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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어록청상 ㅣ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는 한국인으로써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그에 대해 관심이나 가지고 있는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서양의 이론가 내지 대학자, 또는 철학자 등을 빌어 소위 권위를 획득하고자 하지는 않는가? 비록 서양의 학문을 다룰 때는 당연히 서양인 사상가의 권위가 요구된다고 할지라도, 한국인의 삶을 이야기할 때 조차도 서양의 권위를 빌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다산 정약용 선생이야말로 한국의 긴 역사가 배출한 많은 인걸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실학자이자 수원성을 설계하고 기중기를 발명한 과학자이고,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힘이 되고자 평생을 바친 목민관이자 경전을 연구하고 해제한 탁월한 경학자이면서, 자기 수양에 힘쓰는 한 편 시를 쓰면서 감정을 토로한 감성적 시인이었고, 자식들에게는 귀양지에서 편지로 학문에 매진하기를 당부했던 엄격한 아버지이자, 500권이 넘는 다종다양한 책을 남긴 위대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그의 책 속에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거의 모든 양상들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그 극복에 대해 한 편 이상의 글들이 들어 있어, 어떻게 생각하면 다산 이외의 다른 사람의 글은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주제의 다양함이나 분량의 방대함에서 거개의 인물들을 압도한다. 이토록 거대한 인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커녕 현대 한국어로 번역된 책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는 후손으로써의 직무유기임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내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사실은 다산 선생이 세상에 남긴 수많은 저술들 중에서 내가 직접 원문으로 읽고 해독해서 이해할 만큼의 한문해독 실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럴 때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다산 선생의 인품과 글이 내뿜는 매력에 빠져 천천히 성과물들을 내놓고 있는 국내학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서양철학전공자의 논문집보다 값어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설이 너무 길었다. 이 책 <다산어록청상>은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 정민 선생이 다산의 글을 10 항목으로 나누어 읽고 각 글에 대해 짧막한 감상평을 덧붙인 것이다. 각 항목인 경세, 수신, 치학, 독서, 학문 등으로도 알 수 있듯,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다산 자신에 대한 경계이자 사색과 성찰의 끝없는 모색의 결과물이다. 다산 선생에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에 대한 것이다. 유배는 조선역사에서 다산 선생 이전에도 흔한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유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배지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좌절 속에서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한 채 한 많은 삶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떠들썩한 저잣거리에서 물러나온 셈치고 사색과 성찰을 거쳐 유배 이후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 호기로 삼을 것인가. 물론 다산 선생은 후자를 택했고, 그의 이름과 관련있는 수많은 업적들은 모두 유배지에서 성취된 것이다. 한 인간이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한계를 딛고 삶을 완성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다산 선생은 그것을 해냈고, 사실, 어떤 것이라도 그의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고뇌와 고독이 그를 거쳐 갔을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가령 우리가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으며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다가 죽는다고 하자. 죽는 날 사람과 뼈가 함께 썩고, 한 상자의 책도 전하는 바가 없다면 삶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이런 것을 삶이라고 한다면 금수와 다를 것이 없다. 세상에 으뜸가는 경박한 남자가 있으니,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기르는 일을 '한가한 일'이라 하고,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옛날이야기'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맹자는 말했다. '대체를 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고, 소체를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된다'고. 저가 소인됨을 달게 여기니 난들 장차 어찌하겠는가?"(p.38)
위의 인용문 뿐만 아니라 이 책 곳곳에는 다산 선생의 삶에 대한 사색과 성찰이 마치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줄줄이 매달려 있다. 속세의 인간들이 가치를 부여하며 가까이 하고자 기를 쓰고 달려드는 권력이나 재물, 명예나 지위 등은 다산 선생이 보기에 소인배들의 아귀다툼일 뿐이다. 가능한 그 아수라에서 빨리 물러 나와 삶 그 자체가 주는 기쁨을 향유하고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다. 여전히 신자유주의 산업자본(가)의 가공할 힘이 개인의 목을 죄고 노동의 신성함을 모독하고 있는 이 때, 유배지 초가에서 조그만 책상 앞에 앉아 희미한 전등 아래 책을 펴고 자신의 삶을 추슬리면서 인생사 전반에 걸친 도덕적 사색과 윤리적 성찰을 거듭했을 다산 선생의 삶을 조금이라도 따르려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