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2001년에 한 번, 2007년에 한 번, 그리고 올해에 한 번, 모두 세 번 읽었다. 물론 그 사이에도 수시로 편지 한 편씩 읽기를 계속해왔으니, 이 책이야말로 앞으로도 내 枕頭의 書로서 늘 내 곁에서 잔잔한 울림으로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잡아 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었던 해마다 개인적으로 큰일들을 겪었고, 물론 그 일들은 다산 선생이 겪었던 가문의 몰락과 廢族으로써의 참담함에 비할 바 아니겠으나, 살면서 누구든지 겪게 되는 역경과 고난은 그 당시엔 그 어떤 일 보다도 넘어서기 힘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럴 때마다 읽었던 유배지에서의 편지들은, 반대파의 모함에 의해 밑바닥까지 추락한 한 인간과 가문의 몰락이라는 비극적 사실을 넘어 그 어둠뿐인 삶에서 스스로를 지탱하고 가문의 중흥을 위해 불철주야 살을 깎고 피를 흘리는 고통 속에서 자신을 지켜나간 참선비의 개인적 기록 그 이상이다. 그러니까 시대 배경은 조선이지만 그 편지들에서 개진되는 생각들은 보편적인 인간성의 해체이자 그 극복에 대한 해결책이며 결국엔 거대한 학문으로 완성될 사상적 궤적인 셈이다. 특히 두 아들에게 독서를 강조하는 부분이 거의 매 편지마다 나오는데, 그것만으로도 체계적인 독서론이 될 정도이다. 예를 들어 “반드시 처음에는 경학(經學)공부를 하여 밑바탕을 다진 후에 옛날의 역사책을 섭렵하여 옛 정치의 득실과 잘 다스려진 이유와 어지러웠던 이유 등의 근원을 캐보아야 한다. 또 모름지기 실용의 학문, 즉 실학(實學)에 마음을 두고 옛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했던 글들을 즐겨 읽어야 한다.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에야만 바야흐로 참다운 독서를 한 군자라 할 수 있다.”(p.41~2)나 “무릇 독서하는 도중에 의미를 모르는 글자를 만나면 그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본 뿌리를 파헤쳐 글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수백가지의 책을 함께 보는 것과 같다.”(p.97)처럼 독서 의 단계부터 독서의 목적, 그리고 체계적인 학문으로써의 독서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이 인간으로써 올바르게 서기 위한 실천적 지침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물론 이 책 속에는 독서론 이외에도 저술하는 법, 두 아들이 폐족으로써 여하히 몸을 지키고 세류에 굽히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기르는 법이라든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참선비나 군자 또는 성인(聖人)로 살아가는 마음가짐과 몸가짐 등 뿐 아니라, 특히 둘째 형님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들은 한 편 한 편이 학문론이라 할 수 만큼 그 깊이가 대단하다. 현재 한국의 학자들 중에 이만큼의 투철한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학문에 전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리에서 최대치의 정신력을 발휘하여 인간으로써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의 거대한 업적을 이룩한 다산 정약용 선생. 자신을 유배지로 내몰고 가문을 박살낸 반대파에게 느꼈을 분노와 복수심을 오히려 내면으로 돌려 차분히 마음을 달래고 오롯이 독서와 학문에 전념하여 권세가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인간적 완성을 이룩한 다산 정약용 선생.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를 당했다 하여 청운(靑雲)의 뜻을 꺾어서는 안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p.189) 절대 절망하지 말라. 한국인에게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계시다. 내게도 다산 선생은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잡아 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참 스승이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산문선 나랏말쌈 6
정약용 지음 / 솔출판사 / 1997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많은 저서들에서 개진하고 있는 국가개혁이나 목민관의 도리 등, 기왕의 거대한 사상의 실천적 단편이랄까, 그래서 오히려 다산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짧은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이 책에서 다산 선생은 記라든지 傳, 또는 說, 論, 原, 疏, 紀事, 雜文 등에 이르는 여러 가지 글쓰기 형식을 빌려 다양한 관심사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신랄한 一喝에 이르기까지, 비단 조선 시대를 뛰어 넘어 오늘날에도 전혀 퇴색하지 않는 매서운 비판정신을 가득 擔持하고 있다. 예를 들어 論의 한 편인「간사한 아전에 대해 논함: 奸吏論」에서 “아전에게 간사한 짓을 못하게 하려면, 조정에서 사람을 뽑을 때에 오로지 시부에만 의거하여 뽑지 말고, 행정 사무에 익숙한 사람을 현의 관리에 오르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군현이 피폐해지고, 매우 교활하여 다스리기 어려운 아전이 있을 때마다 이들을 시켜 다스리게 하고 나서 진실로 성적이 있으면 의심 없이 공경(公卿)을 제수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아전의 간사함이 금지될 것이다.”(p.236~7)라는 부분만 보더라도, 현재 공무원들의 부정과 부패가 도를 넘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체로 저술하는 법은 우선 經籍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고 그 다음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학문이어야 하며, 국경을 지키고 성을 쌓는 기구의 제도로 외침을 막아낼 수 있는 분야의 것들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p.70)라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 학문에 관한 생각들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다산 선생이야 방대하고도 꼼꼼한 독서로 이름 높은 분이지만, 요즘 출판되고 있는 책들과 팔리고 있는 책들을 살펴보노라면 다산 선생의 명확한 저술 지침에서 한참 거리가 먼, 그야말로 “먹과 종이를 허비하”(p.71)고 있는 상황에 가깝다. <論語> 등의 이름난 경전들은 대학교수나 전공학자들이나 읽고 연구하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전락한지 오래고, 세상을 경영하거나 백성에게 득이 되는 학문에 필요한 책이 출판되기는커녕,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의 이름값을 노리고 쏟아져 나오는 자서전이나 신변잡기, 노골적인 소재로 지성보다는 욕망을 자극하는 대중문학과 경박한 상상력으로 현실도피에 한몫하는 판타지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분명 다산 선생이 살았던 조선시대보다 분명 책의 종류나 가짓수에 대단한 발전이 있었지만 정작 인간으로써 어떻게 제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世流에 흔들리지 않고 단단히 서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도덕적 성찰을 담은 책들은 더 이상 쓰여지지도 않고 팔리지도 않으며 누구의 주목도 끌지 않는다. 결국 제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은 고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 다산 선생이 제시하는 저술 지침이야말로 책을 선택하는 지침으로도 손색없다. 분명 <논어>나 <大學> 등의 경전들은 오래 전의 책이지만, 인간으로써의 기본적인 도리는 경전들 속에 다 들어 있지 않은가? 또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는 다산 선생의 <經世遺表>에,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실천적인 방법들은 <牧民心書>에 담겨 있지 않은가? 나 역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산 선생처럼 시대를 경영하고 백성들을 위하는 글을 쓰고 싶다. 언제쯤이나 가능할지. 이외에도 다산 선생은 우리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효자나 충신, 풍수 등의 많은 관습이나 제도들과 같은 사회적 약속 등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필력으로 전혀 새로운 일깨움을 준다. 그 논리는 정연하고 그 예는 적확하여 누구도 반박하거나 대안을 내 놓을 수 없다. 이처럼 다산 선생의 글은 어떤 것이든 독자에게 기존의 확고하고 당연시되는 思考를 두드려 깨워 진정으로 아픈 鞭撻을 준다. 이 책을 꼼꼼히 다 읽고 나면 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사의 전반적인 모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찾으려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에 놀랄 것이다. 진정한 고전의 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인간에게 해답을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몰입 : 인생을 바꾸는 자기 혁명 - Think Hard! 몰입
황농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친구로부터 추석 선물로 받은 황 농문의『몰입』. 나는 이 책을 그야말로 단숨에 읽었다. 추석연휴 동안 이 책 읽기에 ‘몰입’하여 핵심을 파악했고 그 실천법과 응용에 이르는 思考의 궤적을 내 뇌 속 깊숙이 새겨 두었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주제를 하나 정해 꾸준히 생각을 집중함으로써 종국엔 해결에 이르는 과정을 저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평이하게 서술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몰입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 시작이 어렵고 설사 시작했다 하더라도 중간에 그만 두기가 쉽다는 점과, 과연 생각을 집중하면 그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의 해결이 정말로 가능할까 라는 의심 따위를 일체 배제하고 몰입 자체의 무한한 가능성에 커다란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 여타 자기개발서와 다른 점이다. 게다가 몰입이 절정에 이르러 결국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지적 희열과 행복감은 자신의 능력보다 낮은 문제를 풀고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따를 수 없는 극치의 희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저자가 주장하는 몰입은 결국 直觀을 위한 준비 단계와 다를 바 없다. 직관이란 무엇인가? 수학이나 물리학적 지식 따위의 기존 방법으로는 풀리지 않던 현상에 대한 해답이 어느 날 갑자기 문득 떠오르는 현상, 그러니까 자나 깨나 몰입을 실천하는 도중에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것, 일종의 섬광이랄까, 이것이 직관이다. 그러나 사실 직관도 자신의 분야에 대한 지식이 많이 쌓여 있어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최소한의 물리학적 지식과 수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닐까? 또는 상상력이야말로 몰입 이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나는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회화 작품들도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화가의 직관적 이해와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림들이 나오기 까지 화가의 뇌 속에서 진행되었을 수만 시간 동안의 몰입과 유레카의 순간들이 더해져 우리들이 감탄해마지 않는 걸출한 작품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상상력이 없었다면 단순한 색과 형태에 불과했으리라. 또 베토벤의 작품들 중 걸작으로 통하는 음악들도 그가 하일리겐 슈타트를 산책하며 머리속으로 몰입하고 또 몰입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나온 것들이다. 산책을 하는 어느 순간 선율이 떠올랐을 것이고, 그 선율을 악보에 옮긴 뒤에도 수없는 퇴고를 거쳐 어느 음표 하나 버릴 것 없는 걸작이 탄생했을 것이다. 사실 소위 천재들로 분류되는 소수의 사람들은 몰입과 직관, 상상력 등을 통해 언제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해도,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떨까? 이 책의 저자는 평범한 사람도 몰입을 통해 지극히 행복한 순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현대인들 대부분이 이미 만들어진 외부의 자극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선 관심분야가 적고, 설사 관심이 있다 해도 표면적이고 껍데기뿐인 단편 지식만을 인터넷 등을 통해 재빨리 습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현대인의 경박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가? 우선 저자가 제시하는 몰입의 5단계를 의심 없이 실천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할 듯싶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讀書力이다. 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천재성이 다만 몰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우선 폭넓은 관심과 그 관심을 풀어 줄 기본으로서의 독서가 오히려 나중에 몰입에 들어갔을 때 더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으리라 믿는다. 따라서 서너 개 이상의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에 장기간에 걸친 몰입이 결합되었을 때의 그 시너지 효과는, 별다른 지식 없이 그저 몰입만으로 도출해낼 수 있는 것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백지장에서 무엇이 나오랴.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나가는 내 뇌의 시냅스에 새겨진 지식의 가짓수를 신뢰한다. 우선 다양한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아라. 몰입은 그 다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는 한국인으로써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그에 대해 관심이나 가지고 있는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서양의 이론가 내지 대학자, 또는 철학자 등을 빌어 소위 권위를 획득하고자 하지는 않는가? 비록 서양의 학문을 다룰 때는 당연히 서양인 사상가의 권위가 요구된다고 할지라도, 한국인의 삶을 이야기할 때 조차도 서양의 권위를 빌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다산 정약용 선생이야말로 한국의 긴 역사가 배출한 많은 인걸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실학자이자 수원성을 설계하고 기중기를 발명한 과학자이고,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힘이 되고자 평생을 바친 목민관이자 경전을 연구하고 해제한 탁월한 경학자이면서, 자기 수양에 힘쓰는 한 편 시를 쓰면서 감정을 토로한 감성적 시인이었고, 자식들에게는 귀양지에서 편지로 학문에 매진하기를 당부했던 엄격한 아버지이자, 500권이 넘는 다종다양한 책을 남긴 위대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그의 책 속에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거의 모든 양상들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그 극복에 대해 한 편 이상의 글들이 들어 있어, 어떻게 생각하면 다산 이외의 다른 사람의 글은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주제의 다양함이나 분량의 방대함에서 거개의 인물들을 압도한다. 이토록 거대한 인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커녕 현대 한국어로 번역된 책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는 후손으로써의 직무유기임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내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사실은 다산 선생이 세상에 남긴 수많은 저술들 중에서 내가 직접 원문으로 읽고 해독해서 이해할 만큼의 한문해독 실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럴 때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다산 선생의 인품과 글이 내뿜는 매력에 빠져 천천히 성과물들을 내놓고 있는 국내학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서양철학전공자의 논문집보다 값어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설이 너무 길었다. 이 책 <다산어록청상>은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 정민 선생이 다산의 글을 10 항목으로 나누어 읽고 각 글에 대해 짧막한 감상평을 덧붙인 것이다. 각 항목인 경세, 수신, 치학, 독서, 학문 등으로도 알 수 있듯,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다산 자신에 대한 경계이자 사색과 성찰의 끝없는 모색의 결과물이다. 다산 선생에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에 대한 것이다. 유배는 조선역사에서 다산 선생 이전에도 흔한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유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배지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좌절 속에서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한 채 한 많은 삶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떠들썩한 저잣거리에서 물러나온 셈치고 사색과 성찰을 거쳐 유배 이후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 호기로 삼을 것인가. 물론 다산 선생은 후자를 택했고, 그의 이름과 관련있는 수많은 업적들은 모두 유배지에서 성취된 것이다. 한 인간이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한계를 딛고 삶을 완성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다산 선생은 그것을 해냈고, 사실, 어떤 것이라도 그의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고뇌와 고독이 그를 거쳐 갔을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가령 우리가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으며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다가 죽는다고 하자. 죽는 날 사람과 뼈가 함께 썩고, 한 상자의 책도 전하는 바가 없다면 삶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이런 것을 삶이라고 한다면 금수와 다를 것이 없다. 세상에 으뜸가는 경박한 남자가 있으니,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기르는 일을 '한가한 일'이라 하고,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옛날이야기'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맹자는 말했다. '대체를 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고, 소체를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된다'고. 저가 소인됨을 달게 여기니 난들 장차 어찌하겠는가?"(p.38)


위의 인용문 뿐만 아니라 이 책 곳곳에는 다산 선생의 삶에 대한 사색과 성찰이 마치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줄줄이 매달려 있다. 속세의 인간들이 가치를 부여하며 가까이 하고자 기를 쓰고 달려드는 권력이나 재물, 명예나 지위 등은 다산 선생이 보기에 소인배들의 아귀다툼일 뿐이다. 가능한 그 아수라에서 빨리 물러 나와 삶 그 자체가 주는 기쁨을 향유하고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다. 여전히 신자유주의 산업자본(가)의 가공할 힘이 개인의 목을 죄고 노동의 신성함을 모독하고 있는 이 때, 유배지 초가에서 조그만 책상 앞에 앉아 희미한 전등 아래 책을 펴고 자신의 삶을 추슬리면서 인생사 전반에 걸친 도덕적 사색과 윤리적 성찰을 거듭했을 다산 선생의 삶을 조금이라도 따르려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선비가 한가로이 지내며 이렇다 할 일도 없을 때 책을 읽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책을 읽지 않는다면, 작게는 정신없이 잠자거나 바둑 혹은 장기를 두게 되고, 크게는 남을 비방하거나 돈벌이와 여색에 힘쓰게 된다. 아아, 그러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책을 읽을 수밖에."(p.49~50)


청장관 이덕무의 글을 모은 [책에 미친 바보] 중 <내가 책을 읽는 이유>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당신은 왜 책을 읽는가? 책이 아니어도 호기심을 자극하고 재미를 주는 것은 널려 있지 않은가? 구태여 책을 읽지 않아도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이 있다면 책 따위는 한갖 종이 뭉치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책을 읽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왜 읽어야 하는가? 사람마다 책을 읽어야 하는 당위성이나 독서에 대해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테지만,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의미하는 밑바탕에는 결국 자기 수행 또는 자기 계몽이라는 실천적 목적이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덕무는 조선의 선비들 중에서도 방대한 독서량과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대표적 독서인이다. 그의 삶은 태반이 경서와 제자백가, 고금의 역사와 문물제도, 음운학, 문자학, 역대문집, 농서와 의서 등에 이르는 다방면의 독서로 형성되었다. 그는 책읽기를 통해 얻은 지식과 지혜로 자신의 삶을 도덕적이고 경건하게 유지해 나갔고 인간적 고뇌로부터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며 최소한도로 소박하게 살았다. 지독한 가난에 수시로 끼니를 거르면서도, 굶주림으로 누이동생을 먼저 보냈음에도, 그럴수록 책에 대한 애착과 독서에 대한 집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혹자는 경제활동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독서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이덕무가 살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선비라는 신분이 지니고 있던 사회적 역할이 생산활동과는 거리가 있었고 오직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에 한정되어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선비의 독서행위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일종의 정신적 방법론을 제시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에 따라 독서행위와 생산활동을 같은 반열에 두었던 사회적 분위기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덕무는 많은 글에서 독서의 당위성 내지 독서의 취지 또는 독서 방법등을 수시로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독서는 배가 고플 때도, 추울 때도, 마음이 괴로울 때도, 병에 걸렸을 때도 결코 그만둘 수 없었던 그 자체 생존의 이유였다. 


"책을 읽는 이유는 정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으뜸이고, 그 다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다음은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 예절에 관한 책을 읽으면,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멈추는 행동에서 도리에 어긋난 점을 저절로 깨닫게 되니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의학에 관한 책을 읽으면, 한 번 주리고 한 번 배부른 일에서 위태롭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되니 번민하는 마음이 생긴다....."(p.51~2)


지금처럼 정보가 넘치고 출판되는 책의 종류나 양이 엄청난 시대에, 그럴수록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숫자가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읽는다 해도 대중소설 같은 베스트셀러나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소위 자기계발서 등은,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다거나 삶의 자세를 설정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책읽기 이전에 어떤 책을 선택할 것인가가 관건인것이다. 위의 글처럼 이덕무는 사서육경은 물론 의서, 농서, 법률서 등 그 시대에 접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분야의 책들을 초인적으로 읽어냈다. 그러므로 사물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뿐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고 그 순환원리에서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삶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거의 모든 지혜들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관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당신은 관심 분야가 몇 개인가? 그 관심 분야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방법에 의지하는가? 아무리 인터넷, 스마트 시대라고 해도, 속도가 인간의 정신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책상 앞에 앉아 관심 분야의 책을 펴고 차분하게 한 장씩 읽어나가는  것에 비할 생산적 행위가 또 있으랴! 관심 분야가 많을 수록 외부의 흐름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을 지킬 수 있다. 관심 분야의 명저들을 읽으며 속세의 잡음들로부터 벗어나라. 그리고 자기수양에 힘쓰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