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열광 -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도쿄 일기 & 읽기
김정운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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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소위 일본론을 꽤 많이 읽어 왔지만, 김정운의 <일본열광>은 단순한 일본 인상기가 아니라 일본 사회와 일본인들의 심층심리를 파고들어 분석해 낸 일종의 문화 심리학서다. 따라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칼 구스타프 융, 빌헬름 라이히 등의 이론을 빌어 일본의 생활문화 속 조화와 불일치의 원인을, 저자의 말을 빌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도 안 받아들이는" 일본이라 정의 내리며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 나간다. 이 책을 읽으면 저자가 일본에서 9개월간 살면서 가졌던 의문들, 그러니까 왜 일본 남자들은 가슴 큰 여자에게 집착하는지, 왜 일본의 책은 여전히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도록 되어 있는지, 왜 할머니가 넘어져도 달려가서 "다이조부 데스카(대장부입니까)?"라고 물어보는지 등의, 어쩌면 사소한 의문일 수도 있지만 거대담론으로는 설명하기가 모호한 일본사회와 일본인들의 행태에 대해 알 수 있다. 나는 특히 5장에서 분석한 일본의 중년남성에 대한 저자의 시각에 공감한다. 이미 40대 중반을 넘어선 내 나이 또래 남성들의 고독과 슬픔에 대해 역시 저자도 같은 경험을 했다는 동질감 이상으로, 일본이나 한국의 중년 남성들은 심리적으로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밀려나고 가정에서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중년 남성에게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이점에서 특히 일본에 불륜을 다룬 소설과 영화가 많고 대부분의 주인공이 중년 남성이라는 것이 현대 일본을 읽는 키워드라 해도 과장은 아닐 듯싶다. 그들에게는 매달려야 할 대상이 익숙한 아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일 뿐, 그래서 그 여자와 함께 죽는 자멸적 행동을 통해 자신의 뿌리 뽑힌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일본의 우익들이 독도를 다케시마라 부르며 일본의 고유영토라 주장하는 것도, 정신대의 존재 조차 부정하는 것도, 무엇이라도 매달릴 대상이 있어야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심리적 기제가 아닐까? 아니면 일종의 발달장애? 일본인의 심층심리에 깔려 있는 불안과 트라우마를 한국인에게 적용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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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 - 다치바나 다카시의 암과 생명에 관한 지적 탐구
다치바나 다카시.NHK스페셜 취재팀 지음, 이규원 옮김, 명승권 감수 / 청어람미디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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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암에 관해 꽤 많은 책을 읽어 왔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의 이 책은 암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꾸도록 하여 암이 고등동물의 숙명이며 장수의 필연적인 귀결임을 담담히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암투병및 수기류와는 구별된다. 저자 자신도 2007년에 방광암 수술을 받았고, 그 이후 세계적인 암연구소와 연구자들을 찾아 다니며 최신 암이론과 치료 등에 대한 방대한 취재를 거쳤다. 그 과정에서 암이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몸 속의 60조 개에 이르는 세포가 복제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들이 몸 속에 쌓여 생기는 것이며, 따라서 나이가 들수록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통계적으로 2명에 1명은 암에 걸리고 3명 중 1명은 암으로 사망하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암 퇴치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비용과 투입되는 노력에 비해 우리가 암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부분은 그야말로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항암제가 본래는 독가스에서 파생된 독극물이라든가, 암세포가 생존을 위해 몸 속에서 벌이는 가공할 전략 등에 이르기까지, 의료계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가들과 일반인들 모두 암에 대한 상식을 재점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일까, 저자는 知의 거장답게 자신의 육체를 매개로 전 수술과정을 모니터로 지켜보며 집도의와 대화도 나눈다. 자신의 병을 객관화하여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저자의 思考는 종국엔 암이 재발했을 경우에 항암제를 투여하지 않고 오로지 맑은 정신으로 지적인 일상생활을 계속하다가 죽고 싶다는 소망에 이른다. 아마 내 몸 속에서도 세포 복제과정에서 많은 오류들이 축적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도 예외없이 암에 걸릴 수 있고 수술과 항암제 등에 대해 심정적인 갈등을 겪을 것이며 그렇게 연명하다가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일단 암선고를 받으면 그 암으로 인해 죽을 확율은 100%다. 저자도 이것만은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항암제를 통한 단순 연명보다 삶의 질을 더욱 중요시하는 저자에게 공감한다. 가까운 사람들을 암으로 떠나보낸 몇 년간, 나는 되도록 암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는다 해서 암이 나와는 멀리 있는 것이 될 수 없듯, 오히려 늘 암에 대해 알고자 애쓰고 최신 치료법이나 항암제 등에 관한 지식을 쌓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죽기 직전까지 맑은 정신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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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조던, 나이키, 지구 자본주의
월터 레이피버 지음, 이정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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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학 강의 가는 길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마이클 조던, 나이키, 지구 자본주의>를 다 읽었다. 2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그 내용을 알고 나니 결코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표제처럼 마이클 조던이라는 농구선수가 나이키를 등에 업고 전지구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이유를, 정보와 자본의 무한 흐름을 선취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전략으로 보고 있다. 마이클 조던이 만들어낸 풍요와 성공의 이미지에다 그가 광고하는 나이키 신발 및 의류, 그리고 통신의 발달로 인해 가능해진 전지구적인 관련 상품 광고가 결합하여 그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나이키가 추구했던 경영방식이다. 아시아의 개발도상국가에서 값싼 임금과 살인적인 노동시간을 강제하여 만들어낸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는,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어린 소녀들에게 시간당 15센트의 임금으로 하루 11시간에 걸친 노동력을 투입하면 5달러 60센트에 만들어 지는데, 이것이 서구에서 70달러 이상에 팔린다. 마이클 조던에게 돌아가는 천문학적인 돈은 결국 아시아 소녀들의 임금과 노동시간 착취의 결과물이며, 이에 대해 마이클 조던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자본과 국제 금융권력, 그리고 스포츠 브랜드 이미지는 그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침해나 노동자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 따위에는 단 한 번도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오로지 더욱 싸게, 더욱 빨리 상품을 만들고 거액을 들여 광고를 찍고 스포츠 스타를 내세워 비싼 값에 팔기만을 원할 뿐이다.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강조하며 너무도 급변하는 시대에, 현란한 광고와 브랜드로 육박해오는 국제 자본의 맹공 앞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너무도 쉽게 10만원이 넘는 나이키 신발을 구매하는지(대부분 부모님의 돈으로)에 놀라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택이 지구화라는 허울을 얼마나 더 견고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단 한 명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모습에 지독한 실망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20대 80, 또는 88만원 세대 등의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는 현 시점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 한번 쯤 돌아볼 일이다. 브랜드와 상품이 지위상징이 되어버린 현시대에,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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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
최호근 지음 / 책세상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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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부산교육대 연구교수인 최호근의 <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를 읽고 난 이후다. 2005년에 한번 통독했었고 2010년에 대학 강의용으로 학생들과 또 한 번 읽었던 책이기도 하다. genocide는 본문에 소개된 Raphael Lemkin이라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 법학자(그의 가족도 나치 강제수용소의 희생자들이다)의 정의에 따라 "한 국민이나 한 민족 집단에 대한 철저한 파괴"라 할 수 있는데, 유고연방이나 르완다에서 벌어졌던 인종청소와 같은 맥락이다. 표지사진은 경상북도 경산 소재 폐 코발트 광산에서 발굴된 이른바 보도연맹원 학살사건(1950년 7~8월)의 희생자 유골들이다. 인간의 과거 역사를 떠올려 보면, 인간이 같은 인간을 학살하고 종교나 이념 따위로 합리화하려 한 경우가 무수히 많다. 십자군 전쟁이나 성바톨로뮤 학살부터 스페인 정복자의 아즈텍과 잉카 문명 파괴, 북미의 영국인들에 의한 토착 인디언 학살,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나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또는 일본군에 의한 난징학살,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인간만큼 동종을 그토록 잔혹하게 그것도 집단으로 철저히 파괴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존재도 드물 것이다. 특히 20세기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아프간전쟁 등, 수 십 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목숨을 빼앗겼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0년간 집단 학살의 희생자 수가 무려 1억 7500만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인간의 동종에 대한 파괴행위가 일종의 유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러니까 누구든 제노사이드를 저지를 수 있고 누구든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1948년 4월 3일에 시작된 제주도민의 봉기 이후 군경과 서북청년회에 의해 희생된 제주도민만 해도 3만 명이 넘고, 보도연맹 학살의 희생자도 역시 3만 명에서 10만 명 사이인 것으로 파악된다. 제노사이드를 벌이는 주체는 역시 국가다. 권력자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벌이는 공포정치의 일종인 셈이다. 지금 새삼스럽게 제노사이드를 얘기하는 것은 회고가 아니다. 현재도 제노사이드는 세계 각지에서 규모의 대소를 떠나 계속 벌어지고 있는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명분만은 그럴듯해서 종교나 인종, 민족, 이념 등 갖가지 핑계로 피 냄새를 지우려 하지만 희생자들은 알고 있다. 하등하다고 판단한 인종의 절멸을 당연시 했던 신대륙의 발견과 이어진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표면적인 좌우 이념의 시대가 끝난 지금도, 인간은 여전히 정신적인 미성숙과 파괴의 열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늘 경계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악이 깃들어 있다. 그 악은 오만과 편견, 또는 상황논리에 따라 수시로 통제를 벗어났고 또 벗어나려 한다. 누구든 예외가 아니다. 제노사이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성을 경계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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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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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인 저자가 어린 아들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세계가 직면한 기아의 구조적 모순과 악순환을 너무도 차분하게 들려주어 오히려 더욱 비극적이다. 식량을 확보할 자본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세계의 곡물 가격을 좌지우지하는 소위 선진국의 큰 손들, 생산과 분배에서 배제되어 죽어가는 농민들. 분쟁과 가난, 무능한 정부, 그리고 소수의 탐욕으로 인해 하루에 10만 명,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는 현실. 한국은 어떤가? 예전 대학 강의 준비의 일환으로 Wikipedia에서 Neocolonialism 항목을 찾아보았다가 South Korea's land acquisitions라는 소주제 아래 기사를 읽고는 착잡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기사에 따르면 남한의 지방 자치단체와 대기업들이 저개발 국가로부터 수백만 헥타르에 이르는 농업용지를 사들이고 있으며, 이것이 곧 농업제국주의 또는 신식민주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08년에 Daewoo Logistics가 벨기에의 절반에 이르는 1300만 헥타르의 농업 용지를 마다가스카르로부터 확보했고, 현대중공업은 러시아 극동지역의 농업 용지 10000헥타르를, 전라도는 필리핀 중앙부의 농업 용지 95000헥타르를 확보했다는 것. 남한의 장기적인 식량 확보와 바이오 에너지 개발을 위한 대비라지만, 일본제국주의의 뼈아픈 경험을 잊을 수 없는 우리가 어느새 저개발국가에 대한 경제적 침략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지역의 경제에 도움은커녕, 오히려 굶주림을 더욱 악화시키고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할 뿐이다. 식량과 에너지의 확보가 미래 생존의 중추라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것이 타국과 타인의 희생을 발판으로 이루어지는 한, 세계는 이미 신식민지 쟁탈전에서 끝없는 전쟁을 시작한 셈이다. 이제 남한도 식민지를 거느리는 국가가 되었다. 자랑스러운가?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식량의 확보는 어떻게든 자국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절실함으로 기술 개발과 신품종 개량, 농업인의 육성 등에 많은 관심과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가 이기주의 및 국제적 자본 흐름의 투명성 등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갈 길이 멀다. 굶주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더 이상 양심에 호소하는 이슈 거리로 이용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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