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1950 -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20세기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 세계의 전쟁 1
피터 데니스, 고든 L. 리트먼 지음, 김홍래 옮김, 한국국방안보포럼 감수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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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1950>은 군사학 전문출판사 플래닛 미디어의 <세계의 전쟁> 시리즈 제 1권으로 나온 책인데, 모두 15권에 달하는 꽤 방대한 볼륨을 갖추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더 나왔으면 했는데, 아마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아서(작년인가, 강남의 대형서점에서 전 권 할인행사 하는 것을 보았는데 참 씁쓸했다) 중도에 기획을 내린 것 같다. 아무튼 나는 15권 중 13권을 소장하고 있는데, 지난 날부터 한 권씩 읽어 나가는 중에 있다. 특히 이 책은, 한국 내에서도 비교적 연구가 드문 인천상륙작전(1950.9.15)을 꽤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으로 정밀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작전의 개요나 미군의 상륙 병력 개괄, 실제 전투일지에 이르기까지,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어떤 책보다도 짧은 시간에 꽤  질높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흥미로웠던 사실은, 애초부터 인천상륙작전은 성공률이 희박하다고 생각되어 그 대안으로 군산과 주문진이 제시되었다는 것. 왜냐하면 인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야간 항해를 감행해야 했고, 조수간만의 차에 따른 위험, 부족한 기동 공간 등으로 인해 침공 함대가 겪을 제약이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p.76) 그러나 인천의 지리적, 수로적 특성이 대규모 상륙작전 자체를 어렵게 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김으로써 UN군(상륙작전에 동원된 대부분의 병력은 미해병과 육군이었고 한국해병도 소규모로 참가했음)이 인천으로 상륙하리라 판단하지 못했던 북한 인민군은 虛를 찔린 셈이 되었고, 그 이후 한국전의 방향이 극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6.6)도 비슷한 제약이 있었지만 결국 유럽 서부전선에서의 전쟁 향방을 바꾸지 않았던가? 이 책을 읽고 나서 알게 된 정보. 인천상륙작전의 미국측 공식 작전명은 Operation Chromite이고, 최초의 입안자는 Douglas McArthur가 아니라 미 국방부 소속 참모인 Donald McB. Curtis이며, 맥아더는 여러 단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작전을 강행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는 해도 어떤 작전이든 성공 유무를 떠나 얼마나 신념을 가지고 직접 실행에 옮기는 가에 따라 전쟁의 향방이 결정되는 것을 보면 지휘관의 판단과 과단성을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인천상륙작전은 미군 여기저기에서 긁어모은 급조된 상륙병력과 그들의 훈련 및 예행연습의 부족, 북한 인민군에 대한 정보 부족 등으로 인해 실패했을 경우 자칫 전쟁에서 주도권을 빼앗기고 전쟁이 더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맥아더의 참모진 중 한 명인 David G. Barr 육군 소장이 했다는 말, "이 작전은 너무나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적절하다. 그 기습의 효과는 대단히 클 것이다."(p.80)로도 판단할수 있듯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군사작전이 오히려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은 세계의 많은 전쟁사에서 익히 보아 오지 않았는가? 아무튼 지금부터 62년 전 바로 이 땅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20세기의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이라 할 인천상륙작전은, 결과적으로 현재의 대한민국을 가능하게 한 군사적 승리였다.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병사들과 민간인들의 명복을 빈다.

사족 하나. 한국 내에서의 6.25 연구는 아직도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야기한 동서 냉전의 산물로써의 한국전쟁은 분명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들 간의 대리전이었고, 남한의 이승만 정부가 북한을 도발하여 남침을 유도했건 남한이 북침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간에 근 3년에 걸친 이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국토는 황폐화 되었는지, 그로 인해 지금까지 남북간의 군사적 충돌과 서로에 대한 극한 감정의 대립은 얼마나 팽팽한지,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정치적 불안정과 동북아에서의 핵 전쟁의 위협 또는 중국과 일본의 핵무장 등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여파는 여전히 크고 불안한 토대에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대규모 분쟁을 얼마든지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6.25 연구도 좀 더 거시적이고 동북아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시각에서 여러 학문 분야에서 유연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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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육군전사
우에다 신 지음, 홍희범 옮김 / 길찾기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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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에다 신(上田 信)이 삽화를 그리고 쓴 독일 육군 흥망사다. 우에다 신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군사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타미야 등의 프라모델 박스 아티스트로도 저명한 사람이다. 그가 그린 전차나 항공기 등의 일러스트레이션들은 남자 아이의 가슴에 전쟁과 관련된 낭만을 극대화하여 전쟁 자체의 참혹함은 잊게 만드는 부작용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박력이 넘친다. 특히 전차의 내부를 그린 것들은 그 자체 하나의 설계도라 할 수 정도로 정밀하고 기계적 구조에 해박한 면모를 보인다. 나 역시 아주 어린 시절부터 타미야의 프라모델 국산 카피판들을 만들면서 성장했으므로 알게 모르게 우에다 신의 그림체에 매우 익숙하다. 그래서 일까, 어린시절에는 그저 독일군의 모습이 멋있었고 용감한 군대의 대명사처럼 여겼을 뿐, 그 독일군에 의해 얼마나 많은 유럽의 민간인들과 전쟁 포로들이 학살당했고 유대인들이 고초를 겪었으며 유럽 전체가 전쟁의 불길 속에서 신음했었는지는 훨씬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독일 육군의 궤적을 따라 독일과 유럽의 현대사와 제 2차 세계대전의 전모를 간결한 해설과 어울어지는 멋진 그림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글만 있는 戰史에 비해 그림이 함께 있는 책은, 예를 들어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을 묘사할 때 독소 양군이 대치했던 지역의 지도 뿐만 아니라 작전의 개요라든지 양군의 병기나 복장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세밀한 부분까지 눈으로 '볼 수' 있으므로 그 이해의 폭은 상상 이상으로 넓어진다. 일단 이 책 한 권이면 제 2차 세계대전의 전모를 간단히 파악하기에 부족함은 없다. 다만 과거 일본도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제국주의(또는 군국주의) 추축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인지, 우에다 신이 독일군을 바라보는 시각은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라기 보다는 약간의 憂愁어린 안타까움이랄까, 일본에서 줄기차게 출판되고 있는 태평양전쟁 관련서의 약간은 비뚤어지고 자만심 가득한 서술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을 읽을 때 반드시 걸러내야 할 부분이다. 그 외에는 비교적 평이하고 정확한 고증으로 일관하므로 한 번쯤 읽어 두면 나중에 좀더 심도있는 책들을 읽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전쟁 자체에 대한 낭만은 이제 접어 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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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마쓰오카 세이고 지음, 김경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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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다보니 학기 초에는 늘 독서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요즘 대학생들의 책읽기에 대한 무관심과 관심이 있어도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해 자신만의 기준은커녕 도서구매 자체의 저하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만다. 물론 현세대가 나의 세대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독서는 정신적 생존의 기본으로써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의 속도가 절대로 주지 못하는 총합적인 사고의 폭을 무한히 증가시켜 주는 적극적 활동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강의 첫 날은 늘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오리엔테이션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그나마도 추천도서 몇 권을 대학 졸업시까지 읽어 주기를 강조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만다. 대학 4년 동안 단 몇 권의 책만 읽고 끝이라니! 수 백, 수 천권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도 자신의 전공서적을 제외한 분야에서의 책들만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는 학생들에게 한국과 동서양의 고전명저 몇 권을 읽어 보았느냐고 질문하는데, 그 때마다 늘 절망하기도 수 십 번. 읽기는커녕 제목조차 모르는 학생들이 태반이고, 그나마 읽었다는 학생들의 대다수는 예를 들어 <그리스로마신화>의 경우 어린이용 만화책을 통한 내용 파악이 전부였다. 통탄할 일이다. 한국 대학생들의 지적 수준이 바닥을 헤메이고, 대학생활의 대부분은 학점과 소위 스펙 쌓기에 소모되고 있는 시대에, 당연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발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서는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 스스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간단히 인테넷을 검색해보거나 요약본을 서둘러 읽고는 만족하고 마는 현대성의 가벼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요컨데 지적인 호기심은커녕 관심분야의 협소함 또한 독서 자체의 가벼움에 한몫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 독서를 강조하는 나의 모습이 얼마나 구태의연해 보일 것인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아무리 한국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 해도, 그나마 베스트셀러만 읽는다 해도, 책은 꾸준히 출판되고 있고 여전히 팔리고 있다. 이 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독서법이다. 스스로 읽어 낼 능력이 부족할 때 먼저 읽은 사람의 독서 노하우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시아에서는 특히 일본에 탁월한 독서가들이 많은데, <창조적 책일기, 다독술이 답이다>의 저자 마쓰오카 세이고도 마찬가지다. 다치바나 다카시만큼의 폭넓은 분야를 아우르지는 않아도, 특히 저자가 주장하는 편집 공학이라는 방법은 가히 혁신적인 독서법이라 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편집 공학이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정보 편집의 모든 것을 다루는 연구개발 분야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미디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따라서 편집 공학의 연구 대상은 뇌, 미디어, 컴퓨터, 말, 몸짓, 이미지, 음악 등 모든 것이 포한됩니다....(중략)....'형식적인 정보 처리'가 아니라 '의미적인 정보 편집 과정'을 연구하고, 더 나아가 사람들의 세계관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어 가는 지를  전망하는 것이 목적입니다."(p.138) 간단히 말해 방대한 양의 독서를 통해 그 내용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종합적인 흐름 속에서 인간 정신의 전 영역을 다루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편집 공학이라는 거창한 용어의 핵심인 셈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인간 정신이 이룩해낸 전 영역에 걸친 연대기라고 할까, 마치 백과사전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나가는 지식의 무한 확장! 나는 대학생들의 지식 수준이 곧 한 사회의 지적 발달 단계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대학 강의가 있는 한 언제나 학기 초에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할 것이다. 덧붙여 여러가지 독서법도 제시할 것이다. 나 자신의 독서법도 포함하여.

기술의 발달이 곧 지식의 확장은 아니다. 기술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단지 커다란 욕망을 잘게 쪼개어 부분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뿐이다. 독서는 그렇지 않다. 독서는 스스로 지식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며,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지주로써 기능한다. 독서는 곧 삶이다. 관심 분야가 많고 넓을수록 삶은 그만큼 덜 외롭다. 자신만의 독서법을 터득하여 행복한 삶을 영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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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1940 - 제2차 세계대전 최초의 대규모 전격전 세계의 전쟁 3
알란 셰퍼드 지음, 김홍래 옮김, 한국국방안보포럼 감수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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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집중적으로 읽었던 롬멜 관련서와 함께 프랑스 패망 원인을 더 깊이 알고 싶어 선택해 읽었던 <프랑스 1940>은 롬멜 관련서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워낙 순식간에 이루어진 군사작전이라 이 이상의 깊은 해석이나 논평은 불가능하리라. 그럼에도 간결한 내용과 일러스트레이션, 사진과 지도 등이 어울어져 처음 접하는 독자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당시의 독일군보다 더 강하고 장비도 더 많고 좋았던 프랑스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쉽게 독일에게 무너졌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선은 厭戰또는 嫌戰사상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시 특히 프랑스는 집집마다 희생자가 있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지루한 참호전이나 처음 등장했을 때 괴물이라 여겨졌던 전차,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기관총과 지독히도 비인간적인 대량살상 무기인 독가스에 이르기까지,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인들에게 던져준 화두는 과연 인간성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이성이 이룩한 과학이 인간 말살에 동원되는 아이러니, 문명의 몰락 등, 그 때까지 인간성이 직면해 온 최대의 위기에 대한 자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프랑스군은 적극적으로 독일군에 대항하지 않았고, 따라서 패망은 필연적이었다. 여기에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써먹었던 전략, 바로 戰擊戰(Blitzkrieg)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전차의 발상국인 영국이나 전통적 육군 강국인 프랑스가 전차에 대해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못하고 보조적인 것으로서만 여겼던 반면, 나치 독일은 전차에서 미래 전쟁의 핵심을 보았고 하인츠 구데리안이나 에르빈 롬멜 같은 선구적인 전차전 지휘자들을 갖추었으며 대규모 전차와 항공기, 포병과 보병을 이용한 입체적인 전략을 구상하여 전차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프랑스를 압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패망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물론 이 두가지 외에 다른 원인들도 작용했겠지만, 꽤 괜찮은 무기와 전략을 갖추었다 해도 국민 개개인의 사기와 전쟁수행 능력 정도에 따라 하나의 국가가 무력 앞에 쉽게 무너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지금 한국은 어떠한가? 북한의 핵 개발과 잦은 무력도발,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망언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막강한 자위대의 힘, 중국의 쭉쭉 뻗어 나가는 경제와 군사비 지출의 증액에 따른 군사적 자신감, 비록 색이 많이 바랬어도 여전히 강대한 정치와 세계의 군사력을 죄지우지하는 러시아 사이에서, 한국은 온전히 국가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다시는 한반도에서 타국의 군대가 충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다시는 한반도가 식민지로 전락하여 후손들에게 나라없는 설움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순히 군사적으로 강한 국가,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쌓여 이만큼이라도 발전을 이룩한 현재의 한국에 안주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한가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일 만큼은 바라지 않는다. 이념의 시대가 저물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한반도에는 그 이념이 살아 있다. 서로를 이해하고 평화를 구축해나가는 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국민 하나하나가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눈과 귀를 열어두고 국가를 보존하는 데 힘쓰기를 바랄 뿐이다. 또 정치인들은 진정 국가의 보존을 위해 당의 이익과 정치적 입지를 지양하고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외교력을 키우는데 힘쓰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군에 바란다. 첨단무기의 도입만이 능사가 아니다. 병력수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시대도 아니다. 군대는 국가의 보존에 힘쓸 때만 그 존재 가치가 있다. 군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국민을 해치는 일은 없기기를 바란다. 프랑스의 패망은 현재의 한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니, 관심은 가지고 있는가? 한 아이의 아버지로써,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중년의 넋누리라고 폄하하지는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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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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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책을 모으고 또 읽어 온 분야에는 神話가 포함되는데, 그 계기는 아마 영문학을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 선배들로부터 영문학을 포함한 서양문명의 뿌리가 고대 그리스 신화라는 말을 듣고서 Edith Hamilton의 <Mythology>를 열심히 공부하던 때와 일치할 것이다. 당시에 신화라 하면 물론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 공식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신화와의 인연은 전공에 대한 도움 뿐만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직시하는 데도 일종의 이정표가 되주었다. 그렇게 신화를 읽어 나가던 중,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대학원 석사과정 중이던 1992년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고, 단순한 이야기로써의 신화를 넘어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신화의 참 의미와 마주하고는 새삼 '신화의 힘'에 매료되었던 그 시공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서론이 길었다. 이 책의 저자인 미국인 Joseph Campbell에 대해서야 워낙 저명한 분이니 덧붙일 말은 없지만, 이 책보다 더 일찍 만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원제는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을 읽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내게는 신화와 동의어로 여겨진다는 것만은 말해야 겠다. 아무튼 이 책은 저자와 저널리스트인 Bill Moyers가 1985~6년에 가졌던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대화 형식이라고 그 깊이를 얕보았다는 큰 코 다칠 것을 각오하고 읽기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다양한 논의들이 펼쳐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도대체 신화란 무엇인가? 변화와 속도의 디지털 시대인 지금, 새삼 아날로그의 대명사라 할 신화가 끝없이 인용되고 살아 남아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초기 신화의 발생시기에는 신화의 역할이 곧 우주와 자연 현상에 대한 고대인의 소박한 해석이었겠지만, 과학의 힘으로 우주와 자연의 신비들이 하나씩 해명되고 있는 현재는 오히려 인간의 내면 탐구에 대한 길잡이로써의 신화의 역할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세계의 많은 신화 속에는 우주의 탄생부터 인간의 발생, 문명과 문화의 씨앗이 발아하는 순간과 사계절의 순환,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삶과 죽음의 필연성, 영웅의 순례를 통한 통과의례의 미덕 등에 이르는 온갖 인간의 '생각'들이 넘쳐 난다. 게다가 정치적 권력관계에 대한 비판, 인간의 욕망을 포함하는 갖가지 감정에 대한 경계, 우주 또는 자연과의 합일 등, 속도가 채워주지 못하는 정신의 허기를 채워주는 현재적 가치들이 가득하다. 현대인들은 가져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한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고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사실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 인간은 어디까지나 욕망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욕망을 충족시키고 그 욕망의 지속을 위해 쉼없이 전진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번쯤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p.217) 내 앞에 놓여 있는 미로를 향해 전진! 결국 신화는 인간이 극복해야 할 온갖 고난들을 상징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궁극적인 내면의 힘을 끌어내도록 안내해주는 Ariadne의 끈이며 우리 모두는 기꺼이 미로로 들어가 Minotaur와 대적하고자 하는 Theseus인 것이다. 

 

여담: 이 책의 한국어 번역 초판은 본래 고려원에서 1992년에 나왔는데,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쾌 커다란 커피 자국이 책 아래 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 책을 읽는 도중 깜빡 졸다가 종이컵에 들어있는 커피를 건드려서 엎지른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본 리뷰에 올린 사진은 이끌리오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것으로, 2011년에 재구매하여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20대에 읽었을 때보다 40대 중반을 훌쩍 넘기고 읽어 본 현재의 느낌은, 삶의 다양한 경험이랄까, 여러가지 고난과 불행을 겪고 난 뒤여서 그런지, 그 어떤 상황도 훨씬 넘어서기가 수월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신화에 대한 독서를 꾸준히 해온 덕분이리라. 위의 고려원판은 지금도 내 책꽂이에 잘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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