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눈물 - 아사히신문사 40년 베테랑 기자의 아프리카 희망 보고서
마쓰모토 진이치 지음, 김숙이 옮김 / 평단(평단문화사)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월 마지막 주 마지막 날에 읽었던 두 권의 책 중 한 권이다. 아래에 소개한 [역사를 바꾼 총 AK 47]의 저자가 쓴 책으로, 기자로써의 취재력과 몸을 사리지 않는 현장 답사가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나는 국제지역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책을 읽어 왔는데, 특히 아프리카를 포함하는 소위 제 3세계에 대해서는 우리와 같은 식민 체험을 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 이 책은 일본인 기자가 쓴 것이다. 그래서일까, 20세기 초중엽 아시아를 휩쓸었던 제국주의의 한 지류이던 일본 출신 기자의 눈으로는 아프리카 각국 정부의 저개발, 내전, 불법 이주 등과 같은 현재 아프리카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오직 지도자들의 무능과 탐욕에 의한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아프리카가 처한 현실의 밑바탕에는 영토,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타국을 침략하여 주권을 빼앗고 원주민의 살 권리마저 박탈했던 제국주의의 비인간적이고 잔혹했던 확대정책에 더욱 큰 책임이 있다. 본래부터 자치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무능력함을 강조하면 실제로 무능력하게 되듯, 제국주의의 근거없는 인종적 편견을 바탕에 깔고 야만인에 대한 문명개화 이론을 무기 삼아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고 노동력, 자원을 착취하며 학살했던 제국주의의 팽창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인간의 사악함의 증거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가 제국주의의 일원이었던 일본 출신이라는 점이 이 책을 써나가는 데 일종의 걸림돌이었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을 때는 이 점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이 시각상의 경도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된 아프리카 입문서라 할 만하다. 물론 이 책은 아프리카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저개발의 원인과 정부 지도자들의 무능함, 그들의 탐욕으로 인한 부정부패, 이러한 절망적 상황 속에서 피어나고 있는 민중들의 자발적 노력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각국의 민중들이 스스로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고 불법 이주한 외국에서 힘들게 번 돈의 일부를 고향에 있는 가족친지들에게 송금하는 모습이나 어떻게든 가난한 현실에서 살아가려고 안간힘 쓰는 모습 등에서는, 풍요로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인간애가 느껴진다. 길고도 잔혹했던 식민 체험 뒤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무의미한 내전, 고도의 문맹률, 사회 간접시설의 태부족, 먹을 음식과 물, 입을 옷 마저 전무한 상태에서 인간으로서의 품위만은 잃고 싶지 않은 아프리카인들의 안간힘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또 하나, 저자는 아프리카에서 점차 영향력을 넓혀 나가고 있는 중국의 약진을 신식민주의라고 명명하며 경계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자신들의 과거는 잊은 것일까?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거치지 않고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본과 일본인들이 우익으로 치달아 가고 있는 현재 상황을 주시해 볼 때, 이것은 편향된 시각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어떻게 읽던 간에 저자의 의견에 100% 찬동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나마 생겼다면 진실로 그들에 대해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인류애로써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역사를 다룬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라는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를 바꾼 총 AK47
마쓰모토 진이치 지음, 이정환 옮김 / 민음인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군대를 다녀온 한국 남자라면 그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총이 바로 소련의 미하일 칼라시니코프가 개발한 AK 47이라는 돌격소총이다. 한국의 주적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총이 바로 이것 이니까. 이 총은 본래 나치 독일로부터 조국 소련을 지키고자 개발한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무기가 되고 말았다. 이 책은 저자가 그 원인을 추적한 것인데, AK 47 소총이 장점으로 내세우는 쉬운 조작성과 적은 부품으로 인한 고장의 배제 등,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바로 그 점이 악명을 떨치게 된 근본 이유임을 밝혀내고 있다. 한 때 베트남이나 쿠바, 앙골라, 모잠비크 등지에서 식민지 해방 투쟁의 주역으로 각광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지의 내전 지역부터 소말리아의 해적에 이르기까지 이권 다툼의 현장에서 어김없이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흉기가 되어 버렸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무기라는 것도 결국 그것을 쓰는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시에 적국의 위협으로부터 조국과 국민을 지키던 무기가 평화시에 자국민을 죽이는 흉기로 전락한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한국의 현대사를 포함하여). 특히 현재 내전을 겪고 있는 시리아나 이집트, 이라크 등의 경우를 보더라도 무기를 쥐고 있는 측이 정치권력과 금전적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그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볼 때, 결국 무기가 갖고 있는 무력이라는 상징적 위력을 넘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인간에게 궁극적 해결의 열쇠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아프리카의 내전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소년소녀 병사들의 손에 쥐여져 있는 AK 47 소총의 위협적인 총구에 배어 있는 진한 피 냄새에 흠칫했고 슬픔을 느꼈으며, 반면 소말리아의 북쪽에 위치한 소말릴란드의 자치화 과정을 다룬 부분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AK 47 소총을 반납하고 그 대신 학교에서 교육을 받거나 축구를 하면서 또는 총이 없는 거리를 활보하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통해 아프리카가 걸어야 할 희망의 국가 건설을 향한 발걸음이 인상에 남는다. AK 47 소총으로 인해 집과 가족을 잃고 하루하루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살던 사람들이 바로 그 총을 손에서 내려놓음으로써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 까지 꽤 오랜 시간을 돌아 온 셈이다. 한반도에도 가공할 수와 양의 무기들과 핵,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적대시하는 권력집단과 증오하는 두개의 국민집단이 존재하고 있다. 지금은 정전이 아니라 휴전 중이며, 화해와 교류의 틈바구니에서 무력도발과 보복을 오가고 있다. 팽팽한 남북 대치상황에서 AK 47 소총이라는 하나의 무기를 통해 무기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 상징성, 그리고 무기를 사용하는 인간의 선택권 문제 등, 꽤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책읽기였다.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인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가 자신의 형님인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독서 습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은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은 만한 틈만 있으면 문득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정민, 『오직 독서뿐』김영사, p. 380) 또, 조선 영조 때 유중림(柳重臨)이 당시 이미 읽히고 있던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증보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공부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만 보려 들면 익숙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알려고 하면 정밀하지 못하여 빨리 하려는 것이 도리어 더디게 되는데 그게 바로 공부하는 사람의 큰 병통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 분량을 적게 하여 익히 읽고 정하게 생각하면 오랜 후에는 자연히 바른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유중림, 『산림경제』솔, p. 104)라는 말이 있는데, 홍석주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매일 꾸준하게 조금씩 이라도 해나가는 독서와 공부. 독서와 공부는 그 시간을 따로 마련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서와 공부도 마치 숨을 쉬듯이 의식하지 않고 언제든 내가 있는 그 자리와 그 시간에 임하여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아 책읽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거나, 또는 이미 돈 벌며 잘 살고 있는 데 공부는 무슨 공부냐 하면서 더 이상의 지적인 호기심을 해소하려고 들지 않는다. 물론 그 이외에도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 케이블 방송 등, 우리의 하루 24시간을 온통 자극적인 오락과 게임, 상업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채우는 방해 요소도 독서와 공부의 큰 장애물이긴 하지만, 부인하지 못할 사실을 말하자면 책을 읽고 공부할 마음 자체가 없는 것뿐이다. 책에도 여러 분야가 있고, 공부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에는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바로 공부였다. 특히 조선의 선비들에게 독서는 그 자체로 절대적이고 순수한 공부의 한 형태였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읽기를 통해 조선의 선비들은 정신과 육체를 가다듬고 욕망을 절제하며 일상생활에서 언행일치를 실천하고자 했다. 독서와 공부를 무슨 거창한 것으로 여기고 경원시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독서와 공부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저 언제 어디서든 읽고 공부하는 습관만이 나의 뇌 속을 바꾸고 뇌가 바뀌면 육체도 더욱 활성화되며 그렇게 궁극적으로 나와 내 주변 세계가 총체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지금이야 워낙 많은 종류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인터넷이나 전자책 등, 책의 형태와 의미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어떤 포맷을 택해 무엇을 읽던 그 한 줄 한 줄이 그동안의 안일했던 정신을 후려쳐 깊은 반성과 함께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신변잡기식 수필이나 가벼운 베스트셀러 소설, 또는 주식투자를 권유하는 자기계발서가 과연 나태하고 고여서 썩어 가는 정신을 뒤흔들어 궁극적인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만약 당신이 베스트셀러만을 읽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정신은 가볍고 자극적이며 말초적인 수준에서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다. 전혀 지성적이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수도 없으며 그저 남들이 시키는 것만 하고 싶다면 베스트셀러를 읽어라. 하지만 독서가 곧 공부라면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근래 들어 소위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여러 분과(分科) 학문들의 통섭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한 권의 정평 있는 고전(古典) 독서야 말로 폭넓은 지식과 깊은 지혜의 원천에 바로 들어 갈 수 있는 척도임을 잊지 말길. 물론 처음부터 쉽게 고전을 읽을 수는 없다. 그러나 홍석주나 유중림의 말처럼 매일 꾸준히 정해놓은 분량만큼은 어김없이 읽고 공부하는 습관을 실천한다면 어느새 고전 속의 깊고도 넓은 지식과 지혜가 당신을 단단히 감싸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 민 선생의 저서『삶을 바꾼 만남,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첫 번째 마디의 제목은 「아! 과골삼천」이다. 과골삼천? 한자로는 踝骨三穿이라 쓰는데, 다산 선생의 강진 유배 시절 가장 충실했던 제자 치원(巵園) 황상(黃裳, 1788~1870)에 따르면 다산 선생이 유배 20년간 오로지 공부하고 저술에 힘쓰느라 방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이나 났다.”라고 한 그의 문집 치원유고(巵園遺稿)에 나오는 말이다. 이 네 글자를 처음 본 순간 나는 문득 사고가 정지되었고, 잠시 뒤 과연 학문이란 무엇이며 학문에 임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았다. 다산 선생이 강진 유배 시절에 완성한 방대한 저서들의 권수는 차치하고라도, 그러한 결과물을 가능하게 했던 그야말로 혹독하다고 할 그 도저(到底)한 삶의 태도는 범인(凡人)들이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마음의 경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폐족의 일원으로써 가문의 몰락과 피붙이들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하고 언제 끝날지 기약 없는 유배지에서, 그 참담한 심정을 추스르고 오로지 학문에 힘을 쏟아 조선역사상 전무후무하고 전방위에 걸치는 업적을 남긴 다산 정약용. 어쩌면 유배생활의 무변하고 활기차지 못한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사색하고 산책하며 끼니를 위해 써야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온통에 학문에만 전념한다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일까? 도대체 학문이 무엇이기에? 단순히 앎에 대한 욕구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복사뼈에 구멍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다산 선생에게 학문이란 어쩌면 하루를 살도록 해주는 생존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오늘 하루 학문에 전념했으니 내일도 그럴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 20년이라는 유배지에서의 무변한 생활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학문이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한 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오히려 학문은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저 만치 날아가 버리는 나비처럼,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고 내외에서 인정하는 순간이 사실은 더욱 전념해야할 때인 것이다. 인간사 어느 것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학문 또한 끝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학문의 존재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학문의 과정 도처에서 생겨나는 의문들과 고개를 드는 오류들, 한 인간이 평생을 살면서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의 질문들과 늘 곤궁한 답변, 과연 올바르게 추론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모호할 때, 그 때가 바로 학문에 더욱 매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다산 선생은 강진에 유배된 1801년 11월부터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1818년 8월까지, 단 하루도 어기지 않고 오직 독서와 학문에만 전념함으로써 학문에 임하는 자의 태도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실천했다. 그만 되었다고 자부할 때 그 때가 학문의 참다운 시작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나는 어떨까? 나의 학문 자세를 다산 선생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학문을 끝내 내 손에 쥐고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전념할 수 있을까? 황상이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면서 제기했던 자신의 세 가지 단점, 즉 둔할 둔(鈍)과 막힐 체(滯), 그리고 어근버근할 알(戛)을 들어 과연 자신이 학문을 할 수 있을지 의심했듯이, 나 역시 평범한 두뇌와, 끈질기지 못한 성정과, 정치(精緻)하지 못한 덩범거림으로 늘 중도에 그치고 마는 나약함이 병통인데, 어떻게 학문에서 일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황상은 자신의 단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고쳐준 다산 선생의 충고를 60여 년간 실천했다. 그러면 나의 병통도 학문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나의 단점을 잘 알고 있으니 어떤 경우에라도 황상처럼 세 번 부지런히(三勤)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비록 지금까지 한 번도 복사뼈에 구멍이 나 본 적은 없지만, 엉덩이에 땀띠가 나서 앉지 못할 정도로 독서하고 공부해 본 적은 있으니, 다산 선생이나 황상만큼은 못 되어도 나름대로 이룰 수는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브리가다! 아마존
미나미 겐코 지음, 손성애 옮김 / 이후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리뷰를 올린다. 왕복 버스 안에서 단숨에 읽은 책이지만, 그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저자는 여자의 몸으로 아마존 밀림에 들어가 여러 부족들과의 소통을 통해 아마존에 대한 문명사회의 몰이해와 일방적인 오해들을 하나씩 수정해나간다. 아마존 인디오들의 자연과 함께하는 삶은 결국 세계가 소위 문명화되고 기계물질화 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지혜의 온전한 모습일텐데, 우리들은 그 지혜마저도 잘 농축된 비타민을 통해 섭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니까 지혜도 돈주고 살 수 있는 하나의 소비품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주지하다시피 현대문명은 이미 여러가지 병폐를 드러낸지 오래지만 여전히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에너지의 고갈과 생명 경시 등을 여전히 반복하면서 지구 자체의 존속에 대한 한계성을 점점 앞당기고 있다. 아마존의 인디오들도 서구의 자본주의의 공세와 선진국민들의 삶을 더욱 향상시키고자 하는 물결에 점점 착취당하면서 생존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삶을 호기심 이상의 진정한 관심과 인류애로 대하지는 않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최소한 인디오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고 그들 역시 역사와 나름의 문화를 지니고 있는 지구인이라는 것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마치 옛날 한국처럼 그들도 깊은 인정을 지니고 있고 마을 공동체의 중심으로써의 노인에 대한 공경심은 물론, 생명을 중시하고 삶과 죽음의 자연스러운 순환을 통해 무욕의 실천을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체득한 사람들이다. 자연에 가까운 삶을 비루하고 비문명이라 폄하하는 현대인들에게 정작 머리를 둘 곳은 문명과 물질이 아니라 숲과 바람, 하늘과 땅임을 인디오들은 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