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을유사상고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달 내내 읽었지만 관련된 칸트 입문서 쇼펜하우어 입문서 등을 읽고 찾아보며 번역이 좀 갸우뚱할 때Payne 및 Janaway등 영문판 3개와 비교해보며 읽어서 정말 숨가쁘게 읽었다. 쇼펜하우어 말대로 플라톤의 작품들처럼 미로를 통과한 후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고 깨뜨린 이후 다시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가 나의 무지를 혹은 나와 세상의 무를 담담히 받아들인 기분이고 워낙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이 아니하 각 장마다 서로 긴밀하고 유기적인 연결을 통해 소통하기에 두번에 그치지 않고 서너번은 읽어야겠다.

알라딘 인덱스로 부족해서 여기저기 다 끌어모은 이 난잡함;;; 책 속은 더 지저분하다;; 부끄;;

1,2권이 각자 표상과 의지의 총론이라면 3,4권은 각론으로 그 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즉 예술과 성스러움 속에서의 의욕의 부정에 대해 각각 다룬다.

 

1,2권에서 어려움을 느낀 사람은 부록인 칸트철학비판을 읽고나면 1,2권이, 즉 쇼펜하우어의 글이 칸트에 비해 훨씬 더 글솜씨도 좋고 사상도 더 명료하고 덜 혼란스럽다는 걸 절감하고 상대적으로(?) 더 쉽게 읽을 수 있다. 플라톤의 글을 읽을 때처럼 쇼펜하우어의 글은 통상적인 철학자들에 비해 훨씬 시적이고 문학적인 느낌의 적절한 비유와 적절한 예시를 통해 꽤 명쾌하고 예술적 영감을 주는 글이다. 그래서 을유문화사의 개정판이 철학을 전공한 다른 역자들에 비해 독문학을 전공한 홍성광의 번역이 어쩌면 더 적절했을지도 모른다.

 

홍성광의 가독성 높은 번역 외에도 을유문화사의 개정판의 장점은 바로 풍부한 삽화! 각 권마다 epitaph와 그 권에 적절한 삽화도 좋지만 특히 예술작품에 대한 제3권에선 정말 이 삽화들이 소장가치를 뿜어낸다. 라오콘의 표정을 아무리 말로 잘 표현한다해도 백문이불여일견. 이렇게 한눈에 감이 뙇! 와닿는다.

 

 

 

1권이 수학 과학 논리학 등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다루고 (이과생인 나로서는 쇼펜하우어의 이 책이나 심지어 고대 그리스철학에서도 다윈의 진화론이나 현대 물리학과 인지과학에 관한 통찰이 담겨있다는게 놀랍다) 2권은 표상과 함께 마치 메타인지를 논할 때의 에셔의 그림 “서로 그리는 두 개의 손”인 듯한 의지와 표상 간의 관계를 다룬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버트란트 러셀 등 생전에 무시받았던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안 닿은 현대 거장들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1,2권과 칸트 철학 비판을 함께 보면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3권이 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두 방법 중 하나인 예술과 문학에 대한 고찰로 공감하게 하고 고독한 천재성과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저속한 취향의 범인들에 대한 비아냥으로 (실로 쇼펜하우어는 문학 음악 등 많은 예술에 대한 감각과 재능이 훌륭하고 칸트처럼 예술을 무슨 이론이나 평가 공식으로 판단하려는 걸 비판했다.) 쇼펜하우어 자신의 이야기를 보는 듯해 재미있었다. 반면 4권은 윤리, 종교, 삶과 죽음 등에 대한 고찰로 엄숙한 숭고함을 안겨준다.

나는 한번은 자의적으로 그리고 한번은 비자의적으로 죽음과 마주봐야한 경험이 있다. 죽음을 거부하고 삶에 대해 집착하고 후회하는 동안의 나는 너무나도 괴롭고 좌절했지만 오히려 더이상 어찌 할 방법이, 달리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오히려 그전에 비해 평안이 찾아왔다. 아 내 아이들은 어쩌지 지금까지 난 왜 이렇게 살아온거지 하고 “고뇌를 단순히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제 이렇게 무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라는 걸 “스스로 감각”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의지의 부정이 가능한 것을 종교인이나 성인이 아니어도 고뇌나 죽음을 맞닥뜨렸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공감이 갈 것이다.

 

.그리고 자의적으로 죽음과 마주한 아주 경솔하고 이기적인 나를 돌아보고 질책하둣 69장은 자살이 삶에의 의지의 부정이 아닌 긍정이라고 한다. 진정한 의지의 부정은 삶의 고뇌가 아니라 삶의 향유를 혐오하는 것이고 자살자는 이런 삶을 의욕하지만 삶의 여러 조건에 만족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을 읽고 한없이 부끄럽고 후회가 되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며 무로의 회귀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정한 의지의 부정, 열반을 느낀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고뇌와 고독 속에 지쳐서 위안이 필요해질 때 쇼펜하우어의 글을 되찾아올 것 같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우리가 한편으로 치유할 수없는 고통과 끝없는 비참을 의지의 현상인 세계에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다른 한편으로 의지가 없어지는 것에서 세계가 녹아 없어지는 것을 보고 눈앞에 단지 공허한 무만을 간직한다면, 이 고찰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p. 544

칼 세이건의 책에 나온 세르비아 속담대로 “Be humble for you are made of earth, be noble for you are made of stars”처럼 우리 모두가 별들의 먼지로 이루어진 것을 깨닫고 스스로와 대우주를 하나의 무로 받아들이면 숭고함과 겸허함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데 쇼펜하우어의 양면적 세계에 대한 책에서 발견한 마지막 문장도 그런 양가적 감동을 준다.

... 우리는 모든 덕과 성스러움의 배후에서 궁극적인 목표로 떠도는 어두운 인상, 아이들이 어두움을 무서워하듯 우리도 무서워하는 무의 어두운 인상을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의지가 완전히 없어진 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직 의지로 충만한 모든 사람에게는 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고백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의지가 방향을 돌려 스스로를 부정한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그토록 실재적인 이 세계는 모든 태양이나 은하수와 더불어 무無인 것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p. 5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