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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과 저항 - 일제말 사회와 문학
김재용 지음 / 소명출판 / 2004년 7월
평점 :
일제말에는 친일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흔히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하게 되었다고 친일 문인들이 말한 바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하게 자발적으로 친일을 했다. 게다가 징병제도가 선포되었을 당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과거 일제하 친일 문학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 아연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징병제도가 선포되었을 당시 그 많은 친일문학가들이 감격과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다. 자기 동적을 전쟁터로 몰아넣는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흥분된 어조로 글을 쓰고 있는 이들 작가들의 행동이 믿기지 않아 자발적이기보다는 외부로부터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든가 혹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러한 짓을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118P中-
김재용 교수의 협력과 저항은 그런 사실들을 그때의 시대상황과 증언, 정확한 자료등을 토대로 분석한다. 실제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친일을 한 사람들은 친일파라고 할 수 없다는게 작가의 생각이다. 정지용이 쓴 「이토」나 이태준의 「제1호 선박의 삽화」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논리와 근거 없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지식인 들이라면 더 그렇다.
문인들이 일제에 협력하게된 계기는 첫째, 1938년 10월 동방의 마드리드라고 불리던 무한 삼진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이후 이다. 중일전쟁이기 때문에 우리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중국이 전쟁에 승리하여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길 바라고 있던 지식인들은 이제 독립은 불가능 할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일본이 대세라고 생각하고 그에 협력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스스로 친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의 문인들의 심정은 그들이 발표한 글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당시는 일제가 문화정책을 쓰고 있던 때라, 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할 수 있었던 시기이므로 그들의 자발성은 명백하다.
대표적인 친일 문인 이광수는 한때 독립을 바라기도 했으나, 독립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하고, 피와 살이 일본인 처럼 되어 조선인들이 받았던 차별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일본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자신이 책무이며 이렇게 하지않으면 민중에 대한 지식인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뜻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일본군에 종군하여 일본군의 전쟁에서 죽어가는 것이야 말로 조선인이 일본인과 차별을 받지 않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징병제도가 선포되자 진심으로 기뻐하며 눈물까지 흘렸던 것이다. 해방후 자신이야 말로 애국자라는 어이없는 발언은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였다.
친일 문인들이 일제에 협력하게 된 두번째 계기는 1940년 파리 함락이 준 충격이다.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자 근대 서구문화의 상징이기도한 파리가 나치즘의 독일에게 함락되자 신체제론이 급부상 하게 된다. 유럽이 중심이 된 서양의 '구체제'에서 벗어나 일본이 내세우고 있는 대동아공영권을 중심으로 한 '신체제'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책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일제에 누구나 친일을 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친일을 한사람보다 저항을 한 문인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탄압이 강화 되었던 일제말이기에 어떤 글을 쓰지 말라고 권유받은 것이 아니라, 친일적 성향이 담긴 글을 쓰라고 강요 받았던 시기이다. 그 시절에도 저항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저항방법은 침묵, 우회적인 글쓰기, 망명등이 있다. 이태준이나 정지용처럼 절필을 하고 외지로 떠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이육사, 김기림, 김사량같이 우회적인 글쓰기로 검렬을 피하며 일제를 비판하는 글을 계속 쓰며 저항한 문인들도 있다. 김사량 같은 경우에는 우회적으로 글을 쓰다 그마저 여의치 않자 망명을 택했고, 이육사는 망명을 시도하다 잡혀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
작가는 왜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새삼스럽게 친일문제를 거론하는 것일까?
지금도 미당문학상이나 동인문학상, 팔봉문학상등 친일 문인들의 이름을 건 문학상이 수상되고 있다. 그것은 친일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프랑스는 1940년에 독일군에게 점령 당했다. 5년동안의 강점기간 동안 독일에 협력하는 친독파들이 나타났다. 45년 독일이 항복하자 친독파들의 숙청에 나섰는데 8000~10000여명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또 그기간 동안 친독을 해 많은 재산을 얻은 자산가는 가벼운 형에 처한반면 몇줄의 글을 쓴 작가는 중죄를 선고 했다고 하는데, 총보다 칼이 강하다는 말처럼 글로 인한 파장이 크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조치한 것이다.
냄비근성이란 말이 스스로 나올 정도로 우리는 망각을 잘한다. 친일이 우리에게 끼친 해악을 제대로 규명할때, 우리는 미래에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친일파의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데, 독립운동가의 자손은 해방후에도 군사정권에 핍박을 당하며 아직까지 어렵게 살고 있는 것이 우리네 X같은 현실인 것이다. 왜 이런일이 생길까? 아직도 정치권에는 그런 쓰레기들의 잔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이라는 인간들이 자위대 기념식에나 참석하고 그걸 축하하는 것이 우리 정치 현실이다.
나경원 의원은 그런 비판이 거세지자 자위대 기념식인줄 모르고 참석했다고 변명을 늘어 놓는데, 공개된 자위대 기념식장 앞 인터뷰 동영상에서는 무슨 행사인지 알고 왔냐는 기자의 물음에 분명히 자기 입으로 말한다 '자.위.대'라고. 궁금한 사람은 검색을 통해 확인해 볼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서울시장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우리 정치다. 츠기야마 아키히로라는 일본출생의 MB라 불리우는 사람은 또 어떤가?
책을 읽는 내내 답답했다.
이런 명백한 사실들을 왜 난 모르고 지낸 것일까?
왜 난 우리의 역사에 이다지도 관심이 없던 것일까?
몇년전 유행했던 친일싸이트에 가서 어떤 친일파와 육두문자로 대화를 나눈적이 있다. 그때의 난 그냥 분노했을뿐 아무것도 몰랐다. 이런 인간들이 왜 아직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의문만 가졌을 뿐이다.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을때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것들은 일본만화가 재밌다는 단순한 이유로 친일파가 될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역사를 교육하면 무슨 소용인가? 어른들 조차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것을. 김재용교수와 같은 사람이 오랜 연구끝에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책을 출간해도 인정도 못받으며 일본 삼류소설만큼도 팔리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돈도 되지 않는 친일 인명 사전을 비싸다고 비난하는 행위나, 그 출간 자체를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우리의 현실이다. 과거와 지금의 우리는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진실 규명을 위해 많은 혼신의 노력의 결과물인 친일인명사전을 책팔려고 만들었다고 비방하는 작태도 많이 보았다. 얼마나 벌것 같은가? 무슨 베스트 셀러라도 등극해 인세라도 벌겠는가? 또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친일파로 규정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자신의 이득이 되었다고 합리화 해서는 안된다. 누구에게는 이득이었겠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죽음과 고통이 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만, 우리면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다가 그 대상에서 벗어나면 그땐 뭐라고 말할 것인가?
일본문화를 무조껀 배척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도 일본소설을 읽고 일본만화를 보며 일본제품을 쓰는 사람이다. 일본과 지금 우리네 관계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또한 물론 아니다.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규명할때 우리는 같은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것들을 알아야 우리 새끼들 한테 지금의 분단상황이나 연평도, 천안함 같은 불안한 상황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자비를 털어 읽어보라고 보내주고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꼭 이책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