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기억력의 비밀 - 기네스북에 오른 기억력 천재 에란 카츠
에란 카츠 지음, 박미영 옮김 / 민음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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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상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중의 23%가 유대인이라고 한다. 전 세계 65억 인구중에 1천 5백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유대인인구에도 불구하고 1901년에서 2009년까지 804명의 유대인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유대인은 이토록 원래 우수한 것일까? 노벨상 수상자가 평화상 1명밖에 없는 우리로선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제일의 인구를 가진 중국도 6명정도여서 위안이 되지만.

  물론 노벨상의 유무로 우수함을 전적으로 판가름 한다는 기준에는 동의할 수 없다. 서구 중심으로 수여되는 상이 아니던가. 샤르트르가 노벨상을 거절한 이유도 이것이고. 노벨문학상도 일본은 두명이 탔지만 일본문학이 우리문학보다 결코 낫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쨌건 유대인이 유독 노벨상을 많이 탄것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 에란카츠도 유대인이며 기네스북에 오른 기억력의 천재이기도 하다. 무려 500자리의 숫자를 한번 듣고 외웠단다. 전화번호 몇자리도 잘 외워지지 않을때가 있는데.

 

 

 

  저자는 나쁜 기억력이란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개발한 기억력의 기술을 소개한다.

 그 첫째 조건으로 자신감을 꼽는다. 자신감은 기억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키고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온단다. 머리가 좋다는 사람을 만나보면 항상 기억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기억을 잘하기 때문에 자신이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기억을 잘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자신감. 그러나 쉽게 생기진 않는.

 

  숫자 외우기를 어려워 하는 사람이 많다. 심한경우 자기 주민번호도 못외우는 사람도 봤는데, 숫자자체에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의미가 없는 것은 잘 외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도, 자신의 관심사와 관계된 것은 잘 기억한다. 약속해놓고 그 자체를 잊어버리거나 물건을 놓고 다녀서 머리를 아프게 하는 김모양이 연예인 이름은 기가막히게 잘 기억하듯이.

저자는 숫자를 문자로 바꿔서 외우는 기술을 제안한다. 숫자를 알파벳으로 바꿔 단어로 만든다던가, 숫자 자체를 1은 막대기 2는 오리 같은 식으로 외운 뒤, 오리가 막대기를 입에물고... 하는 식으로 연상하고 스토리를 만들어 기억하는 방법이다.

다만 알파벳으로 단어를 만드는 것은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숫자를 기억하는 것보다 더 골치아플거 같으니 한글로 직접 만들어서 기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것이다.

 

  실제로 연상 기억법을 통해 단어를 외웠더니 기억이 잘 되는것 같다. 에란카츠는 연상기억법으로 한번에 기억한 다음에,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대로 기억해낼 수 있다고 한다. 그정도는 하지 못하겠지만 어느정도 도움이 될것 같다. 의미가 없는 것들이 얼마나 기억하기 힘든지는 유명한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이 잘 증명해 주지 않는가.

 

 

  이 책을 읽기만 한다면 나도 기억력이 좋아진단 말이지?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이 책을 접한다면 실패다. 그 기억술을 실생활에서 꾸준하게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막상 좋은 방법이 있어도 그 방법을 바로 실행하자니 어색해서 곧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표지엔 책을 읽기만 하면금방 될것처럼 홍보를 하지만 정말 그런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딜가나 빼놓을 수 없는 성가신 녀석 '노력'. 이 책에도 예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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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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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제임스의 데이지 밀러를 읽으며, 그가 유명한 작가일뿐만 아니라 더 유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동생이라는 사실에 더 놀랐다.

심리학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관련 서적을 읽을때 자주 언급되어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의 동생답게 탁월한 심리묘사를 보여준다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읽게된 나사의 회전.

무시무시한?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천재적인 서술기법이라고 뒷표지에 극찬을 하고 있지만, 그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나사를 조이는 것처럼 서서히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기법은 지금의 눈으로 봐도 탁월하다. 유령이 극강의 포스를 뿜으며 등장하여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화자인 주인공 가정교사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묘사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유령은 시시할 정도로 그냥 스윽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할 뿐이다.

 

 

 

 

 

  이야기는 자그마치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 남자가 유령이야기를 해주겠다며 사람들을 잔뜩 기대하게 만드는 걸로 시작한다. 얄밉게도 이양반은 뜸을 들여서 사람들을 애태운다. 그러다 사람들이 재미없어 하면 어떡할건지 걱정이 될 정도로 두시간이나 시간을 질질 끈 이유는 원고를 가지고 와야 한다는 거였다.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가 먼저 할것 같으면 원고를 가져올것이지….

이야기의 주인공이 동생의 가정교사였다며 그녀가 쓴 글을 드디어 읽기 시작하는 남자.

 

  시골의 한 저택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 그녀는 유령을 보게 된다. 자신의 눈에만 나타나는 유령은 알고보니 죽었다던 전 가정교사 제셀과 하인인 퀸트였다. 저택의 그로스 아주머니가 유령의 정체를 이야기 해준 것이다.유령이 아이들을 노리는 것으로 판단한 그녀는 겁이나지만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용기를 낸다.

의뢰인은 두아이 마일즈와 플로라의 삼촌인데, 무슨일이 있어도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라는 조건을 남긴다. 보수도 괜찮고 아이들도 사랑스러워서 일을 맡게된 그녀지만 유령의 존재 때문에 불안에 떨게 된다.

순진하고 착한줄로만 알았던 아이들이 유령과 교류하며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믿게된 그녀는 아이들의 이상한 행동을 목격하고, 의심은 더 깊어져만 간다.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애정으로 유령과 맞서 싸우려는 그녀.

오빠인 마일즈는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난 상태이다. 구체적인 이유는 쓰여있진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거라고 씌인 편지. 하지만 마일즈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런 의심이 사라졌던 그녀다. 하지만 마일즈의 이상한 행동들은 그녀를 의심하게 만드는데. 무척 똑똑한 마일즈와 플로라는 속이고 있는것 같다. 아이들과 유령, 가정교사는 점점 갈등하게 된다.

 

 

  가정교사가 받는 압박감과 초조한 심리를 잘 표현해냈다. 원서로 읽으면 그 긴장감이 더할듯 하다. 역시 명성높은 심리학자의 동생답다. 자칫 잘못하면 싱겁게 진행되고단순한 이야기를 긴장감있게 끌고 나간다.

 

  이 이야기의 백미는 결말이다. 결말은 반전이면서도 반전이 아닌, 명확하게 결론을 짓지 않는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모든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 이야기이므로 독자는 당연히 가정교사의 입장에서 결말까지 그녀의 말만 듣게 되니 당연하게 그녀의 진술을 모두 믿기 마련이다. 하지만 애매한 결말과 갑작스러운 사고는 독자로 하여금 지금까지 들었던 그녀의 일방적인 진술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도대체 이거 답이 뭐야? 어떻게된 일이냐?" 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답답할지도 모른다. 나도 약간의 답답함을 느꼈다. 결말이 확 드러나고 얘가 범인이다~ 하는 식의 소설에 익숙해진 덕택일지 모른다.

김용의 소설에도 이런 기법이 자주 등장하는데, 의천도룡기의 마지막 장면이나, 설산비호의 마지막 장면은 결말을 내지 않고 끝내 버린다.

답답하게 하고 생각하게 해서 작품에 대해 여운이 남게 만들자는 속셈인것 같기도 하다. 다음에 읽을 소설을 후련한 결말이 나는 추리소설쯤으로 선택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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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좁은문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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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로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4

 

  명성이 드높은 대가의 작품을 읽는 다는 것은 기대면서도 부담이다.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문학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들려올 정도의 명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의 작품을 읽을때 살짝 망설여 지는 느낌. 앙드레지드가 내겐 그랬다. 프랑스의 대 문호라 일컫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소년판 '장발장'으로 읽어보았으면서도, 좁은문은 읽지 않았던 것은 제목과 위 성경구절이 주는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왠지 팍팍할것 같았거나 난 좁은문으론 가지 않을거야 같은 안일한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르지.

 

  노벨상을 수상했고, 아프리카 여행에서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알게 됐고(그로 인해 괴로워하기도 했다는 풍문이 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작품을 써서 욕을 많이 먹었고,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썼으며,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한 호감을 갖고 방문했다가 크게 실망한 뒤에 쓴 소련에서의 귀한 등을 쓰기도 한 작가. 새로운 작풍으로 20세기 문학에 기여를 했으며 단순히 작품을 잘 쓰는 것에서 벗어나 평론가로서의 활동과 자국의 식민지에 대한 비판등의 사회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양심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대 문호들의 공통점은 작품도 뛰어나지만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에 있다.

 

 

 

  

   줄거리

 

  이 작품은 간단하게 말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는데 그것은 여 주인공 알리사의 종교적 신념때문이었다. 연인이자 사촌인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위 구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택한다. 

알리사의 동생 줄리에트도 제롬을 사랑하였지만, 언니를 위해 제롬을 포기하는데도 알리사는 그런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동생의 그런 결정때문에 더욱 좁은문으로 들어가게 된것이다. 그리고 제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는 알리사.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제롬을 통해서가 아니면 정열을 더하지 못한다. 제롬에 대한 사랑은 그러나 온갖 노력을 해도 없어지질 않는다.

결국 알리사가 선택한 것은 수도원으로 도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도원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알리사. 제롬에 대한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일 것이다. 제롬은 알리사의 죽음을 알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채 평생을 독신으로 보내며 슬퍼한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종교적인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알리사의 모습이 종교적으로 순결한 모습의 반영이냐, 종교에 대한 비판이냐.

 앙드레 지드는 아무 답도 내질 않았다고 한다. 종교인들이 읽고 감동을 느끼기도 할것이고, 맹목적인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도 할것이다.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자가 많겠지만 나에게는 자연히 비판으로 읽힌다. 맹목적인 종교에 대한 믿음이 결국 두 남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알리사는 마음가는 대로 솔직하게 살지 못하고 끝내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되었으면서도 제롬에 대한 사랑도 버리지 못했다. 게다가 그런 신앙적인 길을 택한 계기도 동생과 제롬에 관한 갖가지 사건들 때문이었다. 줄리에트의 제롬에 대한 마음을 알리사가 알지못했더라면, 제롬이 처신을 제대로 했더라면 알리사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리사는 처음부터 신앙적인 삶을 선택하려 하지도 않았었으고 계기에 의한것이니 완전히 순수하지도 않은 것이다. 부러 작가가 그런 장면들을 곳곳에 삽입했다는 것도 소설적 재미보다는 이런 과정을 보여주면서 비판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 믿음과 사랑 둘다 실패한 것.

 

  알리사가 좁은문을 택해서 천국에 가길 바랬던 것인지 오기로 그랬던 것인지 순수한 믿음에서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인다. 위의 성경구절에서 이야기한 좁은문이 이런식의 자학은 아니지 않을까? 자기 안위만을 위한 탐욕, 물질적 탐욕을 버릴것을 뜻하는것 같은데 이런식의 자학이 진정한 신앙의 길이라면 벌써 갈사람은 다 가고 지상에서 종교자체가 사라졌어야 하는 것.

 

  종교는 시대 상황이나 국가의 풍습에 따라 변한다. 우리나라에서의 기독교는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이나 현시대의 패러다임과 적절하게 섞에서 지금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본래의 종교모습이 순수한 것이던 아니던, 어쨌건 지금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점철되어 있는 그것이다. 큰 교회 목사들은 대놓고 헌금을 더 많이 낼것을 종용하고 불신지옥으로 협박한다. 런 두려움이나 비슷한 것들에 의한 믿음은 개인의 안위를 위한 거래, 살아서도 잘살고 죽어도 잘살고자 하는 욕심에 불과할 뿐이다.

좁은문은 커녕 부자와 낙타에 대한 구절도 물질적 풍요를 뜻하지 않는, 정신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것이 지금의 종교인들이다. 뭐라고 길게 둘러대지만 결국 부자로 살고 싶은 욕심에 의한 합리화 아닌가. 욕심나는 것은 은유고, 지킬만한 것은 직유며 진리의 말씀인가? 이런 모순부터 버려야 참된 믿음일것이며 그런 참다운 모습을 종교인들이 보인다면 이렇게 비판적인 나도 당장 교회에 다닐거다. 하늘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시대에 우러러 보며 존재할것이라고 믿었던 믿음은 우주와 하늘의 존재가 밝혀진 후에도 끈질기게 지속되어 있다. 아마 전 우주 공간을 샅샅히 다 알게 되는 때에도 이 끈질긴 생명력은 살아남지 않을까. 시대에 따라 변모하고 합리화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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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지음, 지희정 옮김 / 더블유출판사(에이치엔비,도서출판 홍)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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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나니 도련님이 시골 학교의 교사가 되어 벌이는 소동을 그린 도련님은 유명한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이다. 일본의 작품은 그다지 접하지 못해 이름난 대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지이 오사무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도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이 번역본이 완역판인지는 모르나 많지 않은 분량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역시 대가의 작품이었다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약간의 스포가 있음]  부잣집 둘째 도련님인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말썽쟁이로 갖가지 소동을 일으키며 천덕꾸러기로 자란다.

어느날 그의 형과 장기를 두던 중 수세에 몰리자 놀려대던 형의 이마에 장기알을 던져버려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는 주인공. 집안에서 쫒아내 버리겠다는 아버지를 하인인 '기요'할머니가 울면서 말리는 바람에 모면한다.

  말썽만 부리는 그를 부모조차 달갑게 여기지 않지만, 어찌된 일인지 기요할멈만은 항상 그의 편에 서준다.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그를 시도때도 없이 칭찬해주며, 용돈을 쥐어주기도 한다. 친 손주를 대하듯이 애처롭고 애정어린 마음으로 그를 돌보는 기요할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년 후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형은 재산을 팔아치우고 많은 돈을 가져가고 그에게는 600엔만 쥐어준다. 재산에 별 관심이 없는 주인공이지만 기요할멈을 부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다. 기요할멈은 나중에 성공하면 자신을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조카의 집에 몸을 의탁한다.

별 생각 없이 입학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도련님은 도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섬마을의 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그 당시에는 고학력자가 부족한 나머지 고등학교만 나와도 교사를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우리나라 어떤 작가는 고등학교 중퇴라도 신문사나 교사로 취업하기도 했으니.

 

 

 

 

  학교에 부임한 그는 어색하기만 하다. 단순하며 고지식하고 어리숙한 성격때문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는데.

교장에게는 너구리, 교감에게는 빨간셔츠, 알랑거리며 교감에게 아무하는 선생에게는 알랑쇠, 같은 수학 선생이자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교사에게는 거센바람등의 별명으로 부르는 그. 책에 분명 그들 몇몇의 본명이 나오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별명만 떠오른다.

 

  얼굴빛이 파래 끝물에 나오는 음식만 먹은 낯빛을 하고 있다 하여 끝물선생이라고 부르는 교사는, 마을의 아름다운 아가씨 '마돈나'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착한 성품을 지니고 재산도 꽤 많았으나 가세가 기울었고, 그를 틈타 마돈나를 사모하던 교감은 마돈나에게 접근해 구애를 한다. 마돈나도 넉넉한 교감에게 마음이 가고, 끝물선생은 닭쫓던 개 신세가 되버린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러려니 할 행동이겠지만 그때는 그런 행동들이 매우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었는가 보다. 거센바람은 교감에게 그것을 따지러 가고, 교감은 둘이 파혼하지 않으면 자신은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사건을 계기로 교감은 거센바람에게 앙심을 품고, 교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끝물선생을 전근시켜 버린다.

 

  도련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교감의 수작에 놀아나다가 내막을 알게 되자 거센바람과 함께 의기투합하고 교감을 벼르게 된다. 교감은 갖가지 술책으로 둘을 궁지로 몰아넣고, 학교는 거센바람에게 사직을 권유하기에 이른다.

둘은 교감에게 한바탕 복수를 해주고, 도련님도 거센바람을 따라 학교를 퇴직하고 동경으로 돌아온다. 도련님은 동경으로 돌아와 다른 곳에 취직을 하고 작은집에서 기요할멈을 불러 함께 지낸다.

 

  주인공에겐 기요할멈의 존재는 말썽만 피우는 자신을 유일하게 알아주는 부모이상의 존재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때는 안타까워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교사로 부임해서도 기요할멈을 걱정하는 그. 말썽쟁이였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고, 단순하지만 의리가 있는 주인공이다.

소소한 재미가 있는 소설이었으나 큰 감동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역시 번역의 문제일까? 그리 까다로운 사상이나 메타포를 포함한 책이 아니기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예나 지금이나 부도덕한 교사들이 참 많다. 학생때에도 선생들의 부정을 많이 목격하곤 했다. 선생이라는 이름하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거나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교사들은 지금도 허다하다. 선생이란 말안듣는 아이들에게 매를 들기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할 정도로 교사의 폭력은 심했었다. 요즘은 그런 권위도 없고 교권이 무시되는 상황이라고 하니 그것 또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가 서로 존중을 할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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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 - 한 남자의 인생을 바꾼 7가지 선물 이야기 폰더씨 시리즈 1
앤디 앤드루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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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가 매각 당하고 졸지에 실직하게 된 데이비드 폰더. 마흔이 넘은 그의 나이엔 새로 취업을 하기도 만만치 않다. 7개월이나 일자리를 구하려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그의 아내가 가계를 책임지게 되고, 그의 좌절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그 와중에 딸까지 아프게 되고, 임시직장마저 짤리게 된 그는 교통사고로 정신을 잃게 된다.

 

  깨어난 그는 역사속의 인물 7인을 만나게 된다. 링컨, 트루먼, 제임벌린, 솔로먼, 안네 프랑크, 가브리엘, 그리고 콜럼버스.

다분히 미국적인 인물들을 만나 하루를 보내고 교훈을 얻은 폰더씨는 7인의 인물들에게 7가지 원칙들을 배우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가 배운 7가지 삶의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1. 공은 여기서 멈춘다. 나는 나의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총체적인 책임을 진다.

2. 나는 지혜를 찾아나서겠다. 나는 남들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다.

3. 나는 행동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순간을 잡는다. 지금을 선택한다.

4.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 나에게는 단호한 의지가 있다.

5. 오늘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을 선택하겠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6. 나는 매일 용서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맞이하겠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겠다

7.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물러서지 않겠다. 나에겐 믿음이 있다.

 

 

 

 

  책을 읽어으며 와닿는 부분도 많았고, 배워야할 교훈도 많았지만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구성이 좀 유치하다. 

이책을 말하자면 우화로 표현한 자기계발서인데 황당한것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나고 그것은 소설이나 우화에서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지만, 구성이 뻔한것이 거슬리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유명인들은 인정할 만한 위인이기도 하지만, 몇몇 인물은 사실 훌륭하다고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는게 사실이다.

특히 콜럼버스는 인도를 찾아가다가 어리바리하게 길을 잘못든 대단찮은 항해사일 뿐인데, 미국의 건국 명분을 위해 영웅으로 이용된? 인물이기도 하다.

 

  아직도 '발견'이라고 주장하며 뻔히 보이는 사실을 미화하고 그것을 당연한것처럼 인식하는 폭력적인 시선은 그 이후의 인디언 학살은 추호도 언급을 안하고 있다. 

사람이 버젓하게 살고 있던 곳을 '신대룩발견'이라고 말하는, 다른 인종의 인간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던 서양인들의 흉폭성과 오만함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를 영웅시 한다는 것은 조상들의 죄를 죄가아닌 승리로 미화하려는 속셈일 뿐이다. 그냥 그런 역사를 그대로 인정한다 해도 지금에 와서 누가 뭐라고 할 이유가 없을텐데 도둑이 제발에 저리듯 우상화를 하는 꼴이 아닌가.

콜럼버스만한 탐험정신을 가진 탐험가들은 대항해시대에 널리고 널렸다. 인도를 찾아가다가 불시착으로 인해 아메리카대륙에 착륙하고, 죽을때까지 그곳이 인도인줄 알았던 무지한 항해사에게 개척정신의 선구자인양 감투를 씌워주지 않는대도.

 

  백번 양보해서 그것이 미국이나 유럽인의 입장에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 마저 콜럼버스를 영웅취급하고 위인전에까지 수록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국의 입장이 아닌 미국과 자신 개인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이야기도 많고 배울만한 인물들의 지혜도 많이 담겨있지만, 명성만큼 대단한 책은 아닌것 같다.

이런 식의 주장은 널리고 널린 자기계발서의 그것에 비해 특별히 다를것이 없다. 우화로 변화시키고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인물을 삽입시켰다.

우화로 된 형식 자체는 비판할 생각이 없다. 쉽고 재미있게 좋은 교훈들을 읽을 수 있는 훌륭한 방법들이니까. 다만 그 형식속에 보이는, 그릇된 진실을 추호의 문제제기 없이 당연한것처럼 인식하는 미국인들의 시각이 읽히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거슬렸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책이 전달하자고자 하는 메세지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메세지는 다른 자기계발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으며 거슬리는 부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각에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컷다.

그런게 거슬리지 않는 사람이 본다면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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