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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1940 - 제2차 세계대전 최초의 대규모 전격전 ㅣ 세계의 전쟁 3
알란 셰퍼드 지음, 김홍래 옮김, 한국국방안보포럼 감수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6월에 집중적으로 읽었던 롬멜 관련서와 함께 프랑스 패망 원인을 더 깊이 알고 싶어 선택해 읽었던 <프랑스 1940>은 롬멜 관련서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워낙 순식간에 이루어진 군사작전이라 이 이상의 깊은 해석이나 논평은 불가능하리라. 그럼에도 간결한 내용과 일러스트레이션, 사진과 지도 등이 어울어져 처음 접하는 독자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당시의 독일군보다 더 강하고 장비도 더 많고 좋았던 프랑스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쉽게 독일에게 무너졌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선은 厭戰또는 嫌戰사상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시 특히 프랑스는 집집마다 희생자가 있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지루한 참호전이나 처음 등장했을 때 괴물이라 여겨졌던 전차,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기관총과 지독히도 비인간적인 대량살상 무기인 독가스에 이르기까지,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인들에게 던져준 화두는 과연 인간성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이성이 이룩한 과학이 인간 말살에 동원되는 아이러니, 문명의 몰락 등, 그 때까지 인간성이 직면해 온 최대의 위기에 대한 자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프랑스군은 적극적으로 독일군에 대항하지 않았고, 따라서 패망은 필연적이었다. 여기에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써먹었던 전략, 바로 戰擊戰(Blitzkrieg)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전차의 발상국인 영국이나 전통적 육군 강국인 프랑스가 전차에 대해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못하고 보조적인 것으로서만 여겼던 반면, 나치 독일은 전차에서 미래 전쟁의 핵심을 보았고 하인츠 구데리안이나 에르빈 롬멜 같은 선구적인 전차전 지휘자들을 갖추었으며 대규모 전차와 항공기, 포병과 보병을 이용한 입체적인 전략을 구상하여 전차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프랑스를 압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패망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물론 이 두가지 외에 다른 원인들도 작용했겠지만, 꽤 괜찮은 무기와 전략을 갖추었다 해도 국민 개개인의 사기와 전쟁수행 능력 정도에 따라 하나의 국가가 무력 앞에 쉽게 무너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지금 한국은 어떠한가? 북한의 핵 개발과 잦은 무력도발,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망언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막강한 자위대의 힘, 중국의 쭉쭉 뻗어 나가는 경제와 군사비 지출의 증액에 따른 군사적 자신감, 비록 색이 많이 바랬어도 여전히 강대한 정치와 세계의 군사력을 죄지우지하는 러시아 사이에서, 한국은 온전히 국가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다시는 한반도에서 타국의 군대가 충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다시는 한반도가 식민지로 전락하여 후손들에게 나라없는 설움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순히 군사적으로 강한 국가,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쌓여 이만큼이라도 발전을 이룩한 현재의 한국에 안주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한가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일 만큼은 바라지 않는다. 이념의 시대가 저물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한반도에는 그 이념이 살아 있다. 서로를 이해하고 평화를 구축해나가는 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국민 하나하나가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눈과 귀를 열어두고 국가를 보존하는 데 힘쓰기를 바랄 뿐이다. 또 정치인들은 진정 국가의 보존을 위해 당의 이익과 정치적 입지를 지양하고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외교력을 키우는데 힘쓰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군에 바란다. 첨단무기의 도입만이 능사가 아니다. 병력수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시대도 아니다. 군대는 국가의 보존에 힘쓸 때만 그 존재 가치가 있다. 군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국민을 해치는 일은 없기기를 바란다. 프랑스의 패망은 현재의 한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니, 관심은 가지고 있는가? 한 아이의 아버지로써,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 버린 중년의 넋누리라고 폄하하지는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