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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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들을 모두 모아서 한 권 씩 다 읽겠노라고 스스로 맹세했던 때는 벌써 25~6년 전인 대학생 시절이었다. 당시엔 고려원에서 카잔차키스 전집이 나와 있었고, 나는 용돈을 아껴 그 전집을 한 권씩 구매하느라 점심도 자주 거르고 힘겹게 구한 작품들을 밤새워 읽느라 수업도 빼먹기 일쑤였다. 그렇게 읽어 내려간 작품들 중에는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성 프란치스코>, <영혼의 자서전>, <미칼레스 대장> 등, 거의 전 작품들이 포함된다. 그런데, 대학생 시절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져 40대 중반을 훨씬 넘겨버린 지금도, 내게 카잔차키스하면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오를 정도로, 조르바가 내게 남긴 인상은 강렬했다. 아마 조르바처럼 살기가 쉽지 않아서, 조르바처럼 사회의 인습이나 편견을 무시하고 내키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조금은 부러워서, 술과 여자와 음악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조르바의 자유로운 영혼에 반해서, 였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조르바처럼 살고 있지 못하니까. 육체와 정신의 참 자유를 추구했던 조르바에 비해 지금의 내 생활은 생활 그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멈춰 선 자의 그것에 불과하니까. 물론 나는 아파트 평 수와 자동차에 올인하는 대한민국 평균 남자들의 사고 방식과는 많이 다르고 그것에 대해 별 관심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조르바의 삶을 무조건 추종하기에는 많이 닳아버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조르바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은 여러가지로 다르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횡행하고, 따라서 깊은 사고보다는 가볍고 즉각적이며 감각적인 자극에만 반응하는 시대다.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채, 머리카락은 색색으로 물들이지만 정작 머리 속은 채우려 하지 않는 가벼움과 유희의 시대에,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물질과 소유욕에 얽메여, 스스로를 불합리한 관계 속에 가두고서, 그것들을 삶이라 여기며 하루, 한 달, 일 년을 살다 보니 어느덧  중년. 꼭 무엇을 이룩하고 가시적으로 성취해야만 바람직한 삶은 아닐 것이다. 마음 속에 늘 간직만 해오다 놓쳐 버린 많은 꿈들, 내 손가락에서 빠져나간 기회들, 아쉬움과 상실감. 행동보다 생각이 많은 성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겠지만, 다시 한 번 자유를 꿈꾸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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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안동림 역주, 장자색인 수록 현암사 동양고전
장자 원전, 안동림 역주 / 현암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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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개인적으로 큰 비극을 겪고 나서 슬픔을 달래고자 식음을 전폐하고 읽고 또 읽었던 책, 장주의 <莊子>. 단순히 글을 묶은 책이 아니라, 글자 하나 하나가 살아서 꿈틀거리며 나의 정신에 커다란 울림을 주었던 장주의 現存이었다. 한 동안 허공을 향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느냐며 고함도 쳤었고, 세상에 나의 불행을 이해하고 참으로 위로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 때 서재에서 서성이다 책꽂이에 오래동안 그대로 꽂혀 있던 장자를 재발견했고, 內篇의 逍遙遊부터 다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정말 느리게, 호흡도 느리게, 행동 역시 겨우 살아 있다는 기미만, 밥 한 숟가락 겨우 삼키고, 세상 모든 것이 정지한 듯, 그렇게 읽었다. 그렇게 내편을 다 읽고 나서 外篇을 읽어 나갔다. 그러다가 至樂에 이르러 장주도 나와 같은 비극을 겪었다는 알게 되었고,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일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받아 들이기 나름이고, 모든 것은 해석의 문제였던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질서와 무질서,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둠. 세상 만물은 對局과 조화를 통해 합일된다. 인간의 육체는 시공간을 초월할 수 없다 해도, 정신은 가능하지 않은가? 내 몸은 우주에서 사라져도 내 정신은 우주의 어딘가에 기록되고 있지 않을까? 인간의 탄생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육체의 소멸이 있어 왔지만 그것은 단지 물질의 소멸이었을 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정신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우연히 부모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나 한가로히 노닐다가 또 그렇게 태어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내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듯 죽음도 내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조화일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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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 개정판, 원문 영어 번역문 수록 현암사 동양고전
노자 지음, 오강남 풀어 엮음 / 현암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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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읽은지 꽤 된 것인데, 그 누가 老子의 道德經을 한 번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도 수시로 꺼내 한 구절씩 읽으며 그 깊은 뜻을 새기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정작 노자의 의도와는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구절들과, 시대를 넘어 그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기를 반복하는 고전 중의 고전, 노자. 물론 나의 한자 실력이 노자만큼 된다면 그와 직접 대화하면서 질문하고 잘못 해석한 부분에 대해 교정을 받겠지만, 불행히도 노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번역자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의 노자가 세상에 넘쳐난다. 오해와 오역이 가장 많은 책이 아마 노자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일까, 나는 몇 권의 서로 다른 한글 번역본 노자를 갖고 있는데, 이 책도 그 중 한 권이다. 이 번역서의 장점이라면 존칭어를 써서 마치 친절한 교사가 노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조곤조곤 속삭이듯 낮은 톤으로 노자의 사상을 가능한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편안함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다른 번역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책도 우선 노자의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설을 각 장 마다 싣고 있다. 이 해설 부분은 지금까지 노자에 대한 수많은 해석들과 사상사적 논쟁거리들을 담고 있으므로 참고삼아 읽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실 해설이 아니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노자에는 허다하게 들어있다. 해설을 통해 노자의 사상에 발뒤꿈치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원문보다 해설이 더 많은 노자의 다른 번역서를 언제든 구매할 의사가 있다. 노자를 알고 애호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겠지만, 내게도 노자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 8장의 上善若水. 최상의 훌륭함이란 물과 같다는 것. '상,선,약,수' 단 네 글자에 서양의 그 어떤 철학이 설파하는 인생론보다 더 깊고 포괄적이며 근원적인 깊이와 폭넓은 사유가 담겨 있다. <大學>에 나오는 八條目 중 '格物'과 '致知'라 할까, 성리학자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을 철저하게 궁구하고 난 뒤에 비로소 다른 物로 넘어가는 공부를 했듯이, 아마 노자는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지극한 선에 대해 궁구했으리라. 국가 간 다툼과 우열 관계, 승자만을 대접하고 패자에겐 동정의 눈길조차 주지 않는 잔인한 경쟁의 시대. 한정된 자원을 두고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지금, 정작 하나 뿐인 지구는 아이들의 만화영화에서나 지켜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과연 선하다는 것은 무엇이고, 분열된 사고를 통합하여 화합에 이르는데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 물처럼 흐르는데로만 살면 갈등도, 아귀다툼도 없어지고 진정한 평화가 저절로 찾아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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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를 살아도 사자로 살고 싶다 - 패튼, 직선의 리더십 KODEF 안보총서 10
팀 리플리 지음, 김홍래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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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와 함께 읽기 시작해 어제 읽기를 끝마친 이 책은, 롬멜을 다룬 앞의  두 권에 비해 패튼의 삶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어, 마치 2차세계대전 후반기 속에 직접 들어 가서 실제 사건들을 목도하고 있는 듯한 생동감이 돋보인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8~9월에 걸쳐 패튼의 제 3군단이 프랑스로 진격해 곳곳에서 저항하는 독일군들을 처리하고 그들의 장비를 접수하거나 파괴하면서 쉼없이 진격해나가는 장면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물론 그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미군 보병들과 파괴되는 전차들도 부지기수로 늘어가지만, 패튼 특유의 행동력과 전쟁터를 집처럼 여겼던 직선적 성격이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가장 극적인 작전들과 맞물려 연합군의 승리에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패튼을 얘기할 때 흔히 언급되는 사건 중 하나는 시칠리아의 한 병원에서  전투 신경증에  걸린 한 병사의 구타와 관련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패튼 만큼  전쟁을 사랑한 사람도 없었고 당연히 미국인이라면 모두 패튼처럼 전쟁을 사랑해야 하고 전쟁에서 목숨을 아끼지 말고 전진해야 한다는 패튼 특유의 사유 체계가 빚어낸 일화일 것이다. 구타 사건 후에 정작 작전으로부터 제외되어 두문불출, 다시 전쟁터로 나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그의 모습에서, 과연 전쟁의 어떤 측면이 패튼에게 그토록 열정적으로 작용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패튼은 전쟁 상황이 자신이 가진 장점을 가장 잘 끌어낼 수 있고 자신의 행동력과 지휘능력, 그리고 긴장감 속에서 솟아나는 지략을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과정 자체를 너무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평화가 오히려 부담되었던 사람, 늘 전쟁터를 누비며 옛 장군들의 싸움과 전략, 승리를 복기하며 일평생 군인이기를 원했던 사람, 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1885~1945). 총알도, 포탄도, 전쟁의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도 평화시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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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 - 롬멜 리더십, 열정과 추진력 그리고 무한한 낙관주의 KODEF 안보총서 7
크리스터 요르젠센 지음, 오태경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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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읽었던 마우리체 필립 레미의 <Mythos 롬멜>에 이어 크리스터 요르젠센의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 원제는 Rommel's Panzers>를 읽었다. 앞 책처럼 이 책도 롬멜의 삶을 그 초기부터 다루고 있는데 특히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롬멜의 활약상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1차 대전에서 보여준 눈부신 활약을 시작으로 1차 세계대전 후 교관으로서의 삶과 2차 대전 발발 후 북아프리카 전선에 배치되어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며 보여주었던 지휘관으로써의 탁월한 능력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삶을 추적하며 그 삶에서 지금을 살고 있는 무기력한 많은 이들에게 정신적인 자극을 준다.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연합군과의 전투를 통해 롬멜은 매번 진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감한 작전과 실행 능력, 때를 놓치지 않는 과단성, 기회를 포착하여 적을 궁지로 몰아 넣는 전략적 사고, 병사들과 늘 함께 하며 검소하고 금욕적인 자세로 일관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온화한 카리스마. 적군이건 아군이건 가릴 것 없이 존경과 찬탄의 대상이자 질투와 비아냥거림의 대상이기도 했던 롬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빛나는 몇 번의 승리가 고질적인 보급물자의 부족함을 딛고 이룩해 낸 전략적 승리라는 것이다. 영국군의 항공기, 전차, 병사 수에 비해 늘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했던 아프리카 군단이었기에(당시 히틀러는 동부전선, 즉 소련과의 전쟁에 대부분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쏟아 붓고 있었기에 아프리카 전선은 히틀러가 느끼기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롬멜과 휘하 참모들, 그리고 일반 병사에 이르는 전 인원이 합심하여 거대한 적군의 물량 공세에도 의연히 버텨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 수록 연합군의 압도적인 물량 앞에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롬멜의 심경은 어땠을까? 만일 히틀러가 동부전선에 쏫아 붓는 병력과 장비의 1/3만이라도 지원해주었더라면 북아프리카의 판도는 바뀌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롬멜과 대적할 만한 지휘관이 거의 없었던 북아프리카에 전선에서 독일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었을 것이다. 롬멜 한 사람의 지휘 능력이 연합군의 거의 모든 지휘관을 합쳐놓은 것보다 더 탁월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독일은 롬멜 같은 인재를 그저 소모시켰을 뿐이다. 독일은 롬멜 같은 인재를 어떻게든 살려서 전후의 복구에도 활용했어야 했다. 따라서 독일 국민들이 그에게 보여준 존경심만으로도 롬멜을 단순히 나치의 충성스러운 일개 군인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그에게는 조국과 총통, 가족과 휘하의 병사들 하나하나의 목숨이 소중했을 뿐이다. 그랬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작전을 신속하게 성공시킬 수 있었으며 끝없는 추진력으로 연합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것이다. 나는 히틀러와 나치의 제3제국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었던 독재자와 그 독재자를 신주단지 모시듯 받들었던 국민들의 무분별한 판단중지의 시기에, 하필이면 롬멜같은 장군이 독일인이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가 영국인이었거나 미국인이었다면? 아마 2차 세계대전이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러한 생각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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