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곁에 있어요 - 하나의 생명과 일곱 개의 보석 이야기
다나카 미와 지음, 정은지 옮김 / 꽃삽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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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산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는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회한과 자책, 살아 있을 때 좀더 잘 대해주지 못했던 자신의 무관심에 대한 뼈저린 반성은 정작 나의 죽음에도 그대로 이어지리라. 다나카 미와가 쓴 [지금도 곁에 있어요]는 짧은 책이지만 그 울림은 두껍고도 길다.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기억하고자 쓴 수기이면서 그 불행이 가져다 준 삶의 참 의미에 오히려 남은 가족이 변화하는 정신적 갱생이 마음에 깊이 각인된다. 누구에게나 찾아들수 있는 불행이라는 점에서 사후의 삶에 대한 관념을 수정할 수 있었다. 내용은 실화이지만 문체는 오히려 문학적이다. 조깅을 좋아하던 동생 리에가 교통사고를 당해 뇌사 상태에 빠지자 평소 동생의 성품을 알고 있던 언니이자 저자가 동생의 장기 기증 서약서를 찾아 부모님을 설득하고 결국엔 심장, 폐, 간장, 신장 ,췌장, 소장에 이르는 거의 모든 장기가 일곱명의 환자들에게 이식되어 계속 살아가게 되었다. 평소 적극적으로 살던 리에의 삶의 방식이 낯모르는 타인들에게도 전해져 그들의 의식까지 바꿔 놓으리라.

 

과연 삶이란 시작과 끝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처럼 어긋남이 없는 완벽한 것일까? 사후의 삶은 없는 것일까? 늘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산다면, 그래서 육체의 죽음을 넘어 정신적 삶의 영원함을 믿는다면 장기 기증이라는 의타적 행동을 통해 영원히 사는 것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리라. 육체적 삶만을 추구하며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성정일진데,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육체를 기꺼이 장기 기증이라는 행동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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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희망을 쓰다 - 루게릭과 맞서 싸운 기적의 거인 박승일의 희망일기
박승일.이규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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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소위 <루게릭병>이라는 것이 비교적 드문 질환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에만 1500~2000명에 이르는 환자들이 있고, 전 세계적으로도 계속 늘고 있는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나이가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죽음에 관한 책들을 집중해서 읽었는데, 그 과정에서 <루게릭병>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수기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중 국내 최연소 프로농구 코치였던 박승일의 <눈으로 희망을 쓰다>, 스웨덴의 방송국 뉴스 앵커인 울라 카린 린드크비스트(Ulla-Carin Lindquist)의 <「원더풀」: 원제는 『Ro Utan Aror』>, 그리고 일리노이 주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 영문학 교수인 필립 시먼스(Philip Simmons)의 <「소멸의 아름다움」: 원제는『Learnig to Fall』> 등을 읽고서 비로소 <루게릭병>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우선 <루게릭병>이란 ALS(Amyotrophic Lateral Sclerosis)의 줄임말로써 한국어로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으로 번역된다. <원더풀>에 따르면 이 질환은 “.....운동신경 세포, 즉 근육을 공급하는 세포가 뇌 속에서, 뇌간에서, 그리고 척수의 바깥 부분에서 죽어가는 증상이다. 측삭이란 옆쪽을 뜻한다. 신경세포들이 죽은 자리는 딱딱하게 굳어진 결합조직, 즉 경변이 된다. 그리스어로 ‘미오시스myosis’인 이 근육은 신경이 보내는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 즉 근육이 약해지고 위축atrophy되는 것이다. 그리스어 ‘트로피trophi’는 영양분을 뜻한다. 루게릭병에서 문제가 되는 영양분은 신경신호다. ‘아트로피atrophy’는 트로피의 반대말이다. 즉 무엇인가 결핍되었음을 뜻한다.”(p. 81~2)

그러니까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인 근육의 움직임이 없어지고 보조기구의 도움 없이는 호흡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바로 <루게릭병>인 것이다. 살아있는 시간 자체가 지옥일 수 있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지가 멀쩡한데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권태를 못 이겨 자살을 하는 따위의 행위들은 사치스러운 자기 파멸적 행동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에게는 삶과 죽음이 동의어일 수밖에 없다. 잠이 들어도, 깨어 있어도 무엇 하나 제 힘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삶마저도 바꾸어 놓는다.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어김없이 진행되는 자신의 육체의 소멸 과정이 어떤 상념을 불러일으킬까? 진단을 받기 전까지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갑자기 변해 버린 자신의 육체는 얼마나 몰가치하게 보일 것인가? 나의 눈으로 나의 육체가 서서히 지상의 삶에서 멀어지는 모습이 똑똑히 보이는데 그 어떤 것이 나의 생명보다 소중할 것인가?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분명 내 것이었던 육체는 진단 후에 객관적인 대상물로 전락한다. 내 몸인데도 내 몸이 아닌 느낌, 내 의지로는 도저히 예전 상태로 되돌릴 수 없고 그렇다고 약물이나 기계로도 완치될 가능성이 낮은 불치병일수록 정신과 육체와의 상관관계는 과연 살아있다는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만은 <루게릭병>처럼 1초 1분 후의 삶이 곧 죽음일 수 있는 절망 속에서도 환자는 삶에 관해 더 많은 생각을 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죽음보다 삶에 매달리고 싶은 심정은 누구나 똑같지 않을까? 지금, 자신의 삶이 어둡다거나 절망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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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1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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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The Voyage Out)』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처녀작(1915)이다. 말하자면 그녀가 본격적으로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소설기법으로 지극히 난해한 문장을 구사하며 줄거리조차 잘 파악되지 않는 글쓰기에 몰입하기 전에 쓴 전통적인 성격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미 인간의 의식 세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문단 데뷔작이라고 하기에는 꽤 깊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따라서 본 작품 『항해』는 표면적으로 볼 때 레이첼 빈레이스가 안락한 온실 같은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여정을 향해 과감하게 나서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다양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사랑,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르는 복잡하지 않은 줄거리 전개의 밑바닥에 레이첼 자신의 내면세계로의 의식적 항해라는 이중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간단히 줄거리를 살펴보면, 꽤 많은 선박을 소유한 해상무역업자인 아버지 윌로우비 빈레이스 아래에서 부유하지만 사회적, 지적으로 편협하게 성장한 24세의 레이첼이, 외숙모 헬렌 앰브로우즈의 건의로 아마존 강 하류로 함께 항해하게 되었고, 산타 마리나 섬의 빌라에 머물던 중 테렌스 휴잇이라는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어 그와 약혼까지 했으나 아마존 강 상류 원주민 마을 탐험 후 열병에 걸려 요절하는 극히 단순한 내용이다. 하지만 다양한 캐릭터들의 성격 묘사와 그들의 의식 전개 과정, 이국적 풍광 묘사 등, 소설 자체의 재미는 꽤 크다. 남성 캐릭터들 중에서 특히 테렌스 휴잇의 친구인 세인트 존 허스트의 냉소적인 말투와 날카로운 지성, 레이첼의 외삼촌 리들리 앰브로우즈의 학자연하는 지적 허영심 아래 깔려 있는 여성 비하, 항해 도중 끼어든 보수당 국회의원 리처드 댈러웨이가 주장하는 정치적 한계와 여성에게는 투표권을 절대 줄 수 없다는 극히 남성중심적인 인식, 침묵에 관한 소설을 쓰고자 하는 테렌스 휴잇의 모순적인 여성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실용적이지도 학문적이지도 않은 윌리엄 페퍼의 광범위한 지식 등, 본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여성의 지적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들을 결혼이라는 굴레로 묶어두고자 하는 소위 가부장적인 특권을 절대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에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에 비해 지적으로 열등할지는 몰라도(왜냐하면 여성들의 교육이 보편적이지도 않았고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도 가사와 자녀의 양육에만 한정되어 있었던 시대적 배경 하에서 여성들이 책을 읽고 생각하는 행위조차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삶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면에서는 남성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외부와의 접촉 없이 자신만의 고립된 방에서 고전음악 작곡가들의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거나 책을 읽고, 남성에 대한 환상 없이 오로지 자신의 내면적인 목소리에만 반응하던 레이첼이, 테렌스 휴잇을 만나 사랑에 눈 뜬 뒤 그녀의 의식 속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삶의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충돌에 대한 정신적 반응과 사랑에 대한 주체적 인식에 눈떠가는 과정은 여성 자의식의 확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단 작가가 레이첼을 죽음에 이르도록 설정한 의도가 남성 중심적이고 보수적인 시대적 산물로써의 레이첼의 태생적 한계내지 여성으로써의 성 정체성 극복 불가능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레이첼 외에 앨런 양 이라고만 지칭되는 노처녀는 <영문학 입문서>를 집필 중인데, 지적인 능력이나 인생 경험으로부터 터득한 처세술 따위가 본 작품에 남다른 향기를 풍기는 핵으로 작용한다. 또, 혁명가가 되기를 갈망하는 이블린 머거로이트는 자신에게 청혼하는 어떤 남성하고도 육체적·정신적으로 공감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하고자 애쓴다는 점에서 결혼으로 여성을 통제하고 성적인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남성들에 비해 오히려 삶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대단히 정치적인 여성으로써, 앨런 양과 함께 버지니아 울프가 이상적인 여성으로 생각하는 인물로 여겨진다. 물론 본 작품에 나오는 여성들은 레이첼 처럼 남성 위주의 사회적·계급적 지배구조에 적응하며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앨런 양이나 이블린 머거로이트 같은 여성들의 독립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 더욱 부각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 작품을 다 읽었을 때 떠올랐던 맨 처음 느낌을 덧붙이자면 영문학을 전공한 남성으로써의 시각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지적 능력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며(사실 당연한 것이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남성의 억압과 편견이 작용했다), 시대적 편견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 면에서는 남성의 몇 배에 해당하는 정신적·육체적 고난이 강요되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실제 버지니아 울프는 비교적 좋은 가정환경에서 지적이고 유복하게 성장했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레슬리 스티븐 역시 가부장적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본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의 모습이 대개 지적으로 허세를 부리거나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일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뛰어 넘어 여성으로써의 주체적 의식을 회복하고자 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노력은, 비록 작품 속에서 레이첼의 죽음으로 인해 좌절된 듯 보이지만, 울프 개인으로써는 실패가 아닌 것이다. 작품 자체에 대한 비평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고, 번역에 관해서 덧붙일 사항이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버지니아 울프 작품 번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가장 큰 원인은 우선 그녀가 구사하는 소설 기법인 의식의 흐름(의식의 흐름이란 본래 심리학 용어로 윌리엄 제임스가 <심리학 원리(Principles of Psychology)>(1890)에서 사용했는데, “깨어 있는 정신에서 사고와 의식의 중단되지 않는 흐름을 기술하고자 하는”(to characterize the unbroken flow of thought and awareness in the waking mind: M. H, Abrams,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1957, p.186) 목적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후에 20세기 소설 기법의 하나로 의미의 확대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서구인이 경험한 정신적, 문화적 충격을 전통적인 소설 기법으로 묘사하기에는 다소 부족하여 제임스 조이스나 윌리엄 포크너, 버지니아 울프 등의 작가들이 채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자체의 서술적 난해함과 문체의 난해함이라는 이중적 난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국 문학작품의 번역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등의 사실을 전달하는 번역과는 달리, 완전한 허구라 해도 작가가 보고 겪었던 인간의 정신적·심리적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므로 사실 1대 1 완벽한 자구 번역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영시를 한국어 번역으로 읽을 때 도무지 그 의미가 깊이 와 닿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은 해당 언어로 쓰일 때 가장 완벽한 것이다. 그러므로 외국문학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번역자의 외국어 해독력과 한국어 구사력 그리고 작가의 문학적 감수성을 넘어설만한 공감력 등이 요구되는데, 소위 한국의 이름난 몇몇 전문 번역가들이나 대학교수들도 오역을 피할 수 없고 그로 인해 번역 능력에 대한 오해를 받기도 하는 상황에서 번역의 질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읽을 만 하게 번역하기란 새로운 작품의 창작만큼이나 산고가 따르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본 작품의 번역은 또 한 번의 새로운 시도로써 받아들이길 바란다. 그동안 한국어로 번역된 여타 울프의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잘 읽히는 편이고 의미의 전달이나 특히 수시로 나오는 레이첼의 의식의 흐름(본격적이지는 않아도 후에 확대될 버지니아 울프의 문체적 특성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부분은 흠잡을 데 없이 잘 번역되었다고 여겨진다. 읽는 내내 불편하거나 해독 불가능을 겪지 않았으므로 비교적 훌륭한 번역이라고 할 만하다. 단순한 표면적 의미 전달 이상을 뛰어 넘어 번역 해당어의 언어적 특성에 맞도록 번역해내야 하는 문학작품일수록 번역자의 실력이 요구되는데, 다행이도 번역자가 울프 전공학자이자 현역교수이며 여성이라는 점이 더욱 신뢰할 만한 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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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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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역사의 미술관>은 서양사에서 굵직한 사건들을 기록한 명화들에 얽힌 사연을 쉽고도 압축적인 해설로 풀어가는 미술로 보는 서양사다. 물론 전체 서양사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고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 같은 권력자들부터 클레오파트라나 퐁파두르 부인 같은 여걸들, 전염병과 종교개혁 등, 서양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과 얽힌 시대적 사건들을 충실하게 그린 서양화 사상 명화에 속하는 그림들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각장 끝에 요약되어 있는 명화 관련 사건들에 대한 해설은 잘 몰랐던 서양사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예를 들어 제 1차 세계대전 관련 그림들과 그에 대한 해설을 읽고 나면 뒤 이어 세계대전에 대한 두 페이지짜리 해설(p.266~7)이 나오는데, 그동안 읽었던 관련 역사서 어디에서도 정리되지 않던 핵심 사항들이 정말 빠르게 정리된다. 책의 거의 모든 부분이 흥미롭게 읽히지만, 이 책에서 특별히 나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서양 남성화가들에 의해 왜곡된 시각으로 그려진 이슬람 지역 여성 관련 그림들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탁월한 시각으로 분석한 오리엔탈리즘의 제국주의적·남성우월적 편향된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이념이나 사상 따위의 거대 담론보다 문화를 가장한 예술이 우리들 속에 서서히 스며들어 더욱 음험한 지배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서양화를 보면서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정치적 권력 지향성을 함께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서양화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특히 정치적 격변기에 생산된 그림들에 대해서 만이라도 제대로 된 시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세계 모든 역사는 자국 중심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역사 해석 역시 마찬가지다.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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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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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죽이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거리낌 없이 시체와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옆 사람이 가진 배급 빵 4분의 1쪽을 뺏기 위해 그 사람이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미개한 피그미, 가장 잔인한 사디스트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우리 존재의 일부분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절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p.263)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시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하다 스물넷이던 1943년 12월 13일 파시스트 민병대에게 체포되었고 이후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가까스로 생존한 사람이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영화나 소설, 다큐멘터리 등으로 수없이 확대·재생산 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실제로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내적 경험을 절대 넘어설 수 없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사실’들을 어떻게 알 수 있고 더구나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들의 수기가 증언하고 있듯,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이토록 잔학하고 폭압적인 행동들을 했었단 말인가? 처음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관통하는 폭력성과 권력지향성, 광기에 사로잡힌 독재자와 그에게 열광하는 대중들의 마음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보상심리를 알고 난 후에는 이것이 인간 보편의 어두운 징후이며, 언제 어디서든 재발할 수 있는 전염병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와 쿠바의 관타나모가 강제수용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저자 프리모 레비는 1987년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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