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서구 사회에서 살아온 동양인 여자애로서 나는 안그래도 ‘어울리지 못함‘에 대해 자의식과잉이었던 사춘기에 ‘나‘를 이 동네의 ‘타자‘로 인식하고 심지어 모국인 한국에 돌아와서도 단일민족 문화에 대한 자긍심 때문인지 마치 내가 한국인으로서 뭔가 결여된 듯이 완전한 소속감이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갖고 성장했다. 그리고 미투 운동, 김치녀, 맘충이란 단어에 분노하는 여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외국인과 성소수자 무슬림 장애인 등에 대한 혐오나 차별적 발언을 함께 들으면 ‘아, 저 사람들은 남성 사회에서는 차별받거나 배제된 경험이 있는 피해자였어도 다른 정체성의 속성에 대해서는 아예 타자와 직접 교류한 경험이 별로 없거나 경험이 있어도 차별/소외의 대상이 아닌 또 다른 입장에서만 서본 사람들이구나..‘하고 정체성은 참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처럼 ‘나‘와 ‘타자들‘을 경계짓는 선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다원화 사회 속에서 이전에 비해 더 복잡해진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솔데 카림은 그 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태도를 깨뜨리기 위한 망치가 되는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우선 저자는 다원화 사회를 파헤치기 이전에 되돌아가 과거부터 시작한다. 과연 다원화라는 말이 나오기 전의 과거에 있던 동질사회는 무엇인가? 이 책은 변화 이전의 동질사회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상징적, 물리적 폭력을 필요로 한, 의도된 정치 행위의 결과로 보고 있다. 게다가 민족이나 동질 사회라는 상상은 언제나 잘 기능하는 허구였다고 한다.

우리가 소위 독일인은 꽉 막혔고 이탈리아인은 제멋대로고 그런 식의 스테레오타입화된 민족 유형은 민족 형성을 통해 이루어졌다. 유럽 사회의 민족 형성과 민주화 운동은 동시에 일어났지만 정체성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 반대의 방향을 가리킨다. 민주주의는 ‘보편적 개인‘의 생성을 의미하고 책에서는 이 사회의 개인화를 크게 1세대, 2세대, 3세대 개인주의로 분류한다. 1세대 개인주의의 민주화에서는 보통선거의 1인1표 원칙을 위해 우리가 누구든 상관없이 산술적으로 동등한 추상적 평등을 지향했다. 반면 민족 형성 운동은 이렇게 생성된 공적 정체성에 민족서사를 통해 구체적인 형상과 규정을 제공했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동질사회에서 규정한 하나의 환경이 개인에게 온전한 정체성을, 그리고 당연한 소속감을 보장했다.

하지만 다원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단 하나의 유형, 단 하나의 환경으로 조직되지 않고 민족적 형상이라는 허구가 없어진 우리는 더 이상 온전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2장에서는 그런 오늘날의 다원화를 설명한다. 동질 사회의 허상을 파헤친 저자는 다원화에 대한 오해 또한 해부대에 올린다. 우선, 사람들이 다원화를 고유한 토착 문화에 단순히 더함으로써 생긴다는 오해를 하는데 다원화는 더하기가 아니다. 다원하는 더한것을 빼거나 통합함으로써 피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기정사실이며 합해진 개별 요소들이 변하기 않고 그대로 있는 더하기가 아니고 기존의 사람들과 새로운 사람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오늘날 모든 문화에는 이웃한 문화가 있고 더이상 당연한 문화, 당연한 소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저항하는 주도문화 (Leitkultur) 논쟁에서 저자는 정상성, 당연함이 단지 그 정상적 형태가 통용되는 집단에 소속되는 이들만을 위한 가치이며 정상석이 배제 및 제외의 역학이라고 꼬집는다. 일자로서의 유형의 해체는 개인주의의 역사와도 연관되었다. 1장에서 언급된 거대 조직들에 개인을 변화시키는 일을 맡겼던 1세대 개인주의에 이어 1960년대 이후 자기만의 길을 걷는, 자기 진실성이 중요시되는 소수자 운동 (여성운동, 동성애운동, 흑인인권운동 등)으로 자신이 변하지 않은 채로 차이를 인정받는 제2세대 개인주의에 이어 3세대 개인주의라고 하는 오늘날의 다원화가 나타났다. 다원화는 2세대 개인주의와 달리 정치운동이 아니라 목적 없는 변화가 낳은 효과이며 민족의 형상을 재규정하려 하지 않고 민족 형상의 침식을 촉진한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다원화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정체성이나 소속이 당연하지 않은 축소된 자아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정체성의 precariat가 되었고 이런 변화는 종교, 문화, 정치 등 사회의 모든 무대에서 진행 중이다. 종교에서는 이제 전통에 의해 전승되었고 자신의 자리를 지정받는 대신 신앙의 개인적 선택이라는 세속적 요소가 들어온다. 이것이 반드시 성숙한 결정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이슬람 근본주의 등이 보여주고 있다. 문화의 무대에서는 단지 하이퍼 문화와 본질주의적 문화와의 대립이 아닌 완전한 상징과 불완전한 상징의 대립관계가 나타난다. 원주민의 문화와 이민자의 문화 사이에 정치전선이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포괄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과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즉 Who are you?(너는 누구냐?)가 아니라 Who do you think you are?(너는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를 물어봐야할 때다. 우리는 나와 타자, 아군과 적군의 허구를 만들어 내서 구별지을 뿐.. 실제로는 그 구별짓기의 실체는 우리의 상상일 뿐인 것을 알아낸 지금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대한 메타 인지가 필요하다. 즉 스스로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정치적 무대에서도 1세대 개인주의가 정당, 2세대 개인주의가 NGO 등 보다 부분적인 소수를 대표하는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었다면 오늘날의 정치무대는 탈정치화라고 오인될 수도 있는 정치운동의 외주화가 진행되고 있다. 5장에서 팬으로서의 참여가 말해주듯이 마크롱같은 스타 정치인, 전문가에게 정치 운동은 위임되고 대중은 경청받고 인정받는 무대를 제공받고 정치활동의 성공을 배당받는 일종의 팬으로 변했다고 지적한다. 이어서 포퓰리즘이 다원화 세계에서 축소된 정체성에 의해 촉진된 부정적 감정(분노, 불안 등)을 이용하여 이를 표현할 분출구가 되어주면서 세계 정치 무대에 자리잡은 것에 대한 분석과 이에 반응하는 좌파의 비판에 대한 비판으로 배울 교훈을 가리킨다.
바보 멍청이들아! 문제는 측정할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것들이라고!하며 이성에 대한 호소와 계몽 및 경제적 분배만 강조하는 좌파들의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느낌이다.

모두가 공유하는 일자의 세계관이 없고 사회는 이에 대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중립성 뿐이다. 하지만 그 중립성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할 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날카롭게 의문을 던진다. 당연함에서 벗어난 다원화 사회에서는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는 집요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래서요? 다원화 시대의 우리는 대체 뭘 어쩌란 말입니까?하고 질문을 묻고 싶어지는 충동이 들 무렵 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질문으로 갈무리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떤 답변, 즉 단순한 해결책을 누군가가 제시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내포하며 이런 질문을 또다시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들에게 맡겨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현 시대의 징후라고 날카롭게 꼬집는다.

저자로서 뭔가 구체적 결론을 피해가는 것 같아 의심쩍기도 하지만
저자는 이런 질문을 쳇바퀴 돌리는 정치적 전문가의 사이클에 맡기지 말고 스스로 찾아가기 위해
자신들이 당연시한 허상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분석하는 메타 인지적 상황의 규정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외부적 규정보다는 자발적인 주의와 침착해짐을 통해
모든 다양함이 동등하게 만나 서로 교류하고 경험할 수 있는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표현하고자 ‘만남 지역(Encounter zone)‘이라는 metaphor를 사용하는데
한국에는 이런 개념이 아직 없어서 메시지가 잘 전달되지 않은 점이 좀 아쉬웠다.
Shared space나 encounter zone, traffic calming zone, living street라는 호칭들이 보여주듯이 교통의 약자들(보행자)가 강자들(자동차)과 만나고 함께 공유하는 삶의 터전으로서 좀더 침착한 정신과 늦춰진 속도로 약자를 배려하고 스스로 조절하는 장소. 전문적 외부적 규제에서 벗어나 자발적 통제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위키피디아의 자가 교정 기능처럼 갈수록 미래는 이런 자기 인지 및 자기 고찰이 필요해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별 성지향성 정신과 신체의 장애 외국인 및 종교적 차이 지역 차이에 대한 혐오 발언과 우파 좌파의 양극적 분열 등은 지금 지나치게 과열되어있다. 게다가 이런 부정적 감정을 대중에게 위임받아 대신 분출시키고 대중을 대신하여 거의 막말을 남발하며 발언하는 ‘전문가’들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나는 솔직히 요즘 너무나도 잡다한 것까지 청와대에 청원으로 올라오는 것도 걱정되지만 단지 이런 일시적인 감정 발산과 단순 지지/반대로 인해 실제 토론과 교류에 대한 욕망/필요를 대리만족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그것이 우파이든지 좌파이든지 포퓰리즘의 다수결에 편승해서 개인의 생각과 다양성이 묻혀버리는 건 아닌가
단순한 해결책에 대한 우리의 헛된 희망사항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은건 아닌가
상상 속의 타자에게 우리의 불만을 돌리려고 하며 실제 대면해야 할 것을 피하는 게 아닌가


https://en.wikipedia.org/wiki/Living_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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