대에 올린다. 우선, 사람들이 다원화를 고유한 토착 문화에 단순히 더함으로써 생긴다는 오해를 하는데 다원화는 더하기가 아니다. 다원하는 더한것을 빼거나 통합함으로써 피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기정사실이며 합해진 개별 요소들이 변하기 않고 그대로 있는 더하기가 아니고 기존의 사람들과 새로운 사람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오늘날 모든 문화에는 이웃한 문화가 있고 더이상 당연한 문화, 당연한 소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저항하는 주도문화 (Leitkultur) 논쟁에서 저자는 정상성, 당연함이 단지 그 정상적 형태가 통용되는 집단에 소속되는 이들만을 위한 가치이며 정상석이 배제 및 제외의 역학이라고 꼬집는다. 일자로서의 유형의 해체는 개인주의의 역사와도 연관되었다. 1장에서 언급된 거대 조직들에 개인을 변화시키는 일을 맡겼던 1세대 개인주의에 이어 1960년대 이후 자기만의 길을 걷는, 자기 진실성이 중요시되는 소수자 운동 (여성운동, 동성애운동, 흑인인권운동 등)으로 자신이 변하지 않은 채로 차이를 인정받는 제2세대 개인주의에 이어 3세대 개인주의라고 하는 오늘날의 다원화가 나타났다. 다원화는 2세대 개인주의와 달리 정치운동이 아니라 목적 없는 변화가 낳은 효과이며 민족의 형상을 재규정하려 하지 않고 민족 형상의 침식을 촉진한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다원화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정체성이나 소속이 당연하지 않은 축소된 자아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정체성의 precariat가 되었고 이런 변화는 종교, 문화, 정치 등 사회의 모든 무대에서 진행 중이다. 종교에서는 이제 전통에 의해 전승되었고 자신의 자리를 지정받는 대신 신앙의 개인적 선택이라는 세속적 요소가 들어온다. 이것이 반드시 성숙한 결정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이슬람 근본주의 등이 보여주고 있다. 문화의 무대에서는 단지 하이퍼 문화와 본질주의적 문화와의 대립이 아닌 완전한 상징과 불완전한 상징의 대립관계가 나타난다. 원주민의 문화와 이민자의 문화 사이에 정치전선이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포괄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과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즉 Who are you?(너는 누구냐?)가 아니라 Who do you think you are?(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를 물어봐야할 때다. 우리는 나와 타자, 아군과 적군의 허구를 만들어 내서 구별지을 뿐.. 실제로는 그 구별짓기의 실체는 우리의 상상일 뿐인 것을 알아낸 지금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대한 메타 인지가 필요하다. 즉 스스로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정치적 무대에서도 1세대 개인주의가 정당, 2세대 개인주의가 NGO 등 보다 부분적인 소수를 대표하는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었다면 오늘날의 정치무대는 탈정치화라고 오인될 수도 있는 정치운동의 외주화가 진행되고 있다. 5장에서 팬으로서의 참여가 말해주듯이 마크롱같은 스타 정치인, 전문가에게 정치 운동은 위임되고 대중은 경청받고 인정받는 무대를 제공받고 정치활동의 성공을 배당받는 일종의 팬으로 변했다고 지적한다. 이어서 포퓰리즘이 다원화 세계에서 축소된 정체성에 의해 촉진된 부정적 감정(분노, 불안 등)을 이용하여 이를 표현할 분출구가 되어주면서 세계 정치 무대에 자리잡은 것에 대한 분석과 이에 반응하는 좌파의 비판에 대한 비판으로 배울 교훈을 가리킨다.
바보 멍청이들아! 문제는 측정할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것들이라고!하며 이성에 대한 호소와 계몽 및 경제적 분배만 강조하는 좌파들의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느낌이다.

모두가 공유하는 일자의 세계관이 없고 사회는 이에 대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중립성 뿐이다. 하지만 그 중립성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할 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날카롭게 의문을 던진다. 당연함에서 벗어난 다원화 사회에서는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는 집요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래서요? 다원화 시대의 우리는 대체 뭘 어쩌란 말입니까?하고 질문을 묻고 싶어지는 충동이 들 무렵 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질문으로 갈무리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떤 답변, 즉 단순한 해결책을 누군가가 제시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내포하며 이런 질문을 또다시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들에게 맡겨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현 시대의 징후라고 날카롭게 꼬집는다.

저자로서 뭔가 구체적 결론을 피해가는 것 같아 의심쩍기도 하지만
저자는 이런 질문을 쳇바퀴 돌리는 정치적 전문가의 사이클에 맡기지 말고 스스로 찾아가기 위해
자신들이 당연시한 허상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분석하는 메타 인지적 상황의 규정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외부적 규정보다는 자발적인 주의와 침착해짐을 통해
모든 다양함이 동등하게 만나 서로 교류하고 경험할 수 있는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표현하고자 ‘만남 지역(Encounter zone)‘이라는 metaphor를 사용하는데
한국에는 이런 개념이 아직 없어서 메시지가 잘 전달되지 않은 점이 좀 아쉬웠다.
Shared space나 encounter zone, traffic calming zone, living street라는 호칭들이 보여주듯이 교통의 약자들(보행자)가 강자들(자동차)과 만나고 함께 공유하는 삶의 터전으로서 좀더 침착한 정신과 늦춰진 속도로 약자를 배려하고 스스로 조절하는 장소. 전문적 외부적 규제에서 벗어나 자발적 통제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위키피디아의 자가 교정 기능처럼 갈수록 미래는 이런 자기 인지 및 자기 고찰이 필요해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별 성지향성 정신과 신체의 장애 외국인 및 종교적 차이 지역 차이에 대한 혐오 발언과 우파 좌파의 양극적 분열 등은 지금 지나치게 과열되어있다. 게다가 이런 부정적 감정을 대중에게 위임받아 대신 분출시키고 대중을 대신하여 거의 막말을 남발하며 발언하는 ‘전문가’들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나는 솔직히 요즘 너무나도 잡다한 것까지 청와대에 청원으로 올라오는 것도 걱정되지만 단지 이런 일시적인 감정 발산과 단순 지지/반대로 인해 실제 토론과 교류에 대한 욕망/필요를 대리만족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그것이 우파이든지 좌파이든지 포퓰리즘의 다수결에 편승해서 개인의 생각과 다양성이 묻혀버리는 건 아닌가
단순한 해결책에 대한 우리의 헛된 희망사항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은건 아닌가
상상 속의 타자에게 우리의 불만을 돌리려고 하며 실제 대면해야 할 것을 피하는 게 아닌가


https://en.wikipedia.org/wiki/Living_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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