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인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가 자신의 형님인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독서 습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은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은 만한 틈만 있으면 문득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정민, 『오직 독서뿐』김영사, p. 380) 또, 조선 영조 때 유중림(柳重臨)이 당시 이미 읽히고 있던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증보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공부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만 보려 들면 익숙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알려고 하면 정밀하지 못하여 빨리 하려는 것이 도리어 더디게 되는데 그게 바로 공부하는 사람의 큰 병통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 분량을 적게 하여 익히 읽고 정하게 생각하면 오랜 후에는 자연히 바른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유중림, 『산림경제』솔, p. 104)라는 말이 있는데, 홍석주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매일 꾸준하게 조금씩 이라도 해나가는 독서와 공부. 독서와 공부는 그 시간을 따로 마련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서와 공부도 마치 숨을 쉬듯이 의식하지 않고 언제든 내가 있는 그 자리와 그 시간에 임하여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아 책읽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거나, 또는 이미 돈 벌며 잘 살고 있는 데 공부는 무슨 공부냐 하면서 더 이상의 지적인 호기심을 해소하려고 들지 않는다. 물론 그 이외에도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 케이블 방송 등, 우리의 하루 24시간을 온통 자극적인 오락과 게임, 상업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채우는 방해 요소도 독서와 공부의 큰 장애물이긴 하지만, 부인하지 못할 사실을 말하자면 책을 읽고 공부할 마음 자체가 없는 것뿐이다. 책에도 여러 분야가 있고, 공부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에는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바로 공부였다. 특히 조선의 선비들에게 독서는 그 자체로 절대적이고 순수한 공부의 한 형태였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읽기를 통해 조선의 선비들은 정신과 육체를 가다듬고 욕망을 절제하며 일상생활에서 언행일치를 실천하고자 했다. 독서와 공부를 무슨 거창한 것으로 여기고 경원시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독서와 공부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저 언제 어디서든 읽고 공부하는 습관만이 나의 뇌 속을 바꾸고 뇌가 바뀌면 육체도 더욱 활성화되며 그렇게 궁극적으로 나와 내 주변 세계가 총체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지금이야 워낙 많은 종류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인터넷이나 전자책 등, 책의 형태와 의미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어떤 포맷을 택해 무엇을 읽던 그 한 줄 한 줄이 그동안의 안일했던 정신을 후려쳐 깊은 반성과 함께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신변잡기식 수필이나 가벼운 베스트셀러 소설, 또는 주식투자를 권유하는 자기계발서가 과연 나태하고 고여서 썩어 가는 정신을 뒤흔들어 궁극적인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만약 당신이 베스트셀러만을 읽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정신은 가볍고 자극적이며 말초적인 수준에서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다. 전혀 지성적이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수도 없으며 그저 남들이 시키는 것만 하고 싶다면 베스트셀러를 읽어라. 하지만 독서가 곧 공부라면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근래 들어 소위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여러 분과(分科) 학문들의 통섭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한 권의 정평 있는 고전(古典) 독서야 말로 폭넓은 지식과 깊은 지혜의 원천에 바로 들어 갈 수 있는 척도임을 잊지 말길. 물론 처음부터 쉽게 고전을 읽을 수는 없다. 그러나 홍석주나 유중림의 말처럼 매일 꾸준히 정해놓은 분량만큼은 어김없이 읽고 공부하는 습관을 실천한다면 어느새 고전 속의 깊고도 넓은 지식과 지혜가 당신을 단단히 감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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