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좁은문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평점 :
판매중지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로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4

 

  명성이 드높은 대가의 작품을 읽는 다는 것은 기대면서도 부담이다.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문학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들려올 정도의 명성을 가지고 있는 작가의 작품을 읽을때 살짝 망설여 지는 느낌. 앙드레지드가 내겐 그랬다. 프랑스의 대 문호라 일컫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소년판 '장발장'으로 읽어보았으면서도, 좁은문은 읽지 않았던 것은 제목과 위 성경구절이 주는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왠지 팍팍할것 같았거나 난 좁은문으론 가지 않을거야 같은 안일한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르지.

 

  노벨상을 수상했고, 아프리카 여행에서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알게 됐고(그로 인해 괴로워하기도 했다는 풍문이 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작품을 써서 욕을 많이 먹었고,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썼으며,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한 호감을 갖고 방문했다가 크게 실망한 뒤에 쓴 소련에서의 귀한 등을 쓰기도 한 작가. 새로운 작풍으로 20세기 문학에 기여를 했으며 단순히 작품을 잘 쓰는 것에서 벗어나 평론가로서의 활동과 자국의 식민지에 대한 비판등의 사회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양심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대 문호들의 공통점은 작품도 뛰어나지만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에 있다.

 

 

 

  

   줄거리

 

  이 작품은 간단하게 말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담고 있다. 그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는데 그것은 여 주인공 알리사의 종교적 신념때문이었다. 연인이자 사촌인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위 구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택한다. 

알리사의 동생 줄리에트도 제롬을 사랑하였지만, 언니를 위해 제롬을 포기하는데도 알리사는 그런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동생의 그런 결정때문에 더욱 좁은문으로 들어가게 된것이다. 그리고 제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는 알리사.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제롬을 통해서가 아니면 정열을 더하지 못한다. 제롬에 대한 사랑은 그러나 온갖 노력을 해도 없어지질 않는다.

결국 알리사가 선택한 것은 수도원으로 도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도원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알리사. 제롬에 대한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일 것이다. 제롬은 알리사의 죽음을 알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채 평생을 독신으로 보내며 슬퍼한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종교적인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알리사의 모습이 종교적으로 순결한 모습의 반영이냐, 종교에 대한 비판이냐.

 앙드레 지드는 아무 답도 내질 않았다고 한다. 종교인들이 읽고 감동을 느끼기도 할것이고, 맹목적인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도 할것이다.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자가 많겠지만 나에게는 자연히 비판으로 읽힌다. 맹목적인 종교에 대한 믿음이 결국 두 남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알리사는 마음가는 대로 솔직하게 살지 못하고 끝내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되었으면서도 제롬에 대한 사랑도 버리지 못했다. 게다가 그런 신앙적인 길을 택한 계기도 동생과 제롬에 관한 갖가지 사건들 때문이었다. 줄리에트의 제롬에 대한 마음을 알리사가 알지못했더라면, 제롬이 처신을 제대로 했더라면 알리사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리사는 처음부터 신앙적인 삶을 선택하려 하지도 않았었으고 계기에 의한것이니 완전히 순수하지도 않은 것이다. 부러 작가가 그런 장면들을 곳곳에 삽입했다는 것도 소설적 재미보다는 이런 과정을 보여주면서 비판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 믿음과 사랑 둘다 실패한 것.

 

  알리사가 좁은문을 택해서 천국에 가길 바랬던 것인지 오기로 그랬던 것인지 순수한 믿음에서 그랬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인다. 위의 성경구절에서 이야기한 좁은문이 이런식의 자학은 아니지 않을까? 자기 안위만을 위한 탐욕, 물질적 탐욕을 버릴것을 뜻하는것 같은데 이런식의 자학이 진정한 신앙의 길이라면 벌써 갈사람은 다 가고 지상에서 종교자체가 사라졌어야 하는 것.

 

  종교는 시대 상황이나 국가의 풍습에 따라 변한다. 우리나라에서의 기독교는 우리나라 고유의 풍습이나 현시대의 패러다임과 적절하게 섞에서 지금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본래의 종교모습이 순수한 것이던 아니던, 어쨌건 지금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점철되어 있는 그것이다. 큰 교회 목사들은 대놓고 헌금을 더 많이 낼것을 종용하고 불신지옥으로 협박한다. 런 두려움이나 비슷한 것들에 의한 믿음은 개인의 안위를 위한 거래, 살아서도 잘살고 죽어도 잘살고자 하는 욕심에 불과할 뿐이다.

좁은문은 커녕 부자와 낙타에 대한 구절도 물질적 풍요를 뜻하지 않는, 정신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것이 지금의 종교인들이다. 뭐라고 길게 둘러대지만 결국 부자로 살고 싶은 욕심에 의한 합리화 아닌가. 욕심나는 것은 은유고, 지킬만한 것은 직유며 진리의 말씀인가? 이런 모순부터 버려야 참된 믿음일것이며 그런 참다운 모습을 종교인들이 보인다면 이렇게 비판적인 나도 당장 교회에 다닐거다. 하늘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시대에 우러러 보며 존재할것이라고 믿었던 믿음은 우주와 하늘의 존재가 밝혀진 후에도 끈질기게 지속되어 있다. 아마 전 우주 공간을 샅샅히 다 알게 되는 때에도 이 끈질긴 생명력은 살아남지 않을까. 시대에 따라 변모하고 합리화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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